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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독립이란 갈래 길에 서서
<선 밖으로 나가도 괜찮아> 오진성의 ‘내 삶’ 찾기②
‘여성주의 저널 일다’는 사회가 강요하는 10대, 20대의 획일화된 인생의 궤도를 벗어나, 다른 방식의 삶을 개척해가는 청년들의 시간과 고민을 들어봅니다. 특별기획 “선 밖으로 나가도 괜찮아” 연재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 <일다> www.ildaro.com
대학에 가야 할까?
▲ 20대를 어떻게 맞이해야 할 지 몰라 고민했던 시간이, 학교 밖 10대로 보낸 시기 중에서 가장 힘든 때였다.
고등학교 자퇴 후 가장 힘들었던 시기가 있다면 19살 때다. 10대의 마지막을 보내며 다가오는 20대를 어떻게 맞아야 할지, 어떻게 독립할지에 대한 고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엄마에게 “스무 살이 되면 독립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어렸을 때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왠지 모르게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면역이 생기는지 시간이 지나면서 그 말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되긴 했다. 워낙 엄마는 내가 어렸을 때도 ‘애 취급’하지 않으셨고 거의 모든 집안 사정에 대해서도 거리낌 없이 얘기하시곤 했기 때문이다.(장난기 많았던 동생은 초등학생 때부터 집안 경제사정을 걱정하며 마이너스 통장에 얼마나 남았는지를 체크하곤 했다.)
하지만 나를 강하게 키우려고 하셨던 엄마의 계획(?)이 엄마가 생각했던 것만큼 좋은 방향으로 흘러갔다고 할 수는 없다. ‘스무 살에는 독립해야 한다’는 게 점점 강박이 되어갔으니 말이다. 고등학교를 자퇴한 뒤 주된 고민은 독립이었고, 19살이 되자 점점 더 불안해졌다.
내 또래 친구들에게 20살이 된다는 건 곧 대학생이 된다는 것이었다.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대학’이라는 큰 틀은 모두 정해져 있었다. 그와 더불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적어도 4년은 독립도 미뤄졌다. 주위 사람들은 고3의 나이라는 이유만으로 나 역시 당연히 대학갈 준비를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자퇴가 곧 대학에 가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니 말이다.
고등학교 밖으로 나온 건 수능 공부를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대학이라는 획일화된 목표점을 향해 달리는 게 아니라, ‘나를 알아가기’ 위해 남은 십대를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친구들이 수능 공부를 하며 막판 스퍼트를 올리고 있을 때 나는 여전히 ‘홈슬리핑’ 중이었다. 3년간 이것저것 관심 가는 것들을 많이 배우긴 했지만 ‘이거다!’ 싶은 건 찾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렇게도 대학에 가지 않으면 사회생활이 힘들다고 얘기하는데, 대학 대신에 특출한 무언가를 하는 것도 아니라면, 역시나 대학에 가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독립의 길은 멀고도 험해 보이는데, 남들처럼 대학에 진학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부모님께 그 비싼 돈을 신세지고 가야 하는데 대학에서 그 만큼의 무언가를 얻어낼 수 있는지 미지수였다. 대학이 더 이상 ‘큰 학문(大學)'을 하는 곳이 아니라는 얘기야 오래 전부터 들어왔지만, 나는 하고 싶은 공부가 있나? 아니었다. 남들이 다 가니까, 안 가면 안 된다고 하니까 고민하는 것이었다. 결국 나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독립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남들 따라 대학에 가지는 않기로 했다.
뉴질랜드로 떠나다
▲ 낯선 곳에서 홀로 서기를 하며 나 자신에 대해 더 알아가고, 더 강해지고 싶어서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뉴질랜드로 떠났다.
대신에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뉴질랜드에 가기로 했다. 해외여행, 외국생활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었던 내게 워킹홀리데이는 홀로 서기에 아주 좋은 기회였다. 일정한 나이와 건강한 몸만 있으면 여행하면서 일도 할 수 있는 비자를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낯선 땅에서 홀로 서기를 해가면서 나 자신에 대해서도 더 알아가고, 더 강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다. 만18세가 지나기만을 기다렸다가 뉴질랜드대사관에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신청했다.
9월에 떠나는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그 전까지는 계속 돈을 모았다. 집이 시골이라 시내까지 40분 버스를 타고 가서 베이커리에서 알바를 했다. 프랜차이즈 베이커리였던데다가 나는 말단 알바생이었기에 갈고 닦은 제빵 솜씨(?)를 발휘할 순 없었지만 빵에 관심이 많다 보니 일도 재미있었다.(한동안 내 몸에서 빵 냄새가 난다고 사람들이 좋아했었다.)
아침 일찍부터 점심 때까지 꼬박 일을 하고 나면 오후에는 엄마가 운영하시던 영어 공부방 일을 도왔다. 주로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 수업에 보조교사로 들어가 영어 동화책을 함께 읽고 문제 푸는 걸 도와주었고,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중학생들의 시험지 채점하는 일을 했다. 엄마 나름대로는 나의 독립자금을 지원해주시기 위해 방법을 마련하셨던 것이다.
게다가 내가 외국으로 간다고 하니 친척들, 동네 이웃분들, 심지어는 그냥 우리 집에 놀러 오셨던 부모님의 친구분들까지 지원금을 주셨다. 어느새 금액이 천 만원이 넘어 초기 정착금으로 충분했다. 그 때 나는 내가 참 복이 많은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고, 그 복으로 더 잘 살기 위해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호주에 외삼촌이 계셨기에 다들 호주로 가는 게 어떠냐고 하셨었다. 나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보다는 그 편이 낫지 않겠나 싶었다. 하지만 괜히 고집을 부렸다. 정말 홀로서기를 해보리라고 말이다. 그렇게 20살의 가을에, 드디어 뉴질랜드로 떠났다.
처음엔 현지 감각이나 영어를 익힐 겸해서 홈스테이를 하면서 어학원에 3개월 다녔다. ‘홈슬리핑’ 시절 하루 종일 영화와 드라마를 보며 생활영어를 익혔던 덕분에 말을 금방 배울 수 있었다. 뉴질랜드 특유의 발음이 있긴 하지만 뉴질랜드 가족과 생활하면서 적응해갔다.
그 집에는 아이가 셋이나 있었는데 오빠만 둘이었던 막내딸이 나를 잘 따랐다. 한국에서 동생을 봐주던 실력(?)으로 어학원에서 돌아와서는 주로 5살짜리 소녀와 놀아주었다. 아이들 말은 더 알아듣기 힘들었기 때문에 귀 기울여 듣고 대화하면서 영어가 더 는 거 같다.
홈스테이맘이 필리핀 사람이었던 덕분에 빵보다 밥을 더 자주 먹을 수도 있었다. 요리를 좋아하셔서 맛있는 식사나 빵, 과자 같은 것을 늘 만들어주셨기에 살이 찌기도 했다. 버스비가 비싸서 어학원까지 왕복 1시간 20분을 걸어 다녔는데도 저녁으로 먹는 게 더 많아 체중이 전혀 줄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타지에서 살아남기
▲ 친구들은 타지에서 적응해가는 데 큰 힘이 되어준 존재들이다.
어학원에서 졸업함과 동시에 홈스테이 생활을 마치고 나서는 정말 홀로 서기가 시작됐다. 자금이 슬슬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집도 구해야 하고 일자리도 구해야 했다.
뉴질랜드에는 플랫팅(flatting)이라 해서, 집주인이 세낸 방 하나씩을 빌려서 사는 사람들이 많다. 부엌, 거실, 화장실은 공용으로 쓴다. 한국에서도 부모님 집 밖에서 살아본 적이 없기에 방을 구하는 것이, 게다가 낯선 사람들과 살아갈 집을 구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집을 잘 볼 줄 알았던 것도 아니지만, 돈이 적게 들면서도 함께 사는 사람들이 괜찮은 곳을 찾기 위해 몇 주간 발품을 팔아야 했다.
일자리 찾기도 어려웠다. 인터넷에 구인 광고가 뜨는 족족, 어학원 담임선생님의 도움으로 만든 이력서를 보내고 카페, 레스토랑, 베이커리 등 무작정 들어가 이력서를 돌렸다. 하지만 하필 현지 학생들이 방학이었던 시기라 일자리가 별로 없었다. 게다가 경력도 없고 외국에서 온 나를 써줄 리 만무했다. 관심도 없는 사람들에게 이력서를 건네며 점점 초조해졌다.
그러기를 약 한 달, 운 좋게 한국인 사장님이 하는 일식집에 취직했다. 막 맘씨 좋은 대만 아주머니 집에 꽤 싼 값으로 방을 빌려 들어간 참이었다. 사장님은 한국 분이었지만 손님은 대부분 현지인이었기에 일에 적응하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낯선 메뉴 이름과 술 이름을 잘 알아듣지 못했음은 물론이고 전화 예약이나 주문이 있으면 혹시 실수할까 봐 온몸이 긴장되곤 했다. 결국 메뉴를 공부하다시피 외우고, 레스토랑용 영어를 찾아 공부해야 했다.
한 번은 전화로 포장 주문을 몇 개 받고서 음식을 다른 사람에게 줘버린 일이 있었는데, 신뢰를 잃게 되었다고 심하게 혼난 일도 있었다. 어찌나 서럽던지 그 날은 집에 가면서 펑펑 울었더랬다.
그런 일이 있을 때면 어학원에서 만난 친구들, 특히 나처럼 워킹홀리데이로 와서 알바를 하는 친구들과 만나 기분을 풀곤 했다. 서로 초대해 음식을 해먹고 영화나 드라마를 함께 보고 밤새 수다를 떨었다. 나이도, 국적도, 그동안 살아온 방식도, 뉴질랜드에 온 이유도 다 달랐지만 뉴질랜드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보고자 함은 같았다. 나는 그 중에서도 막내였기에 인생선배(?)들의 많은 얘기들을 듣는 것이 타지생활에 적응해 가는데 큰 힘이 되었다.
▲ 뉴질랜드에서 홀로 서기하며 보낸 1년은 사람과 관계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
그렇게 알바를 한 지 4달이 되어갈 때 일을 그만뒀다. 여행을 하고 싶었다. 뉴질랜드는 최저시급만 해도 한국의 두 배는 되기 때문에 그동안 생활비를 쓰고도 여행할 돈이 남았다. 여행하면서 뉴질랜드라는 나라에 더 빠져들었다. 관광업이 주된 사업이긴 하지만 혼자 여행하기에 아주 편한 환경이었고,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자연과 ‘함께’ 살아간다는 게 느껴져 좋았다. 어딜 가도 산, 바다, 호수, 공원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한국에서는 옆에 있어도 잘 보이지 않는 자연환경들이 그 곳에선 사람들의 삶과 하나가 되어있는 듯했다. 자연은 ‘돌아가야’ 하는 곳이 아니라 그냥 항상 옆에 있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세계의 오지(?)에 있기도 하고(호주와 뉴질랜드는 Down Under World라고 불린다.) 사람이 많이 살지 않아 개발이 덜 돼서 그렇기도 할 것이다.(뉴질랜드에는 사람보다 양이 더 많다.) 하지만 그 곳의 사람들은 자연을 해쳐가며 개발하는 것을 그렇게 기뻐하지 않는 듯 보였다. 좀더 느리고, 불편할지언정 스스로 배려하고 여유를 가지면 될 문제니 말이다.
드디어 이십 대의 문을 열다
그렇게 1년을 딱 채우고 뉴질랜드에서 돌아왔을 때 나는 분명 변해있었다. (물론 살이 쪄서 변한 내 모습 역시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했다.) 가족의 품에서 벗어나 생활하면서 처음 겪는 일이 얼마나 많았던지…. 부모님과 살면서 얼마나 편하게 살아왔는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의, 관계의 중요성을 느끼게 됐다. 홈스테이 가족들, 어학원 선생님과 친구들, 플랫메이트들, 그리고 내가 뉴질랜드로 간다고 했을 때 지원해주셨던 많은 분들까지. 나의 첫 홀로 서기를 가능하게 한 건 그 모든 사람들 덕분이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 받고, 도움 받고 살아가는지를 알게 되었다.
독립은 가족의 품에서 벗어나 혼자 산다고 될 문제가 아니라, 가족이 아닌 ‘함께’ 살아갈 새로운 사람과의 관계망을 만드는 일일까, 하고 어렴풋이 생각을 했다. 첫 20대를 보낸 뉴질랜드 생활은 그래서, 아주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오진성)
* 여성저널리스트들의 독립언론 <일다> 바로가기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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