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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성폭력 관련법 개정, 친고죄 폐지됐지만…   
 
지난해 11월 22일 형법과 성폭력관련 법률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습니다. 이번 개정안은  여성계가 오랫동안 주장해 온 친고죄 폐지와 강간죄 객체 변경 등 눈에 띄는 내용을 담고 있어 주목됩니다. 개정안에 담긴 내용은 무엇인지, 그 의미와 한계에 대해 살펴봅니다. 필자 백미순님은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입니다. ―편집자 주
 
얼마 전 인도 델리에서 남자친구와 영화를 보고 귀가하는 길에 버스를 탔다가 운전기사 등 승객 6명에게 성폭력을 당하고 길거리에 버려졌던 한 여성이 끝내 숨을 거두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여성이 숨을 거둔 지난해 12월 29일, 뉴델리 도심에서는 애도의 촛불 추모식이 벌어졌고, 인도 정부와 정치권은 성난 민심을 의식해 부산하게 대책을 마련하는 모습을 보였다. 성폭력에 취약한 여성이나 아동이 희생하고 여론에 떠밀려 정치권이 부랴부랴 대책을 마련하는 모습은 어느 나라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지난 한 해, 우리 사회에서도 아동과 여성이 잔혹하게 희생된 성폭력사건이 유난히 많이 보도되었다. 성폭력에 대한 두려움을 확산하고 이를 사회적 통제의 기회로 삼으려 한다는 의심을 지우기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계기로 성폭력 관련 법제 개선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높아진 것도 사실이다. 그 결과, 지난해 11월 22일 국회에서 형법과 성폭력관련 5개 법률의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피해자에 부담 지우던 ‘친고죄·반의사불벌죄 폐지’

▲ 11월 22일 형법과 성폭력관련 법률 개정안 국회 통과로 친고죄와 반의사불벌죄가 폐지되게 되었다.  © 일다-박희정 
 
제주도 올레길에서 발생한 여성 피해사건 이후 통영, 서울, 수원, 나주 등에서 성폭력 사건이 끊이지 않자 지난해 9월 10일, 19대 국회는 아동·여성 대상 성폭력을 근절하기 위한 종합적인 대책을 논의하기 위하여 총 18인의 여야 의원들로 아동·여성대상 성폭력 대책 특별위원회(이하 '특위')를 구성했다.
 
2개월간의 논의 끝에 특위는 11월 19일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이하 성폭력특례법),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이하 아청법) 등 5개 법안의 개정안을 심의, 의결했다.그리고 22일 형법과 이들 개정안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와 본회의를 통과하였다. 개정 법률들은 오는 6월 19일부터 시행된다.
 
이번 개정에서 가장 환영할만한 점은 친고죄와 반의사불벌죄가 완전히 폐지된 것이다.
 
친고죄 폐지는 성폭력특별법 제정 이후 지난 20여 년간 여성계의 숙원이었다. 친고죄는 성폭력피해자의 명예와 사생활을 보호하겠다는 이유로, 성폭력 피해 당사자의 고소가 있어야만 공소를 제기하도록 한 제도이다. 이 때문에 수사기관이 성폭력 범죄를 인지해도 피해자가 고소하지 않으면 가해자를 기소할 수가 없었다. 고소 이후에도 1심 판결 전까지 피해자가 고소를 취소하면 가해자가 처벌을 면할 수 있었다.
 
친고죄에 해당하는 범죄는 추행․간음 목적의 약취․유인․수수․은닉죄와, 성인을 대상으로 한 강간․강제추행, 준강간, 준강제추행과 그 미수범, 그리고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 공중밀집장소에서의 추행, 통신매체를 이용한 음란행위 등이다.
 
이미 친고죄 적용이 거의 폐지됐던 아동․청소년 대상 성폭력 범죄 중에서는 공중밀집장소에서의 추행과, 통신매체를 이용한 음란 행위를 반의사불벌죄로 규율했었다. '반의사불벌죄'는 피해자의 고소 없이도 소를 제기할 수는 있지만, 피해자가 처벌을 희망하지 않는다는 의사 표시가 있으면 이에 반해 처벌할 수 없는 제도이다.
 
친고죄 조항은 여러 가지 2차 피해를 발생시켰다. 고소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성폭력 피해자는 엄청난 중압감에 시달려야 했다. 친고죄의 경우는 범인을 알게 된 날로부터 6개월이 경과하면 고소하지 못하도록 고소 기간이 제한되어 있으며, 가해자 측이 끈질기게 합의를 요구하는 일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고소 취하를 염두에 두고 수사재판기관 측에서 소극적 수사로 일관하는 모습도 보였다.
 
이로 인해 성폭력 피해자들은 사건 해결 과정에서 더 큰 상처를 입거나 고소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았다. 반의사불벌죄도 양상이 유사하다. 국가가 져야할 가해자 처벌의 책임과 부담을 피해자 개인이 떠맡는 이와 같은 상황은 이번 개정법이 시행되는 오는 6월 종결될 것이다.
 
‘강간’ 개념 수정, 범죄의 객체 ‘부녀’→‘사람’으로
 
다음으로 주목할 만한 개정 내용은 유사성교행위를 처벌하는 조항이 신설된 것과 성폭력 범죄의 객체를 '부녀'에서 '사람'으로 변경한 점이다.
 
강간의 기준을 신체에 삽입했는가의 여부에 두고 있는 선진 입법례와는 달리, 한국은 구강이나 항문 등에 가해자가 성기를 넣는다든지, 성인인 피해자의 성기와 항문에 신체의 일부 또는 도구를 집어넣는 유사성교행위를 강간죄가 아닌 강제추행죄로 처벌해왔다. 또한 성폭력 범죄의 객체를 부녀로 한정하여 남성이나 성전환자 등은 피해를 인정받기 어려웠다. 

강간죄의 구성 요건과 객체를 '성기 삽입'과 '부녀'로 한정해온 형법의 규범적 표상은, 여성에 대한 성기간음을 특별히 취급하여 남성 성기를 여성 성기에 삽입하는 행위를 성관계의 핵심으로 취급하는 남성성기 중심의 성문화를 반영한 것이다.
 
형법은 강간죄를 '여성에 대한 간음행위'라는 성차별적이고 성기중심적인 행위에 한정함으로써, 성폭력이 성적자기결정권의 침해가 아닌 여성의 정조 보호라는 이데올로기를 존속시키는데 기여해왔다.
 
때문에 이번 법 개정의 강간 개념 수정은 법적 성폭력 개념을 성적 자기결정권 보호에 충실하도록 변경한 것으로서 한국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될 인식론적 변화이다.
 
피해자 보호제도도 대폭 강화되었다. 의사소통과 의사표현이 어려운 13세 미만 아동이나 장애인의 진술을 돕는 진술조력인제도와, 증인으로 법원에 출석하는 피해자와 신고자를 보호하고․지원하는 증인지원관제도가 신설되었다.
 
또한 기존에 아동․청소년에게만 지원되었던 법률조력인이 전체 성폭력 피해자에게 확대되어, 피해자가 형사절차상에서 입을 수 있는 피해를 방어하고 법률적 조력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성폭력 범죄의 피해자와 신고자의 증인 신문이나 조사 시 조서나 서류 등에 인적사항을 기재하지 않을 수 있는 것도 명문화되었다. 이러한 제도는 친고죄 폐지 이후 피해자 보호 공백을 최소화하고, 성폭력 범죄의 신고를 확대하고 가해자를 처벌할 가능성을 높여줄 것이다.
 
처벌 강화, 화학적 거세 확대는 우려된다
 
한편, 성범죄의 형량과 처벌도 전반적으로 강화되었다. 강간죄와 유사강간죄의 법정형이 상향되었고, 전자발찌의 착용 대상이 강도죄까지 확대되었다. 성범죄자 신상정보 공개대상이 제도시행 3년 전까지 소급되었으며, 성폭력 피해자의 연령과 무관하게 화학적 거세 적용대상이 확대되었다.
 
이러한 엄벌주의적 처벌 강화의 흐름에 대하여 여성운동계는 범죄예방의 실효성과 비용의 효율성, 인권침해 가능성 등의 측면에서 경계해왔다. 일부 극악한 가해자의 형량이나 처벌을 강화하는 것보다는 성폭력 범죄자 전반의 기소율을 높이고 실형선고율을 높이는 것이 필요하다. 특정 가해자에게 적용되는 처벌정책에 소요될 막대한 예산으로, 우리 사회의 인권교육과 젠더감수성 교육을 강화하고 성폭력피해생존자 보호와 지원에 힘쓰는 것이 성폭력의 근절에 필요한 정책이다.
 
특히 성폭력과 무관한 강도 범죄에 대해, 재범의 위험성이 있을 때 전자발찌를 부착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성폭력을 사회통제 강화의 계기로 활용하고자 하는 정부의 위험한 발상이다. 성폭력가해자와 같은 특정한 범죄자들은 인권보호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판단은, 결국 사회의 불관용과 인권보호 제외대상의 확대로 이어질 것이다.
 
범죄자가 탄생하는 과정은 사회구조적인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봤을 때, 정부가 문제적 대상을 확장하고자 하는 때에 사회적 소수자나 취약한 계층이 그 대상으로 쉽게 포섭될 가능성이 크다.

또한 성폭력을 우리 사회 전체 인권문제가 아닌 몇몇 개인의 문제로 특수화시킬수록 여성이나 아동, 성소수자 등에 대한 폭력이 발생하는 문화는 성찰될 수 없고 성폭력의 근본적 해결은 멀어질 수밖에 없다.
 
‘저항’ 요구하는 강간죄 구성요건 등 여전한 숙제로
 
이번 개정은 많은 성과와 과제를 남겼다. 친고죄 폐지와 유사강간죄 도입, 강간죄 객체의 확대 등은 이제 형법이 담고 있는 ‘성적 자기결정권’ 보호의 한계에 대한 근본적 도전으로 이어져야 한다.
 
무엇보다 저항할 수 없을 정도의 폭행과 협박이 있을 경우에만 강간으로 인정하는 '최협의의 강간 구성요건'은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또한 아내 강간 문제, 스토킹 방지 및 처벌법 제정 등 미해결 과제에 시민사회와 정치권의 역량을 집중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친고죄 폐지 이후 피해자 보호를 위한 각종 제도가 실질적으로 작동하는지 감시와 모니터링도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법․제도와 실행 간의 간극은 민-관의 거버넌스를 통해서만 최소화될 수 있다. 이번 개정은 논란이 지속되었던 제도들까지 충분한 사회적 숙의 없이 한꺼번에 처리되었기 때문에, 반성폭력 운동진영은 성폭력 관련 법제가 지향해야 할 사회적 가치와 방법이 적정한지,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했는지 성찰하는 장을 만들어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지난 20여 년간 계속되었던 반성폭력 운동은 성폭력 범죄에 대한 법제화와 성문화 변화, 피해자 지원의 모든 측면에서 이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성폭력적 사회구조에 균열을 내야 하는 보다 좁은 길목으로 접어들었다. (백미순/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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