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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꽃을 던지고 싶다> 최종회: 산다는 것은 얼마나 위대한가 
 
[성폭력 피해생존자의 기록, “꽃을 던지고 싶다” 연재의 마지막 기사입니다. 고통을 이야기하고, 듣고, 공감하는 쉽지 않은 여정을 함께해 준 필자와 독자들께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주 www.ildaro.com]
 
성폭력 경험을 기록한다는 것의 의미
 
성폭력의 경험이 말해지기 어려운 사회에서, 성폭력 피해자에게 폭력적인 문화가 존재하는 사회에서, 강간당한 여자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는 여전히 그 답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성폭력 피해 그 자체가 너무나 끔찍하여 극복하기 어렵거나 삶에 치명적인 상처를 낸다는 것이 아니라, 성폭력을 둘러싼 문화가 바뀌지 않는 한 나는 그 답을 찾기 어려울 지도 모른다.
 
성폭력은 한 시점에 발생한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폭력이 많은 후유증을 남기는 것은, 그 사회에서 성폭력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와 관련이 있다. 다른 범죄의 피해들과는 다르게 성폭력 사건은 사회에서 말해지기 어렵다. 피해자가 그 고통을 호소하는 것에 무심하게 침묵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성폭력은 끔찍한 사건으로 재구성된다.
 
성폭력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성폭력 피해자에게 폭력적인 문화 속에서 그 사건이 나에게 어떻게 구성이 되었고, 그 구성들이 어떻게 나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어떠한 경험이 나에게 성폭력으로 구성되는 맥락을 살피는 힘이 생길 때, 비로소 그 경험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그 힘이 생기면 다시 그 사건이 반복된다고 할지라도 새롭게 대응할 수 있고, 또한 그 사건이 가지고 온 고통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된다.
 
내가 생각하기에 회복은, 나를 둘러싼 문화 속에서 내가 그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깨닫고 그 사건들을 재구성해는 힘을 얻는 일인 것 같다. 그 사건들이 나의 언어로 말해질 수 있을 때 나는 비로소 피해자가 아닌 생존자가 될 수 있다. 생존자로 산다는 것은 나에게 일어났던, 질 수밖에 없었던 사건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내가 피해자가 아닌 생존자가 되기 위한 과정이었다. 이 과정이 무사히 자나가고 있음에 감사를 느낀다. 강간당한 여자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상담원 활동을 하면서 많은 내담자들이 나에게 했던 질문이기도 했다. 여전히 대답하기 어려운 말이지만, 나는 내 삶의 한 부분을 무사히 끝마쳤고, 비록 내일 별로 새로울 건 없는 일상을 살아가겠지만 분명히 어제와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언제나 회복의 길을 가려고 한다
 
어느 날 뉴스를 보았다. 일기예보에서 ‘내일은 너울성 파도에 의해 해안가에 피해가 있을 수 있다. ’라는 멘트가 나왔다. 너울성 파도가 무엇일까 궁금해서 인터넷을 검색했다. 너울성 파도는 사라져 가는 파도인데 그 피해가 크다고 설명되어 있었다. ‘사라져가는 파도’가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지만, 마지막을 태우며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 상태가 나의 지금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울이라는 이름은 그렇게 해서 사용하게 되었다.
 
너울이라는 이름으로 글을 쓰면서 나의 모든 일상이 성폭력과 맞닿아 있었다. 애써 안정되어 가던 일상이 흔들렸고, 성폭력이 재현되는 듯한 고통에 빠지기도 했고, 어느 때는 그 기억에 아무것도 못하고 나를 애도하는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시간이 함께했다. 나의 고통과 피해경험들을 말할 수 있는 행운이 있었고, 이 행운으로 말미암아 나는 조금 더 나를 이해하게 되었다. 생존자가 자신의 경험을 말하고 지지받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놀라운 축복인 것 같다. 나는 혼자 고통 속에 헤매는 어린 아이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었다.
 
그 때의 꿈이 다시 재현되기도 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처음 악몽이 찾아왔을 때보다는 덜 아프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꿈에서 강간당하는 나를 그냥 지나치는 사람도 있었고 나의 손을 잡고 그곳을 벗어나는 사람도 있었다. 조금이지만 내 삶의 변화도 꿈에서처럼 변화했다. 난 여전히 아프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고, 나에게 위로를 건네는 사람도 있고, 내 삶을 지지하는 사람들 또한 존재한다.
 
처음에 의도했던 대로 다른 생존자들에게 힘이 되는 글을 쓰고 싶었던 것과는 달리, 나에 대한 연민과 결국은 나 스스로에게 위로를 건네는 일이 되어버린 것 같지만 분명히 깨달은 사실은 하나 있다.
 
누군가가 나와 같은 생존자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면, 그리고 본인이 생존자라면, 치유의 길을 선택하고 자신의 삶을 창조성을 가지고 새롭게 만들어가는 순간에도 때때로 흔들리고 절망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랜 시간 치유를 선택하고 살아오면서 나는 내담자가 되기도 했고, 상담원이 되기도 했고, 지원자가 되어 다른 생존자의 사건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리고 결국 나의 삶을 이렇게 기록하면서도 여전히 가끔씩 흔들리고 가끔씩 우울감과 피해의 기억들에 괴로워지는 순간들이 있다.
 
주변의 사람들은 이제는 괜찮아질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기대를 갖는다. 그 기대를 온전히 채울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때때로 힘들어하는 순간이 존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보다 더 많이 빛나는 시간들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앞으로도 때때로 혹은 자주 흔들리는 순간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보다 더 많은 시간 나는 빛날 수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나에게 회복은 언제나 시작이다. 오늘보다 조금 더 평온한 내일을 기대하지만 나의 기대와는 달리 내가 내일 우울감에 빠져든다 해도, 치유를 선택하기 전에 몰랐던 빛나는 내일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알기에 나는 언제나 회복의 길을 가려고 한다.
 
폭력적인 성문화에 ‘꽃을 던지고 싶다’
 
꽃은 사전적 의미로는 종자식물의 번식기관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나 꽃은 운동권에서는 저항과 투쟁의 상징으로 화염병을 뜻하기도 하였고, 사회적으로는 때때로 여성을 뜻하기도 한다. ‘아름다운 꽃을 보면 누구나 그 향기에 취하고 싶고,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만져보고 싶은 것이 자연의 순리이자 세상의 섭리’라고, 성폭력 가해자를 옹호했던 어느 국회의원의 말처럼 세상은 여전히 여성을 수동적이며, 순종적인 존재로 여기고 있는 듯하다.
 
여성을 꽃으로 비유하면서 꽃을 취하는 행동을 자연에 섭리에 비교하는 이런 세상을 향해 꽃을 던지고 싶다. 꽃이라고 ‘은유되는 여성’을 던져버리고 싶다. 성폭력 피해를 양산하는, 그리고 성폭력 피해자를 향해 폭력적인 문화를 향해 꽃을 던지고 싶다.
 
나는 살아있음에, 나에게 삶이 주어졌다는 것에 감사한다. 인생은 연습이 없기에 내가 비록 서투르게 내 삶에서 더 많은 실수와 잘못된 선택을 했을 지라도, 산다는 것은 위대한 일임을 나는 믿는다.
 
가능하다면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이 나에게 주어졌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조금은 느리고 서투르다할지라도 조금씩 조금씩 나의 삶을 채워나가고 싶다. 생존자로서의 삶이 아니라, 나 자신의 삶을 채워나가고 싶고, 또한 생존자의 삶을 증언하는 일도 하면서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내가 꿈꾸는 삶에 또 어떠한 고난이 닥칠지라도 나는 ‘고통총량의 법칙’에 의해 모든 사람이 인생에서 주어지는 고통의 양은 같을 것이라고, 나에게만 주어진 시련이라고 받아들이며 살지 않을 수 있을 듯하다.
 
생명이 있는 모든 삶은 위대하다. 그 존재만으로도 하나의 우주이고, 하나의 세상이다. 이 세상에는 다양한 일들이 있고, 나의 세상도 그들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되었음에 감사한다.
 
P.S. 독자들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많은 분들이 내 글을 보면서 많이 아파해주기도 하고, 그 모진 세월을 어찌 견디어 내었는지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전해주기도 하였습니다. 모든 생명이 있는 삶이 그러하듯이 나는 내 삶이 특별히 힘들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때때로 힘듦과 어려움에 흔들리고 좌절하기는 했지만 그것보다 더 자주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에 행복해하기도 했습니다.
 
글을 처음 시작할 때 이렇게 끝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글을 쓰는 작업이 낯설기도 했고, 저의 경험을 드러내는 것이 피해를 드러내고 전시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망설이기도 했습니다. 힘이 들면 언제든지 도망가리라는 마음으로 시작했던 글쓰기 작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삶의 한 과정으로서 글쓰기 작업을 무사히 끝낼 수 있었던 것은 조이여울 기자님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글쓰기 과정에서 힘들 때마다 항상 조이여울 기자님은 지지자로, 조언자로 큰 힘이 되었습니다. 매번 글을 쓰는 제가 힘겨워하고 혼란스러워할 때마다 해주었던 조언과 지혜가 이 작업을 마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생존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할 수 있는 언어를 갖는 것은 자신의 피해를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고 해석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저는 너무나 커다란 행운을 만나서 저의 언어로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부족한 글을 이렇게 오랜 기간 저의 느린 속도에 맞추어서 공간을 할애해준 <여성주의 저널 일다>에 감사를 전합니다. 저와의 작업이 저의 글을 편집하시는 분이나 편집장에게 힘든 작업이었겠지만 <일다>는 저에게는 좋은 파트너였음을 기억합니다. 저의 기록이 자기연민에 빠져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의미가 부여될 수 있는 것은 <일다>라는 매체가 갖는 힘이었음을 잘 압니다.
 
그 과정에서 좀더 좋은, 좀더 성숙한 모습의 필자가 되지 못했던 점, 그리고 돌아보니 더 좋은 기록을 남기지 못했던 점에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그 동안 글의 성격상 독자들과의 거리를 두는 것이 읽는 분들이 조금이나마 덜 힘들 거라 생각해서 한 분 한 분 댓글에 감사를 전하지 못했습니다만, 그 마음들은 잊지 않고 있습니다. 저의 과정에 지지를 보내주신 독자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봄에 시작한 글쓰기 작업이 여름이 가고, 가을을 보내고, 겨울을 맞이했습니다. ‘눈이 괜찮다, 괜찮다’ 내린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그 시간들이 저에게 ‘괜찮다’는 위로가 되었듯이, 저의 글이 다른 생존자들에게, 혹은 다른 상처로 아파하는 분들에게 조금의 위로가 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너울)
 
  * 성주의 저널 <일다> 창간 10주년을 축하하는 독자들의 응원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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