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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의 태양 꼬뮤니즘을 찾아서
<기후변화, 어떻게 대응할까>⑩ 정치가 중요하다
[기후변화로 인해 인류는 큰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일다>는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와 공동 기획으로 “기후변화, 어떻게 대응할까” 기사를 연재한다. 필자 이정필님은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상임연구원이다. –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뻔뻔한 시대, 한 줌의 정치>의 저자 이진경씨는 정치가 재난이 된 시대를 살고 있다고 우리 사회를 규정한다. 정치의 재난? 재난의 정치? 무엇이 맞는가는 중요하다. 사회적 사건이든 자연적 사건이든, 그 자체가 재난으로 바뀌는 건 지배와 배제의 정치 때문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어디 한국 정치만 그러겠는가. ‘글로벌 위험사회’의 실례이자, 이제는 탈영토화된 문제로 인식되는 기후변화는 국제적으로 정치가 재난이 된 시대임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기후변화 대응의 게임장인 유엔기후변화총회의 무기력함을 보고 있노라면, 기후총회라는 것이 온실가스를 대량 배출하는 산업국가와 패권국가들의 알리바이-환경에 좋은 뭔가를 하고 있다는-에 불과한 것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든다.
허리케인 피해가 거의 없는 나라 쿠바, 왜?
기후변화의 경향적 현상 중 하나가 바로 태풍의 강도와 빈도이다. 얼마 전 남한을 휩쓴 볼라벤과 덴빈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7년 전 미국이 경험한 카트리나의 악몽을 떠올리게 하는 아이작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허리케인으로 사상자가 거의 나오지 않는 나라인 쿠바는 어떻게 봐야할까? 유엔이 선정한 방재의 모델 국가인, 사회주의 체제의 쿠바 말이다. 이제, 다시 문제는 정치로 향한다.
요샌 기후변화와 생태적 문제에 관한 책들이 다양하게 쏟아지고 있다. 몇 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내용의 수준이 높다. 시민들이 기후변화를 크게 걱정하고 있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올해 식약청이 수행한 ‘기후변화와 식품안전에 대한 소비자 인식도 설문조사’ 결과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기후변화 체감 정도를 묻는 질문에, 전체 응답자의 무려 98.9%가 체감하고 있다고 답했다. 기후변화 영향이 심각하다고 인지한다는 응답자 역시 전체 91.3%로 나타났다.
그런데 한국과 달리, 일부 나라는 기후변화의 이해와 해결에 대한 입장이 ‘정당 귀속감’에 따라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미국(민주당과 공화당)과 호주(노동당과 보수당)에서는 상대적으로 개혁적인 정치적 성향을 보이는 사람들이 기후변화의 심각성에 대한 이해가 높고 해결 의지도 강한 편이다.
기후변화와 생태적 이슈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차별화된 전환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시중에 유통되는 출판물 중에는 이렇게 민감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것도 있는데, 반자본주의나 생태사회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그렇다. 이런 입장은 공통적으로 ‘기후변화가 아니라 체제변화’라는 구호를 선호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체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제각각이다.
▲ 나무로 형상화된 마르크스 (테드 벤튼 편 <The Greening of Marxim>) 표지와, ‘그린 머니’ 열매를 맺은 나무 일러스트레이션(칼레닉 한나, shutterstock.com)이 대조를 이룬다.
크리스천 퍼렌티는 <왜 열대는 죽음의 땅이 되었나>에서 빈곤, 폭력 그리고 기후변화가 한 곳에 만나 ‘파멸적 수렴’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종합적인 평가를 내린다. 그러면서 기후 위기는 기술 문제도, 재정 문제도 아닌 본질적으로 정치 문제라고 제기한다. 이 위기를 극복할 기술과 재정은 이미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퍼렌티가 보기엔 사회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심층 생태론, 지역주의 등의 정치적 혁명을 기다릴 여유가 없다. 자본주의가 자연과 양립할 수 없다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지라도, 자본주의에서도 국가의 역할과 개입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선회하는 정치를 통해서 시간 싸움인 기후변화에 대응할 수 있다고 말한다.
녹색성장? 자연 자본주의? 녹색의 함정
퍼렌티의 제안이 ‘자연 자본주의’보다는 나은 것 같지만, 진단에 비해 해법이 초라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로빈스 부부와 폴 호큰은 <자연자본주의>에서 “지구의 기후를 보호해야 하는 이유는 비용이 아닌 이윤 때문이다”고 명쾌하게 정리한다. 생태계 보호가 이윤 저하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반대로 생태계에 이로우면 기업의 이윤이 증가하고 경제성장에도 긍정적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는 ‘생태적 근대화’의 새 버전에 불과하다. 자본의 녹색화와 소비의 녹색화로 생산 효율이 높아져 자원 사용량이 줄어들긴 하겠지만, 기업이 경쟁력을 갖추고 계속 성장하려면 생산 규모는 커질 수밖에 없고 자원 사용량은 다시 증가하게 된다. 리바운드 효과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비록 점진적인 변화가 가능할지라도 “성장에 바탕을 둔 기존의 경제체제가 생태계를 훼손하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헤더 로저스, <에코의 함정>) 따라서 기존의 정치 구조와 경제 구조를 재성찰해야 한다.
로저스의 견해는 조너선 닐의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이어진다.
“신자유주의와 탄소 기업들이 핵심적 구실을 하지 않는 자본주의 체제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들이 너무나 강력하고 굳건해서 체제 전체를 바꾸지 않고는 도저히 주어진 시간 안에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자본주의에는 기후변화 해결책들과 양립하기 어려운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즉, 국제 경쟁과 끊임없는 성장의 압력이다.”(<기후변화와 자본주의>)
그럼에도 닐은 “대기를 살리는 일은 체제 내에서든 체제를 바꿔서든 모두 가능하다”고 판단한다. 대기를 어느 수준에서 살릴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를 제외하면 이런 평가에 동의한다. 그러나 “체제가 무엇이든 정부 규제와 기후 일자리만이 기후변화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주장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비록 대중적 기후 운동을 건설하기 위한 “출발점”으로 ‘체제’ 대신 ‘탄소’를 택했을지라도,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 하는 접근이 유용할지 모르겠다.
자본주의는 탄소경제와 함께 성장해 왔다. “화석 에너지 체제 외의 그 어떤 것도 자본주의가 지난 200년 동안의 최고의 성과를 올리도록 만들어 줄 수 없었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종말>를 쓴 엘마 알트파터의 이 분석은 맞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화석 에너지와 자본주의의 결합은 필연적이면서 동시에 우연적이었다. 비록 더디지만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재생가능에너지가 확대되고 있지 않은가. 또한 이명박 정부가 내세운 녹색성장 혹은 녹색 자본주의를 ‘녹색분칠’이라고 한정해버리거나, 실체 없는 담론으로 평가절하할 수만도 없다. 이게 바로 총자본의 운동인 것이다. ‘닥치고 재생가능에너지’, 이것은 체제를 버린 녹색의 함정일지 모른다.
석유 사회주의? 녹색을 버린 적색의 함정
▲ 우고 차베스의 석유 사회주의를 풍자한 그림. © 출처: Anarkismo.net
그런데 우리가 또 하나 경계할 것은 녹색을 버린 적색의 함정이다. 석유를 이용하여 ‘세계적인 에너지 강국’으로 도약해보겠다는, 베네수엘라의 ‘석유 사회주의’가 대표적이다. 차베스 정권은 산유국의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이, 에너지 자원을 활용해 중남미와 카리브해 지역 통합과 미제국주의에 맞서는 힘의 축을 형성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국유화를 통한 ‘석유 수익의 새로운 활용 방법’은 국가가 석유로 벌어들인 돈을 식품, 건강, 교육, 주택, 고용, 주체성 같은 시민들의 기본 욕구를 충족해주는 ‘미션’처럼 대규모 사회정책에 투자하는 기초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베네수엘라 석유 사회주의는 앞선 석유 자본주의 모델의 근본적인 속성을 그대로 드러냈다. 국제 시장의 유가 등락에 따른 베네수엘라 경제의 취약성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중략) 예나 지금이나 풍부한 오일달러로 추진되는 수많은 프로그램과 프로젝트가 도중에 중단되든지, 아니면 취지가 다르거나 심지어 서로 모순되는 프로그램과 맞물려 부조화 속에 시행된다.”(마르가리타 로페스 마야, 루이스 E. 란데르 <좌파의 정부참여, 독인가 약인가>)
이런 전망이 틀리지 않다면, 자원의 저주는 체제의 성격과 상관없이 찾아오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아닌가.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우리의 정치 전략은
양대 선거가 있는 2012년을 맞이하며 창착과비평 그룹과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등에서 한국 사회의 미래 비전 및 청사진을 제출한 바 있다. 그런데 이런 비전은 녹색 사회로의 전환이나 에너지 전환의 필요성을 인정하지만, 대체로 이에 대해 소극적으로 접근하는 경향을 보인다.
대부분의 환경운동 진영은 주로 눈앞에 닥친 현안들을 해결하기에 바빠 보인다. 진정한 녹색사회로의 전환을 적절한 언어로 사회와 나누는 시도는 찾기 어렵다. 탄소만 보거나, 체제만 보거나, 이도 아니면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 역시 비슷하다. 경성 에너지(hard energy)는 중앙집중형 방식의 대규모 핵발전과 석탄화력발전인지라 비민주적이고 반환경적일 수밖에 없지만, 반면 연성 에너지(soft energy)는 지역분산형 재생가능에너지인지라 민주적이고 친환경적이라는 주장을 하곤 했다. 마음 한 켠에 ‘정말 그런가’ 하는 의심을 품은 채. <자본주의의 종말>에서처럼, 연대적 경제와 태양에너지 사회가 친화적 관계에 있다는 주장을 쉽게 믿었던 탓일 게다.
그러나 막무가내로 추진되는 재생에너지 사업들을 보고 있자면, 그리고 태양도 어떻게든 청구서를 보낸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면서, 무지개 너머 어딘가에 있을 ‘태양 꼬뮤니즘’보다는 지금 여기에서 시작하기에 적합한 전환적 계기를 마련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공동체적 참여경제의 한 축을 담당할 수 있는 ‘에너지 협동조합’의 시도라든지, 성장위주 산업과 복지체계를 뛰어넘기 위해 모든 사회구성원의 생활을 보장해주자는 생태주의적 기본소득(basic income) 담론 등에서, 탄소냐 체제냐의 양자택일 상황에 도전하는 출발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이정필 /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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