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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소송을 통한 사회변화를 말하다> ② 김수정 변호사

※ 공익소송과 같은 법률운동이 우리 사회에 가져온 변화는 무엇인가. 소송운동의 효과와 한계는? 공익변호사그룹 ‘희망을 만드는 법’이 주최한 제2회 공익인권법실무학교 특별좌담 <‘이기는 것’과 ‘바꾸는 것’-사회변화 전략으로서의 소송, 그 가능성과 한계>에서 4인의 패널이 발표한 내용을 연재합니다. 두 번째 발제자는 법무법인 지향의 김수정 변호사이며, 전체 좌담은 희망법 홈페이지(hopeandlaw.org)에서 볼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이긴 것인가, 진 것인가’ 변호사의 고민
 
최근 대법원에서 패소 확정이 되어 의원직이 상실된 노회찬 의원의 ‘안기부 X파일 사건’ 아시지요? 그 사건을 제가 7년간 진행해왔어요.
 
[※ 안기부 X파일 사건: 2005년 진보정의당 공동대표 노회찬 의원은 ‘안기부 X파일’이라 불린 옛 국가안전기획부의 도청 녹취록을 인용해, 삼성그룹의 떡값을 받았다고 언급된 안강민 전 서울지검장과 전.현직 검사 7명의 이름을 보도자료를 통해 공개하고 인터넷에 올렸다. 노 의원은 안 전 검사장의 고소로 기소되었고,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아 의원직을 상실했다. –편집자 주]
 
이 사건은 1심에서 패소, 2심에서 승소, 대법원에 가서 파기환송 패소. 그렇게 결론적으로는 패소한 것인데요. 그 과정에서 변호사로서 느끼는 사건의 무게에 대해 많이 생각해봤어요. 어떤 사람의 변호인으로 재판에 참여할 때, 그 개인의 인생의 무게가 어깨를 내리누르죠. 노회찬 의원 사건의 경우에는 거기에 사회적인 무게까지 짓누르면서 ‘아, 과연 내가 계속 이 일을 해야 하나’ 이런 생각마저 들었는데요. 때문에 ‘소송운동’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을 해보았습니다.
 

▲ 법무법인 지향의 김수정 변호사 © 희망을 만드는 법  

초기에 공익소송이 한두 가지씩 사회적 효과를 가지게 되면서, 사회단체들에서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소송을 하는 방식이 유행처럼 번졌어요. 그래서 사건의 당사자와 주체가 나서서 사회운동으로서의 방식을 많이 고민하기보다는, 소송을 먼저 생각하고 어떤 문제나 갈등이 생기면 변호사를 먼저 불러 ‘이 사안을 소송으로 어떻게 하면 될까’ 물었던 것 같아요.
 
소송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한두 번 성과를 얻게 되니까, 너무 많은 역량이 거기에 쏠리는 현상을 보게 되었죠. 그 과정에서 ‘나는 과연 무엇인가’, 변호사로서 사건을 맡게 되었을 때 ‘변호사는 소송운동의 주체인가, 보조자인가’ 하는 질문이 생겼습니다. 소송에서 이겼을 때 ‘정말 이긴 것인가’, ‘뭔가를 바꾼 것인가’ 묻게 되고, 패소했을 때에도 ‘패소했다고 해서 우린 진 것인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시민들이 이끈 ‘호주제 폐지’ 과정과 위헌소송
 
호주제 위헌 소송의 경우는 정말 모범적인 소송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호주제를 폐지하기 위해 엄청난 시민운동이 일어났고, 운동의 역량이 한 2년 쌓이면서 그 결과로 우리가 소송을 제기하게 되었지요.
 
[※ 호주제 위헌소송: 1999년 5월 한국여성단체연합 호주제폐지운동본부가 만들어지며 호주제 폐지운동이 본격화되었다. 2000년 9월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연대’가 발족되어 국회청원이 시작되었고, 2003년 9월 4일 법무부는 호주제 폐지 민법개정안을 입법 예고하였다. 위헌소송은 2000년 11월 20일 헌법재판소에서 첫 공개변론이 시작되어, 2005년 2월 3일 호주제를 규정한 민법 781조 1항 및 778조의 헌법불합치 결정이 났다. –편집자 주]
 
호주제 위헌소송은 5년이나 지속되었지만, 그 사이에도 호주제 폐지를 위한 투쟁의 열기는 식지 않고 오히려 퍼져나갔습니다. 그래서 소송은 호주제 폐지운동에서 주가 아닌 보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호주제 폐지를 염원하는 사회적 목소리가 컸기에 당연히 승소해야만 하는 부담 역시 큰 상황이었습니다.
 
위헌소송에 참여한 변호사들도 단순히 소송을 보조하는 역할을 넘어 훨씬 더 적극적으로 투쟁 과정에 참여했어요. 일반적으로 소송을 하게 되면, 제가 담당 변호사인 경우엔 언론 인터뷰를 하거나 토론회에 나가거나 하지 않아요. 그런데 호주제 위헌소송에서는 공동변호인단을 짜서 언론 담당을 별도로 뒀고, 토론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호주제 폐지운동이 활성화되면서 정부 부처(여성부)에서도 힘을 보탰고, 정말로 다 된 밥상에 숟가락 하나 얹어 놓은 것이 당시 헌법재판소의 판결이었죠. 저는 호주제를 폐지하게 되는 과정을 보며 ‘아, 공익소송은 정말 이렇게 진행이 되는 것이구나’ 하고 깊은 감명을 받았어요.
 
‘양심적 병역거부’운동의 동력을 잃게 된 판결
 
호주제 위헌소송은 저에게 큰 승리의 경험이었는데, 이후로는 또 많은 패배의 경험이 쌓이게 되었습니다.
 
‘양심적 병역거부 소송’에도 많이 관여하고 있는데요, 이 소송은 사실 우리가 처음 주도한 것이 아니었어요. 우리는 ‘현재는 양심적 병역거부와 대체복무제 도입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무르익지 못했다. 그간의 경험에 비춰봤을 때 위헌소송을 해서 급하게 결론이 나버리면 이 사안에 대한 관심이 식을 수밖에 없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위헌소송을 제기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병역거부자들은 다양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지요. 2002년에 어떤 특정 사건에 관해서 법원이 툭 병역법 위헌심판 제청을 해버린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원래 개입되지 않았던 사건에 부랴부랴 들어가서 위헌소송을 진행하게 된 겁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또 다른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법원의 병역법 위반 판결에 불복해 대법원까지 상고를 해버린 거예요. 대법원에서 확정 판결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진 거죠. 병역법에 대한 위헌 제청은 헌법재판소에 가 있었는데, 헌법재판소가 언제 결정을 내릴지 모르는 상태에서 어느 날 대법원에 판결 날짜가 잡힌 거예요.
 
그때가 2004년인데 당시는 한두 달 사이에 언론에서 양심적 병역거부 사안을 언급하는 사례가 2백~3백건이 넘을 정도로, 사회적으로 열기가 뜨거웠던 시기였어요. 저는 대법원에 상고한 의뢰인을 찾아가서 상고심을 포기시킬까도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대법원에서 확정 판결이 나올 경우 헌법재판소 결정에 영향을 미칠 것을 고려해야 했기 때문이죠.
 
그러나 ‘지금 이 정도로 언론에 많이 알려진 상황에서 이 분들이 상고를 포기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비겁하게 보일 수도 있겠다. 정면 돌파하자’고 결론을 내렸지요. 그리고서 공개변론 요청도 하고, 법적으로 할 수 있는 건 다 했지만 결론은 위헌심판 신청이 ‘기각’되고 말았습니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하는 분들이 지금까지 1년에 6백~7백명 가량 나오기 때문에 투쟁은 계속되고 있지만, 그 판결로 인해 사회적 운동이 동력을 잃고 길을 헤맸어요.
 
이후로도 다시 법원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형사처벌하는 것에 대해 위헌제청을 해서 지금까지 8차례나 계속되고 있는데요. 2011년에 헌법재판소가 내린 ‘합헌’ 판결은 2004년보다 훨씬 더 후퇴한 내용이었지요. 특히 1차 결정에서는 비록 합헌 결정을 하면서도 다수의 헌법 재판관들이 대체복무제도 도입을 권고했는데, 7년후 내린 2차 결정에서는 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어요.
 
비단 이 판결뿐 아니라, 법원에 의해 사회가 바뀔 수 있는 선도적 판결을 기대하고 소송에 우리가 ‘올인’할 필요가 있는 것인가,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인가에 대해 상당히 회의가 듭니다. 최근에 노회찬 의원 판결을 보면서도, 우리 법원의 구성 자체가 사회구성원들이 신뢰하고 따라갈 만한 수준은 아직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한국 정치판을 바꾼 ‘1인 1표제’ 위헌소송
 
‘1인 1표제’ 위헌소송은 어떻게 보면 저로서는 운이 좋게도 사회적 의미가 있는 굵직한 소송에 영광스럽게 이름을 올리게 된 것 같습니다.
 
[※ 1인 1표제 위헌소송: 1인1투표제는 유권자가 후보자에게 투표를 하면, 후보자가 소속된 정당에도 자동 한 표가 가는 방식으로 비례대표 의석을 배분하였다. 무소속 후보에게 준 국민의 표는 비례대표에 반영되지 않았고, 거대 정당에 유리하게 진행된 사실상 ‘간접 투표’ 방식이었다. 2001년 7월 19일 헌법재판소가 ‘위헌’ 결정을 내렸고, 국회는 2002년 3월 7일 선거법을 개정해 지역구의원과 정당에 각각 투표하는 ‘정당명부 비례대표제’가 도입된다. –편집자 주]
 
그런데 이 소송의 경우에는 전혀 법적 다툼이 없었어요. 헌법에는 너무 당연하게 비례대표제에 대해 ‘직접 선거’를 명시하고 있는데도, ‘1인1표제’라는 것이 실시되어 국민들이 어느 국회의원에게 투표를 하면 그 표는 바로 해당 의원이 속한 정당으로 가서 비례대표 의원이 선출되는 ‘간접 투표’ 방식이었죠. 정당 투표가 따로 없었잖아요.
 
여기에 대해서는 투쟁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그때는 ‘제3의 당’이 없었기 때문이죠. 민주당하고 지금까지 이름이 바뀌어 온 거대 여당하고, 달랑 두 개의 정당밖에 없었으니까, 별도로 정당에 투표할 필요성을 누구도 제기하지 않은 것이었죠.
 
그런데 민주노동당이 등장하면서 상황이 달라진 겁니다. ‘이건 우리 당에 너무 불리하네.’ 이렇게 된 거죠. 그때부터 노회찬 의원과 저와의 인연이 시작된 거라고 할 수 있는데요. 노회찬 의원이 민주노동당 사무총장을 하면서 ‘이거 좀 이상하니까 한 번 위헌소송을 해보죠’ 하시는데, 그 때 ‘아, 헌법재판소 믿을 게 못 돼요’ 이러면서 소송을 하지 말자고 얘기했어요.
 
그런데 ‘지더라도 한 번 해 보시죠’ 이렇게 해서 1인1표제 위헌소송을 하게 되었는데요. 소송을 제기해놓고 그 뒤로 잊고 있었고요. (웃음) 그런데 어느 날 터진 거예요. 사실은 너무 당연한 위헌 판결이었는데, 이 판결이 진보정당이 뿌리는 내릴 수 있는 하나의 토대가 되었던 것이죠. (1인 2표제가 도입된 직후, 2004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은 10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1인1표제뿐만 아니라 ‘한국의 선거제도가 얼마나 거대 정당 위주로 짜여있는지’ 알려내는 운동을 하면서 선거법 개정의 차원에서 소송이 진행되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제일 큰 문제 중 하나인 선거구 문제를 보더라도, ‘소선거구제’는 소수 정당들에 매우 불리하기 때문에 ‘중대 선거구제’로 바꾸어야만 소수 정당들이 살 틈이 생기지요.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로 바뀐 것에서 멈추지 않고, 거대 정당 중심의 정치 지형을 바꾸기 위한 선거제도와 정치제도 개선을 요구하며 함께 싸워낼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나중에 보니 참 안타까웠어요.
 
운동의 ‘주체’가 뒤바뀌는 것을 경계하며
 
지금까지 여러 사례를 들어 이야기했는데요. 공익소송에 대해 크게 ‘소송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투쟁인 경우’와, 공익적 의미를 갖는 피해자의 권리 구제를 위해 소송을 제기하는 경우, 그리고 입법을 위해 제기하는 경우 이렇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첫 번째의 경우에는, 호주제 위헌소송과 같이 많은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소송을 제기하는 순간 운동의 주체가 바뀌게 되는 상황을 많이 목격했어요. 원래는 운동의 주체였는데 소송이 제기되면서부터 변호사의 승소를 위해 도와주는 보조자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분들은 법원 앞에서 구호를 외치고, 변호사들이 그날 무기를 들고 나가는 전사처럼 되는 것이죠.
 
주체는 따로 있는데 왜 내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으며, 또 왜 내가 그런 부담을 져야 하는가. 부담스럽기도 하고, 뭔가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어서요. 운동의 주체가 바뀔 것 같으면, 전 차라리 소송을 하지 않는 편이 좋다는 입장입니다. 운동의 주체, 투쟁의 주체는 변호사가 아니거든요.
 
제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하 ‘민변’)에서 사무차장을 맡을 때였어요. 2008년에 이명박 대통령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하겠다고 해서, 엄청난 거리 시위가 벌어졌잖아요. 이때 민변에서 위헌소송(미국산 쇠고기 및 쇠고기제품 수입위생조건 위헌 확인)을 하기 위해 돈을 모은 적이 있어요. 그 자체가 투쟁이었는데, 굉장히 많은 금액이 모였죠.
 
저는 촛불시위가 한창일 때 소송을 하는 것에 대해 약간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소송의 모집 과정이나 여러 과정들은 굉장히 잘 되었어요. 만 명 가량 되는 사람들이 원고인으로 참여하기 위해 민변에 와서 직접 도장을 찍었고요. 그런데 역시나 소송의 결과는 패소였어요. 예상했던 결과이긴 한데, 저는 소송이 과연 그 단계에서 필요한지 좀더 면밀한 판단이 있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어요.
 
다시 강조하자면, 어떤 사회운동을 해나갈 때 소송은 부수적인 것이라는 점입니다. 물론 소송을 통해서만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죠. 하지만 엄청난 준비과정을 거쳐야 하고, 운동의 주체와 역할에 대해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결과를 수용할 수 있는지, 결과가 미치는 영향까지도 판단해보고 결정해야 한다고 봐요.
 
이렇게 유념해야 할 점들 때문에 꼭 제기되어야 하는 소송에 있어서까지 수동적일 필요는 없겠지만요. 또한 변호사들도 자신이 이 소송에서 보조적인 역할인지, 주체적 역량을 가지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고 판단해보았으면 합니다. 즉, 소송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자는 제안을 드리고 싶어요.  <공익소송을 통한 사회변화를 말하다> ① 홍성수 교수
 
[정리: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 만드는 법’ 김동현]
[녹취록 정리: 류수희, 조소영 희망법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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