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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르타뉴에서 보낸 편지> 9. 활기 넘치는 벼룩시장 나들이
 

‘하늘을 나는 교실’의 필자 정인진님이 프랑스의 서북부 브르타뉴 지방에서 머물면서 보고 느낀 것들을 기록한 ‘브르타뉴에서 온 편지’ 연재 www.ildaro.com 
 
일 년에 한 번, 마을마다 벼룩시장이 열리다 

▲ 벼룩시장이 열리던 날, 골목마다 사람들로 가득 찼다.     ©정인진 
 
날씨가 점점 따뜻해지자 벼룩시장이 열리는 동네가 늘기 시작했다. 겨우내 조용했던 마을의 골목마다 창고 안에 처박혀 있던 해묵은 물건들이 펼쳐지고, 주민들은 음료를 나누며 서로 안부를 주고받는다. 늦은 봄이나 바캉스가 지난 가을이면, 이곳 브르타뉴에서 자주 목격할 수 있는 풍경이다.
 
렌에서는 작은 단위의 마을마다 돌아가며 벼룩시장이 열린다. 벼룩시장은 한 해에 한 번, 마을잔치를 대신하는 것 같다. 일 년 중 한 차례 정도, 그것도 매년 비슷한 시기, 일요일에 날이 잡힌다는 건 여기서 일 년을 사니,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물론, 벼룩시장이 브르타뉴에서만 열리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의 많은 도시와 마을에서 벼룩시장이 열린다. 프랑스 전역에서 벌어지는 벼룩시장의 장소와 날짜를 알려주는 인터넷 사이트(http://vide-greniers.org)도 있다. 이 사이트에 들어가면, 지역과 날짜, 구체적인 장소를 지도와 함께 검색할 수 있다.
 
이런 벼룩시장이 몇 주 전, 우리 동네 클뢰네에서도 열렸다. 이 동네의 지역주민들과 어울릴 수 있을 거란 기대 때문에 다른 어떤 마을의 벼룩시장보다 관심이 갔다.
 
나는 우리 동네 벼룩시장은 만사 제치고 꼭 나가볼 생각이었다. 울타리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낮은 담장 너머, 늘 감탄하며 바라봤던 꽃들의 주인들이 누군지 볼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라벤더를 흐드러지게 키우는 집의 주인이 궁금했고, 봄마다 마당 가득 수선화가 피어있는 이웃에는 다 누가 사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다른 어떤 동네보다 설레며, 벼룩시장이 열리는 날을 기다렸다. 마침, 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있었지만, 벼룩시장이 펼쳐지는 거리는 활기로 넘쳤다. 쾌청한 날씨는 아니었지만, 브르타뉴에서 이 정도라면 충분히 벼룩시장 하기에 좋은 날이다.
 
오래된 물건들이 새로운 생명을 얻는 곳 

▲ 친구들과 함께 벼룩시장에서 물건을 팔고 계신 할머니들. 사진을 찍고 싶다고 하자, 모두 환한 웃음으로 포즈를 취해 주셨다.     © 정인진
 
나는 벼룩시장 구경하길 좋아한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더 자주 간다. 벼룩시장에서는 필요한 물건을 싼 가격에 살 수 있어 경제적인데다가 우리와 문화적으로 차이가 많은 프랑스인의 생활을 들여다볼 수 있어 재밌기 때문이다.
 
내가 몰랐던 물건을 발견할 때면, 주저하지 않고 그 물건의 쓰임을 묻는다. 또 흥미롭게 여겨지는 건 사기도 한다. 그것 중 어떤 건 놀라울 정도로 만족스러워 지금도 잘 쓰고 있지만, 그다지 소용이 없어 찬장에 틀어박혀 있는 것도 적지는 않다. 그러나 여전히 재미난 물건을 찾기 위해, 벼룩시장을 기웃거리는 건 즐겁다.
 
옛날 유학시절, 북부 프랑스에서 살 때도 벼룩시장을 많이 이용했다. 그곳은 브르타뉴보다 더 벼룩시장이 많이 열렸다. 원한다면,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마다 장소를 골라가며 벼룩시장을 구경 갈 수 있었다. 북부 프랑스는 프랑스의 다른 어떤 지역보다 벼룩시장이 활성화되어, 연초마다 벼룩시장의 일정과 장소를 자세하게 알려주는 두툼한 책이 출판될 정도였다.
 
난 이곳 벼룩시장에서 당시 필요했던 생활용품들은 물론, 공부에 필요한 책들을 싼값에 사기도 했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호두 깎기’ 같은 흥미로운 것들을 많이 찾아냈다. 마음에 무척 든 나머지 한국까지 들고 온, 오래된 촛대와 액자, 자물쇠도 없이 굴러다니는 열쇠, 멋진 타일 공예품들을 산 것도 바로 그곳에서였다. 이것들 가운데 열쇠는 목걸이로 만들어 지금도 걸고 다니고, 다른 건 가족들에게 선물로 주기도 했는데, 다들 신기해하며 즐겁게 받았다.
 
벼룩시장에서 이렇게 내 눈길을 잡는 건 이런 오래된 물건들이다. 여기 사람들에게는 구닥다리처럼 느껴지는 아주 오래된 것들, 예를 들어 알록달록 꽃들이 촌스럽게 그려진 그릇이나 젊은이들은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 오랫동안 창고에 처박혀 있었을법한 옛날 장식품들에 눈이 머문다. 그래서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들고 나온 물건을 자주 뒤적이는데, 그 물건들 속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이 하나 정도는 꼭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요즘 같은 여행객의 처지로는 아무리 관심이 간다 해도 살 수 있는 것이 많지는 않다. 무겁지 않아야 하고 부피가 너무 나가서도 안 된다. 특히, 짐가방 속에서 쉽게 깨질만한 것은 절대로 안 된다. 물론, 값도 엄청나게 싸야 한다. 이런 여러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춰야 하니, 벼룩시장에서 뭔가를 구매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벼룩시장의 인기 메뉴, 소시지 구이
 
벼룩시장이 열리는 곳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는 바로 먹을거리들이다. 규모가 크면 클수록 벼룩시장에는 먹을거리로 넘친다. 무엇보다 브르타뉴에서는 마을잔치처럼 벼룩시장이 펼쳐지는 만큼, 시민단체들이 나와서 먹을거리를 파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는 감자튀김이나 샌드위치, 음료 등, 간단하게 요기할 만한 것들이 저렴한 값에 판매된다.
 
이런 먹을거리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걀레트 오 소시스’(galette au saucisse)라 고 부르는 숯불에 구운 소시지를 겨자 소스를 곁들여 넓게 부친 메밀전병에 돌돌 만 것이다. 이 소시지는 벼룩시장에만 등장하는 건 아니다. 일주일마다 열리는 장터나 축제가 벌어지는 공원, 축구경기가 있는 날 운동장 앞에서도 이 소시지를 볼 수 있다. 

▲ 행사가 열리는 곳에 어김없이 나타나는 ‘걀레트 오 소시스’ (‘밤의 축제’가 열리던 타보르공원에서) © 정인진
 
브르타뉴에서 ‘걀레트 오 소시스’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어김없이 나타나 연기를 피운다. 그래서 어떤 행사가 열리는 장소에 다다른 것을 확인시켜주는 것도 이 소시지 굽는 냄새다. 행사장 먼발치에서부터 소시지 냄새가 난다. 사람들이 보이지 않아도 소시지 굽는 냄새가 난다면, 거의 다 도착한 것이다.
 
이 소시지가 더욱 식욕을 자극하는 건 냄새와 더불어, 소시지를 구울 때 숯불에서 피어나는 흰 연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흰 연기가 소시지 굽는 냄새와 함께 바람에 실려 군중들 위를 뒤덮으면, 나도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줄 선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맛도 맛이지만, 숯불에 연기를 풀풀 내며 구워지는 소시지 냄새를 뿌리치기란 정말 힘들다. 게다가 날씨까지 선뜩선뜩 하면, 절대로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이곳에서는 소시지를 사기 위해 길게 줄 서 있는 사람들의 풍경은 낯선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날, 난 케밥을 선택했다. 우리 동네엔 아랍인이 운영하는 케밥 집이 하나 있다. 늘 그 앞에는 사람들로 북적여, 꼭 한번 저 집에서 케밥을 먹어보리라 결심하고 있던 터였다. 벼룩시장이 열렸던 날 그 케밥 집 앞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날은 길가에 불판을 내놓고 고기를 굽고 있었다. 기대했던 대로 그 집 케밥은 정말 맛있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모르지만, 이곳에는 햄버거보다 케밥이 인기가 높다. 실제로 브르타뉴에는 프랑스의 다른 어떤 지역보다 맥도날드 같은 다국적 기업의 패스트푸드점들이 적은 편이다.
 
할머니들의 삶이 들여다보이는 물건들
 
벼룩시장에서 특히 내가 관심을 두는 건 할머니들이 가지고 나온 물건들이다. 그중 하나는 그분들이 젊었을 때, 열정을 가지고 수집했겠다 싶은 물건들을 발견할 때다. 이런 물건 중에는 오래 전 여행지에서 제법 값을 치루고 샀을 것 같은 것들도 있다. 또 큰맘 먹고 장만해 귀하게 여기며, 쓰지 않고 보기만 했을 것 같은 물건도 있다.
 
이렇게 한 번도 쓰지 않고 장식만 하다가 세월의 먼지만 가득 쌓인 채, 거리로 나온 물건들을 바라보는 건 슬프다. 한눈에 봐도 아까워서 쓰지 못하고 온통 장식장에서 세월을 보낸 것들이다. 주변 사람들한테 선물로 주지도 못하고, 아까워서 본인이 쓰지도 못하고, 그저 소중하게 간직만 했던 것들이 할머니와 함께 세월이 흘렀다.
 
이 할머니들은 왜 지금까지 이것들을 쓰지 못하고 이렇게 세월을 보내신 걸까? 그런 할머니들 속에서 난 우리 어머니의 얼굴을 보기도 한다. 

▲ 직접 만드셨다는 한 할머니의 물건들. 앞에 있는 수틀은 내가 샀다. 이 수틀을 가지고 손수건에 자수를 놓을 것이다.     © 정인진
 
바느질을 좋아하는 나는, 이런 물건 중에서도 특히 할머니들이 오래전에 직접 뜨거나 바느질해 만든 물건들에 눈길이 더 머문다. 그것들을 완성했을 당시는 공이 너무 많이 들어, 아까워서 쓰지도 못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주기는 더욱 힘들었을 마음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서는 별 소용도 없어지고, 게다가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천덕꾸러기가 되어, 그저 길거리 좌판에 펼쳐지는 신세가 되었다. 다행히 누군가 흥미를 보여서 새로운 주인을 만난다면 잘 된 일이지만, 내가 보기엔 그것도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서 더 슬플 때가 많다.
 
나는 그녀들의 바느질 도구들은 가끔 사는 편이다. 골무나 실, 수틀 등. 그때그때 마음에 드는 것을 한두 개 사와 그것들로 바느질을 한다. 이런 식으로 소용없어진 그녀들의 물건에 새로운 호흡을 불어넣어 준다. 그렇게 그녀들을 다시 만나는 것이 좋다.
 
이와 반대로 뜰에서 키운 화초들을 화분에 담아온 할머니들을 볼 때는 아주 반갑다. 벼룩시장에는 기름진 시커먼 흙에서 건강하게 자란 화초들을 작은 화분마다 소담스럽게 담아, 들고 나온 할머니들이 가끔 계시다. 만약 내가 이곳에 살고 있다면, 사지 않고는 못 배겼을 것이다.
       
빗줄기 속에서도 벼룩시장은 이어지고 

▲ 한 할머니가 정원에서 키운 화초들을 화분에 담아오셨다.     © 정인진
 
우리 동네에서 벼룩시장이 열렸던 날, 오후에 접어들어서는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던 빗방울이 금방 굵은 빗줄기로 변했다. 이런 상황에서 발길을 재촉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듯 했다.
 
준비해온 비옷이나 우산을 펼치는 사람들, 굵은 빗줄기는 피해야겠다고 잠시 처마 밑으로 들어간 사람들, 그러나 더 많은 이들은 태연하게 가던 발길을 이어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놀란 건, 펼쳐놓은 좌판을 정리하는 사람은 한명도 볼 수 없었다. 좌판을 벌려놓은 사람들은 언제 준비를 했는지, 큰 비닐을 꺼내 물건들이 비를 맞지 않도록 덮었다. 이런 태연한 모습에 또 한 번 놀랐다.
 
그들을 보면서 얼마 전 비가 오는 추운 날, 야외 카페테라스에서 차를 마시겠다던 한 중년 여성이 생각났다. 그녀는 “나는 브르타뉴 출신이라, 용감하다”라고 이유를 댔었다. 내가 보기에도 브르타뉴 사람들은 용감한 것이 분명하다.
 
처마 밑으로 비를 피한 사람들에 섞여, 나도 잠시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그러다 빗줄기가 얇아진 틈을 타,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집이 가까워서 참 다행’이라고 매우 만족해하며, 비속에서 태연하기만 한 그들을 뒤로 하고 얼른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는 그날 사온 물건들을 뒤적이며, 즐거워했다. 그러는 사이, 다시 해가 나고 있었다. (정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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