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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생존자가 다른 생존자에게
<꽃을 던지고 싶다> 15.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 

 
성폭력 피해생존자의 기록, “꽃을 던지고 싶다”가 연재되고 있습니다. -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수연님, 당신에게 닿지 않을 지도 모르는 이 편지를 쓰기로 한 것은 이렇게라도 감사의 마음을 전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아니요, 전하고 싶었습니다. 저의 치유를 위해, 온전히 나 자신을 위해서 말이지요.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책이 나온다는 기사를 접하고, 반가운 마음 고마운 마음과 함께 마음이 소란스러워졌습니다. 제가 수연님의 글을 처음 읽은 것은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식지에 실린 생존자 수기에서였지요. 읽으면서 어찌 이런 삶이 있을까 싶었습니다. 읽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사건들이었어요. 그러나 그 고통 속에서도 자신을 지켜나가는 수연님의 글들은 매력이 있었고, 다음 편을 빨리 읽고 싶어 소식지가 나오길 기다리게 되고, 소식지를 받아보자마자 수연님의 글부터 찾아 읽었지요.
 
어디에서도 읽은 적이 없는 그 글들이 저에게 말을 걸어오는 듯 했습니다. ‘너도 할 수 있어’ 라고. 오랜 기간 동안 연재되었던 그 글들은, 치유를 결심하고 시작하는 저에게 참으로 힘이 되었답니다. 때로는 힘들 때마다 그 글들을 꺼내 읽으며 힘든 시간들을 견뎌냈어요. 특히 울고 싶을 때 많이 울게 해준 글들이었지요.
 
어느 날 우연히 어떤 자리에서 그 글들이 책으로 엮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4년 전 이었어요. 그 뒤로 정말 거짓말 하나 보태지 않고 매일매일 고대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 같은 생존자에게 꼭 필요한 글이기에, 누구보다도 제가 위로를 받았듯이 다른 생존자들에게 힘이 될 거라 믿었어요.
 
외국의 성폭력 생존자 수기들이 한국에도 번역이 되어 나와 있지만 아동성폭력 생존자의 글은 찾아보기 힘들고, 게다가 한국 사회에서 그런 책이 나온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니까요. 한국 사회는 아직도 생존자에게, 여성들에게 책임을 묻는 경우가 심심치 않기에 당신의 글이 꼭 필요했어요.
 
그 당시 많이 불안정했던 저는 당신이 참으로 대단해 보였어요. 그 끔찍한 기억들을 풀어내는 힘이 있는 당신이 참으로 멋지게 느껴졌죠. 그 날 저는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에 “꽃을 던지고 싶다” 라는 폴더를 만들었지요.
 
그 기다림이 4년이 되어가고 힘들게 치유의 과정을 걸어가면서, 수연님의 책이 안 나올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에, 제가 직접 글을 쓰기로 했어요. 사건에 대한 기록들만 빼고 적어두던 그 폴더의 글들이 사건에 대한 기억으로 바뀌는데 4년이 필요했죠. 그렇게 당신의 글이 저의 기록을 이끌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 은수연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 - 어느 성폭력 생존자의 빛나는 치유 일기  ( 이매진, 2012) 
 
수연님의 책이 나온다는 기사를 보자마자 책을 주문하고, 드디어 받았습니다.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 제목이 마음에 쏙 듭니다. 그 오랜 시간 흘렸을 당신의 눈물이 어떤 빛을 만나 어떤 반짝임을 내고 있을지, 책을 빨리 펼쳐 읽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두려움이 컸습니다. 읽어본 적이 있는 글들이지만 그 글들이 저를 얼마나 힘들게 할 지, 수연님의 고통에 감히 다가갈 수는 없겠지만 제가 고통 없이 읽을 자신이 없었습니다.
 
책을 들고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제일 멀리 가는 차편을 사고, 책을 다 읽으면 어디든 내려서 제일 가까운 절에 찾아 들어 108배를 하리라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다스리지 않으면 견뎌내기 어려울 듯했습니다.
 
‘끝이 없는 고통은 없다’는 수연님의 말이 목에 걸려 첫 페이지부터 어지러움이 찾아옵니다. 강간의 고통, 성폭력 사건은 끝이 났지만 지금 저의 마음의 고통은 끝이 있을까요? 어렵고 어려운 말입니다. 그 말을 하기까지 당신이 겪었을 고통들을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상상이나 가능한 것일까요?
 
어떤 마음으로 글을 써 내려갔을까요? 저는 어떤 마음으로 글을 쓰는 것일까요? 문득문득 그리 자랑스러운 과거는 아닌데 글을 쓰는 내 자신이 수치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수연님의 말처럼 수치는 가해자의 몫이고,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기록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에 깊은 공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요, 우리가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겠지요.
 
제가 받았던 은혜를 갚고 싶었습니다. 힘들지만 치유를 결심하고 실행할 수 있었던 것은, 저와 비슷한 피해를 경험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간 수연님을 비롯한 많은 생존자들의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만 겪는 고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나도 괜찮아질 수 있을 거라는 힘을 얻었습니다.
 
내가 받은 그 은혜를 다른 생존자에게 갚고 싶었습니다. 혼자가 아님을, 그리고 그것이 당신의 잘못이 아님을, 당신이 힘든 것이 당연하고, 힘들어하고 고통을 호소할 권리가 있음을, 또한 성폭력을 묵인하는 사회에게 얼마나 내가 서러운지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글을 쓰면서 그 말들은 다른 생존자가 아니라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들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내게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았기에, 스스로의 치유를 위해서 꼭 해야 하는 말들이었습니다.
 
4년 전 당신의 글을 처음 읽은 후, 나는 더 이상 약을 털어 넣지 않게 되었습니다. 미안하게도 ‘당신도 살아 있는데 나도 살아내야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만큼 당신의 고통이 컸고, 그 안에서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나가는 것이 멋지게 보였습니다. 치유의 길을 걷는 당신이 나에게도 힘내라고 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4년이 지나고 당신의 기록이 책으로 만들어졌고, 저는 이렇게 글을 씁니다. 다른 사람들 세상의 속도에서는 더딜 수도 있지만 우리는 참으로 열심히 살아온 것이지요.
 
내가 여전히 아픈 것처럼 수연님도 아프신지요?
4년 동안 치유의 길을 가면서 하나를 극복한 것 같으면 또 다른 결핍들이 보여 내 자신이 싫어지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저는 요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부끄럽게도 멋진 여성들을 보면 화가 나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그것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말을 꺼내지도 못합니다.
 
‘네가 나처럼 살았어 봐! 네가 내 환경이었어 봐! 나는 일곱 번의 강간을 당하고, 집에서는 엄마를 지키고자 늘 힘들었고, 고등학교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하루에 4시간 이상 자보지 못했어. 나의 가장 큰 소원이 무엇인 줄 알아? 하루라도 편하게 공부해보는 거였어. 그래,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서 일류대를 나왔겠지? 네가 내 환경이었으면 가능했겠어?’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참으로 치졸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수연님의 비슷한 글을 보니 오늘 또 위로가 됩니다. 과거의 사건들이 어떻게든 우리의 삶을 방해해온 것이지요. 속으로 원망하는 것도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요? 못난 것도, 화나는 것도 저의 감정인 것이지요?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고 위로를 하는 시간들이 필요하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기차 창 밖으로 비가 오락가락합니다. 눈물이 흐릅니다. 집에서 혼자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 기차를 탄 것이 참으로 다행이다 싶습니다.
 
안내 방송에 곧 대전역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내려서 갑사로 가기로 마음을 정합니다.
 
수연님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9년간 그 지옥에서 살았고, 그 가해자가 아빠라는 사람이었고, 저는 2학년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일곱 번의 강간을 경험하고 살았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수연님과 저는 서로 다른 사건을 경험했지만, 우리는 필요한 순간 도움을 받지 못했고, 그 지옥에서 벗어나서도 한참의 시간을 때때로 고통 속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수연님도 때때로 여전히 아프고 억울한 자신을 발견하는 시간이 있겠지요? 여전히 때때로 살고 싶지 않은 시간들이 있겠지요? 특히 과거의 사건이 나를 지배한다는 느낌이 들 때면 괴로움에 혼자서 울고 있는 시간이 있는지요? 그런 시간에서도 수연님의 눈물은 반짝임을 향해 가겠지요.
 
어제 오늘 누군가는 성폭력 가해자에게 살해당하고 누군가는 성폭력 피해를 경험하고 자살을 했다는 안타까운 뉴스들이 나옵니다. 또 아까운 삶이 사라졌습니다. 그 사람들은 인사도 없이 그렇게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살아남았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때때로 많이 힘이 들고 흔들려도 우리는 자신의 삶을 회복하기 위해 서서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겠지요. 당신의 글이 다시 저에게 함께 하자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이제 지쳐서 그만하고 싶은 저에게, 더 이상 좋아지지 않을 것 같아 절망하는 저에게 말입니다.
 
뮤리엘 루카이저는 ‘만약 한 여성이 자신의 삶에 대해 진실을 털어놓는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세상은 터져버릴 것이다.’ 라고 말했다지요. 수연님의 말이 저를 울렸듯이 세상을 울릴 것이라 믿습니다. 힘든 글을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1배는 수연님의 평온을 위해, 2배는 저의 치유를 위해, 3배는 또 다른 생존자들의 평온을 위해, 그리고 4배는 수연님의 글을 읽고 혼자 눈물을 흘릴 여성들을 위해. 그렇게 반복해서 108배를 마치고 내려오는 길, 어느덧 비는 개었습니다.
 
만약에 다음 생이 저에게 주어진다면 그 때는 강간당하지 않기를, 만약에 강간을 당하더라도 적절한 도움을 받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래봅니다.
 
비 갠 하늘처럼 우리가 평안하길 빌어봅니다.
 
2012년 8월 21일
너울 드림.

여성저널리스트들의 대안언론 <일다> 바로가기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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