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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생활을 통해 제가 관찰해 온 기가 막힌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학교제도와 학교 교육이 갈수록 이 지구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중요한 일들과 관계를 잃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학 공부 잘한 아이들이 과학자가 되고 사회 공부 잘한 아이들이 정치가가 되고 국어 공부 잘한 아이들이 시인이 된다고 믿는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없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명령을 따르는 방법 외에 진짜로 가르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존 테일러 개토)

<바보 만들기>(민들레출판사, Dumbing us down)는 미국 뉴욕의 중심부 맨하튼에서 30여년간 교사로 일하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게릴라 학습법으로 제도교육에 저항해 온 존 테일러 개토(John Taylar Gatto)의 학교교육에 대한 직설적이고 통렬한 비판을 담고 있다. 저자는 뉴욕 시 ‘올해의 교사’ 상을 세 차례나 수상했으며 1991년에는 뉴욕 주에서 주는 ‘올해의 교사’ 상을 받았다. 책에 실린 주된 글들이 그 수상 자리의 연설문으로 발표되기 위해 쓰여졌다는 점 또한 신선한 충격을 준다.

“교사들의 일곱 가지 죄”

30여 년간의 교사 생활을 통해서 저자는 “인간의 능력을 자유롭게 펼치는 것은 어떤 것이며 묶는 것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 왔다. 이를 통해 얻은 통찰 중 하나는 “천재성이 지극히 보편적인 인간의 성질로서 우리들 대부분이 타고나는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지능과 재능이 종 모양의 곡선에 따라 경제적으로 분포한다는 ‘상식’은 거짓이라는 외침이다.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중독과 종속상태에 빠지는 것은 학교교육이 순응하고 의존적인 인간을 길러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1991년 뉴욕 주 ‘올해의 교사’ 상을 받는 자리에서 연설된 ‘교사들의 일곱 가지 죄’는 오늘날의 학교교육이 가진 문제점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우선 학교는 학생들에게 혼란을 가르친다. 학교에서는 학교나 교사의 독단을 비판할 수 있는 수단을 가르치지 않는다. 학생들은 교과목을 배우지만, “카톨릭 신자들이 교리 문답을 배우듯 받아들일 따름”이다. 배우는 것의 연관성을 배우지 못하는 파편화된 교육은 관계의 단절과 혼란을 가르치고 있다.

두 번째로 학생들이 배우는 것은 ‘교실에 갇히기’다. 번호를 매겨 아이들을 구속하면서 모든 학생이 피라미드 속의 돌덩이처럼 정해진 위치를 가지고 있다고 여기게 하며 자신의 위치를 받아들이게 만든다. 세 번째는 무관심이다. 종소리로 구분된 획일화된 시간에 길들여진 아이들은 “무엇이든 지나치게 몰입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몸에 익힌다. 종소리는 호기심을 인정하지 않는 학교, 배우려는 마음의 능동적인 싹을 자르고 있는 학교의 상징이다.

네 번째는 정서적 의존성이다. 권위를 가진 사람이 인정해 주지 않는 한, 학교 안에서 학생 개개인의 권리는 없다. 특혜를 빌미로 올바른 처신이 강요될 뿐이다. 개성은 일체의 분류 체계에 암적인 존재일 뿐이다. 다섯 번째는 지적 의존성이다. 교사가 어떻게 하라고 시키기를 기다리는 학생을 ‘착한 학생’으로 여기는 학교는 지적으로 의존적인 학생을 만들어내고 있다.

여섯 번째는 조건부 자신감이다. 시험과 성적, 통지표의 가르침이란 아이들이 자기 자신이나 부모를 믿기보다는 자격증을 가진 권위자들의 평가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가치가 어떤 것인지도 남이 가르쳐 주어야만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일곱 번째는 “숨을 곳은 아무 데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감시와 개인 영역의 박탈은 사회를 확고한 중앙통제 아래 놓이게 한다. 이를 위해 학생을 서로간에 일러바치게 할 뿐더러 부모의 일을 일러바치는 것까지 장려되는 것이 학교다.

흉내내는 인간 양산하는 대량교육

존 개토는 “대량교육의 원리와 구조 양쪽에 다 결함이 있다”고 말한다. 엉터리 경쟁과 억압, 강박을 가르치는 대량교육은 구조적으로 민주주의의 원리에 어긋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공평한 사회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포상과 징벌, 당근과 채찍의 교묘한 역학관계로 지탱되며 혜택과 성적, 복종을 위한 그 밖의 미끼에 따라 움직여지는 학교 조직에서는 인생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는 비물질적 가치에 대한 가르침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개토에게 있어서 교사란 ‘전문가’가 아니라 ‘자신의 가치를 향한 길을 스스로 찾도록 아이들을 풀어주는 사람’이다. 캔버스 위에 덧칠하는 그림이 아니라, ‘내재하는 형상을 찾아내도록’ 조각하는 것이 진정한 교육의 의미다.

따라서 “혼자만의 영역, 선택의 기회, 감시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교사의 한정된 능력과 밑천이 베풀어 줄 수 있는 최대한 다양한 인간관계와 상황의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 교육의 역할이자 내용이 되어야 한다. “아이들 자신이 스스로의 교사가 되고 자기교육의 주교재가 될 기회를 가지는 그런 상황을 만들어 주려고 하는 것”이 그가 지금껏 실행해 오고 있는 게릴라 학습법의 요체인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잘하고 못하는 데 따라 조건부로 주어지는 신뢰가 아니라 자연적이고 총체적인 신뢰”가 필요하다고 개토는 역설하고 있다. “사람은 제 멋대로 잘못을 저지르고 나서 스스로 바로잡을 기회를 가져야만 자신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으며, 그렇지 않고 다른 사람의 행위를 암기하거나 모방만 한다면 그 능력은 흉내에 그칠 수 밖에 없습니다.”

“교육을 삶 속으로 되돌려 놓자”

“교육이란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하는 중요한 질문에 대해서 개토는 “각 개인, 각 가정, 각 지역사회가 나름의 해답을 내놓아야 한다”고 본다. 그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전문가가 대신 해 준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며 다른 답이 나올지라도 상관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적 방식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대량교육의 문제점에 대해 “쉬운 해결책을 찾지 말 것”을 주장한다. “의무교육 같은 제도들을 가지고 다양한 가정들과 지역 사회들을 끌어 모아 놓기만 하면 공학적 해법이 확보되기라도 하듯이 이 방법을 강행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 이념들은 짓밟히고 있기” 때문이다. “지름길을 향한 시도가 가정과 지역사회를 파괴”하게 되는 것은 쉬운 해결책이 존재한다는 생각 뒤에 “하나의 기계로 인간을 보는 관점”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존 개토(www.johntaylorgatto.com)는 “가정과 지역사회를 재건하면 스스로를 교육시킬 것”이라고 믿는다. 제도적 학교를 해체하고 가르치고 싶은 사람들이 배우고 싶은 사람들을 찾아 재주껏 가르치게 하자고 말한다. 중앙에서 지역으로, 통합에서 해체로, 대량 교육에서 작은 교육으로의 변화를 요구한다. 개토의 주장을 지나쳐서 안 되는 이유는 자명하다.

“우리들이 아껴 온 개별성, 다양성 그리고 개인을 보호하는 이념들을 지키는 요체는 우리 아이들을 키워내는 방법에 달려 있다. 아이들은 살아가는 내용을 그대로 배운다. 아이들을 교실 안에 묶어둘 경우,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 우리 안에서 사회성을 익힐 기회를 잃은 채 살아가게 된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박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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