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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신의 [죽음연습] 6. 서양 철학자와 동양 승려가 전하는 지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문학사상사, 1996)를 읽다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찬장 속에는 과연 질레트 레몬 라임 향 면도용 크림과 쉬크 면도기가 들어있었다. 면도용 크림은 절반 정도 남아 있었고, 뚜껑 부근에 하얀 거품이 바싹 말라붙어 있었다. 죽음이란 그렇게 면도용 크림 절반 정도를 남기고 가는 것이다.”
 
그렇다. 이 소설 속의 도서관 직원 남편처럼 자신이 평소에 사용하던 물건을 쓰다 말고 남겨둔 채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우리가 맞게 될 죽음이다. 이 구절을 읽는 순간, 나는 생전에 어머니가 듣던 가요 카세트테이프들이 떠올랐다. 상자에서 오래된 가요테이프를 하나 꺼내서 틀어보았다. 세월의 흔적에도 불구하고, 테이프리코더에서 흘러나오는 가요는 시간의 간격을 훌쩍 뛰어넘는 듯 했다.
 
그 누구도 자신이 소장하던 물건을 남김없이 써버리거나 빈틈없이 정리해두고 죽음을 맞지는 못한다. 죽음이 우리를 데려가는 것은 미처 예상치 못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죽음이 우리를 찾아오면 죽음을 따라 서둘러 길을 떠날 수밖에 없다. 죽음은 집안을 정리하고 짐을 꾸릴 시간마저 주지 않을 만큼 냉혹하기도 하다. 죽음이 나를 부르면 미처 읽지 못한 책도 그 자리에 두고, 쓰고 싶은 글이 있어도 마무리 짓지 못하고 떠나야 한다.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모두 다 해보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야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
 
“양배추를 심고 있을 때 죽고 싶다”
 
꿈꾸는 일을 이루지도 못하고, 하고 있는 일을 끝내지 못한 채 인생이 끝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초조해지거나 바짝 긴장할 수도 있다. 죽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고 언제 죽을 지 알 도리가 없다면, 불안이나 공포를 떨치고 죽음을 담담하게 맞고 싶다. 하지만 과연 죽음 앞에서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지 않을 수 있을까?
 
프랑스의 철학자 몽테뉴의 말대로 죽음에 무관심해지면, 죽음에 익숙해지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몽테뉴는 <엣세>에서 죽음에 무관심할 때 죽고 싶다고 썼다. 자신이 양배추를 심고 있을 때 죽기를 바란다고. 가꾸던 정원이 완성되지 못해도 아무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 때, 바로 그때 죽음이 찾아오길 바란다고. 그리고 그는 오랜 시간이 필요한 계획은 세우지 말라고 우리에게 충고한다.
 
몽테뉴에 의하면, 우리가 죽음에 무관심해질 수 있는 길은 죽음을 알고 죽음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자주 죽음을 생각하고, 죽음을 언제 어디서나 마음속에 그리면서 죽음을 기다리라는 그의 조언을 일단 새겨두기로 하자.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양의 승려도 서양의 철학자가 수 백 년 전 우리에게 전한 생각을 되풀이한다. <달라이 라마 죽음을 이야기한다>(북로드, 2004)에서 나오는 ‘무상에 대한 명상’이 바로 그것이다.
 
“시작을 알 수 없는 시간 이래로 우리는 영원의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아직도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이러한 생각은 지금 해야 할 일을 내일로 미루게 하고, 결국 우리로 하여금 삶을 탕진하게 하는 크나큰 위험에 빠뜨린다. 이러한 습관을 고치기 위해서는 죽음은 언제 어느 때라도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즉 무상에 대하여 명상하는 것이 중요하다.”
 
평소에 죽음을 생각하지 않다가 죽음을 맞닥뜨리게 되면 크나큰 공포와 불안에 사로잡히는 것이 당연하다. 달라이 라마의 이야기를 좀더 들어보자. “듣고, 생각하고 명상하고 질문할 수 있을 때 준비를 하지 않는다면, 생의 마지막 날, 마음에는 여유가 전혀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를 보호할 수도 없고, 의지할 곳 또한 아무데도 없을 것이다. 오직 남아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후회뿐이다.”
 
결국, 죽음의 순간에 훨씬 앞서 죽음을 생각하고 죽음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무상에 대한 명상’과 같은 수행을 반복함으로써 죽음에 익숙해지기 위해 애쓰는 것이야말로 죽음에 대한 준비이다.
 
철학자나 승려의 조언을 깊이 새겨들은 사람이라면, 죽음에 직면해 불안과 공포, 후회로 괴로움을 겪지 않기 위해서라도 죽음이 낯설지 않도록 언제 어디서든지 죽음을 생각하고, 급기야 죽음에 무관심해지는 경지에 이를 정도로 죽음을 미리미리 준비해야 한다. 평소에 죽음을 준비하지 않고서 어떻게 편안한 죽음, 평화로운 죽음을 맞을 수 있겠나. 지금 당장 죽음을 준비해도 이르지 않다.
 
충분히 잘 살았다면 죽음도 두렵지 않다
 
어떤 순간, 어떤 곳에서도 죽음과 맞닥뜨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이른 죽음을 한탄하고 비통해 한다. ‘왜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평균수명을 채우지 못하는 거지?’ 하고. 70,80대의 평균 수명을 살지 못하면 이른 죽음이요, 억울한 일로 여겨진다.
 
몽테뉴는 말한다. “너희들의 생명이 어디서 끝나건, 너희들의 생명은 그것이 전부인 것이다. 삶의 유익함은 그 길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용 방법에 있다. 오랜 기간 동안 살았지만 조금밖에 살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너희들이 살아 있는 동안 그것에 유의하라. 너희가 충분히 살았는지 어떤지는 너희가 산 기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의 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 삶의 질이 중요하지, 생명의 양적 길이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오래 살아도 짧은 삶일 수 있고, 짧게 살아도 긴 삶일 수 있다면, 시간의 양적인 측면에서 죽음이 이르다고 안타까워하거나 장수를 기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분명하다. 인간에게 길고 짧은 삶이란 그 삶의 양적 길이와 관계없다는 생각이 마음에 와 닿는다. 몇 살에 죽건 사는 동안 삶을 낭비하지 않고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충분히 잘 살아온 사람에게는 죽음이 언제 들이닥치더라도 담담해질 수 있으리라. 따라서 삶을 잘 살아내는 것 역시 죽음에 대한 또 다른 준비가 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죽음이 두렵지 않을 만큼 잘 살아내는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죽음은 육신의 감옥을 벗어난 영혼의 자유
 
철학자 몽테뉴가 죽음에 관심을 갖고 죽음을 미리 생각하고 죽음에 익숙해지고 죽음에 무관심해지려고 애쓴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에게 철학이란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니까. 다시 말해서 죽음을 미리 생각하는 것이자 자유를 미리 생각하는 것이니 말이다.
 
몽테뉴의 이런 생각은 플라톤과 키케로와 같은 철학자들에게도 찾아볼 수 있다. 이들 서양철학자들에게 있어 철학은 인간으로 하여금 죽는 법을 배우게 해서 영혼의 자유를 체험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이들은 삶이란 육신의 감옥에 갇혀 지내는 것이기 때문에 죽음을 통해서만 인간이 육신의 감옥을 벗어나 진정으로 영혼의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우리는 몽테뉴가 “어떻게 죽어야 할지를 앎으로써 우리는 모든 예속과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생명을 빼앗기는 것이 악이 아니라는 사실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인생에 있어 아무런 불행도 없다”고 말한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철학을 함으로써, 죽는 법을 배움으로써, 자유를 미리 엿봄으로써 죽음은 두려워해야 할 악, 즉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와 해방이란 선, 즉 긍정적인 것, 오히려 추구하고 갈망해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육신으로부터 영혼의 해방이라는 철학적 믿음, 종교적 믿음은 죽음에서 두려움을 제거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믿음을 공유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죽음 앞에서 담담해지거나 무관심해지기 어려울 것 같다. 그럼에도 철학자와 승려의 충고를 그냥 무시해버리지 못한다. 삶을 충실히 살아보려고, 또 평소 인생의 무상함에 대해 명상하면서 죽음에 좀더 익숙해지려고 안간힘을 써볼 수는 있을 것이다.
 
적어도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심각하게’ 꿈꾸고 ‘진지하게’ 계획하며 현재를 미래의 들러리로 만드는 어리석음은 피해갈 수 있을 것이다. 또, 어느 날 죽음이 손짓할 때, 인상 찌푸리지 않고 순순히 따라 나설 수 있기를 여전히 소망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해소되지 않는 질문들은 남는다. 자주 죽음을 떠올리면서도 가볍고 경쾌한 삶을 꿈꾸는 것이 모순일까? 죽음을 미리 준비하면서도 삶을 즐기는 것이 불가능할까?  (이경신)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만화 <두 여자와 두 냥이의 귀촌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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