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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성폭력이 나에게 남긴 것
<꽃을 던지고 싶다> 16. 기록을 하는 이유
* 성폭력 피해생존자의 기록, “꽃을 던지고 싶다”가 연재되고 있습니다. -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경험을 해석하고 성찰하는 시각이 없다면 우리의 경험은 단순한 해프닝이거나 자기 연민에 겨운 넋두리 이상이 될 수 없다. (중략) 때로 경험이 우리에게 삶에 대한 용기와 희망을 잃게 하더라도 인생의 길에 앞서 넘어진 사람들은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 돌부리가 있음을 알려준다.” -<나는 페미니스트이다> 중에서
아침 여섯 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커피를 내리고, 컴퓨터 앞에 앉는다. 기록을 해야 한다.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이 가득하다. 갑자기 눈물이 터져 나온다. 가슴이 갑갑하고, 숨쉬기가 곤란하다. 글을 쓰는 것을 포기한다. 오늘도 힘겨운 하루가 될 것 같다.
한 달 동안 아침마다 반복되던 일상이다. ‘아동성폭력이 나에게 남긴 것’이라는 타이틀을 정하고 글을 쓰고자 했다. 이 글을 써야만 내가 어떻게 ‘사건 이후’를 살아냈는지에 대해서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주제를 정하고 나는 아무것도 기록할 수가 없었다. 너무나 아프고 서러웠다.
살아오면서 참으로 서러운 순간이 많았다. 항상 그 서러움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원치 않아도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기억들과 감정을 감당하기 어려웠고, 일상을 살아내는 것도 힘들었다.
어릴 적 그 사건들이 있었을 때부터 줄곧 구토와 두통에 시달렸고, 울지 않고 일주일을 견뎌내는 것도 불가능했다. 꿈을 꾸고 치유를 결심하기 전까지 그 원인도 모른 채 그 힘듦을 감당해야 했다. 무엇보다 무가치한 삶이라는 생각, 사랑 받지 못할 존재라는 생각은 나 스스로조차 나를 사랑하지 못한 채 생을 저주하고 원망하게 했다.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세세하게 기록해야 할 것인가? 과연 기록하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내가 경험한 육체적, 정신적, 심리적 고통들을 어찌 기록할 수 있단 말인가? 사는 것이 너무도 서러워지고 내가 사람임을 확인하고 싶은 순간, 나에게도 붉은 피가 흐른다고 믿고 싶던 순간마다 피를 보아야 진정이 되어 스스로에게 가했던 수많은 상처들을 어찌 기록해야 한단 말인가?
사건 자체보다 그 사건이 나에게 남긴 것들이 나를 더 힘들게 했다고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말을 하면 사람들은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여전히 나의 고통들을 표현할 언어들을 온전히 발견하지 못했다.
나에게 아동성폭력 경험은 커다란 상처였다. 어릴 적의 상처는 아이를 강하게 만들 수도 약하게 만들 수도 있다. 어릴 적의 사건은 그 사람의 성장 과정, 그 안에서 지지를 받는 경험과 가족의 분위기, 그리고 사회 전반의 성문화와 그 환경 안에서 형성되는 성인식과 가치관 등의 영향으로 다르게 인식될 것이다.
아동기에 성폭력 사건을 경험한다는 것이 모든 아이에게 치명적이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그 사건이 어떻게 다루어지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하기에 열 명의 여성이 경험하고 증언하는 성폭력 사건은 다 다를 수밖에 없으며, 그 사건의 영향 또한 다를 것이다. 아동성폭력을 경험한 모든 여성이 불행하지도 않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내가 겪은 사건들은 인생의 과정에서 잘 다루어지지 않았고, 성폭력은 나의 삶을 전반적으로 취약하게 만들었다. 살아오면서 줄곧 그 사건들이 나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과거를 부정하는 것은,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를 살아가며 미래를 계획하는 역사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존재성을 잊게 한다. 나는 내일에 대한 기대도, 계획도 가질 수 없었다.
에릭슨의 인간발달 원리를 빌려 설명하지 않더라도, 사람은 성장하면서 터득해야 하는 중요한 감정들이 있다. 나에게 있어 아동성폭력의 경험은 사람과 세상에 대한 믿음과 관계 맺기를 파괴하였으며, 자존감과 안전감을 기본적으로 흔드는 사건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치명적인 것은 이러한 파괴가 나이를 먹고 성장하는 과정에서도 줄곧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성장하면서 그 사건들은 불쑥불쑥 떠올랐고, 그럴 때마다 참을 수 없는 두통과 공포가 찾아왔다. 상담을 받으면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라는 진단명을 받고 나의 증세가 이해가 되었지만 그 감정들을 감당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사소한 일상에서부터 내일을 계획하고 준비하는 미래에 대한 기대에도 영향을 받는 것이다. 나는 때때로 빛이 나고 생기가 있고 영민했지만 그것보다 더 자주 무기력하고 파괴적이었다.
나에게 트라우마는 불안, 불면, 몸의 마비, 구토, 섭식장애, 우울감으로 나타났고, 특히 쉽게 깜짝 놀라고 불안해지며 잠을 자지 못하고 집중을 어렵게 했다. 밥 먹고 잠드는 일상조차 나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나의 일상의 대부분을 트라우마가 지배했으며, 내게서 존중 받고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판단을 빼앗아 갔다.
나는 내가 무엇을 온전히 좋아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원하는지,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이 있는지, 무엇보다 나는 존중 받아야 할 사람인지조차 혼란스러웠다. 나는 <트라우마>의 저자 주디스 허먼의 말처럼 항상 패잔병 같았으나, 질 수밖에 없는 그 싸움을 인정받지 못하였다.
안타깝게도 나는 지금도 내가 완전하게 회복되리라는 말을 할 수 없다. 어느 정도 나아지기는 할 것이고, 지난한 치유의 과정을 마치 전투를 치르듯이 해나가면서 나에 대한 원망에서 벗어나 파괴적인 선택을 더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일어났던 사건들이 사라지지 않듯이 나는 때때로 아프고 서러울 것이라는 사실. 그 서러움이 나를 때때로 힘들게 하고 절망하게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주 조금씩 나를 회복시켜나가는 이유는 단 하루라도 나답게 살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타고난 맑고 빛나는 영혼으로 나에게 주어진 생을 성실하게 마주하고 싶다.
4년 간 상담을 진행하면서 그리고 치유의 길을 가면서 ‘나는 강간당했어요’가 아닌 ‘어떻게 강간을 당하였는가’를 말하고 기록한 것은 올해에 들어서였다. 가끔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현실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은 나의 마음은, 그 사실을 말하고 글을 쓰면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되는 것이므로 거부했다.
그러나 내가 경험한 놀라운 사실은 그 사건들을 구체적으로 말을 하고 기록을 함으로써 나에게 왔던 몸의 고통과 마음의 고통이 형체를 갖게 되고, 그러면서 그 고통들과 서서히 멀어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파편화되었던 기억들이 구조화되어 가면서 그 고통은 흐려지고 나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역사성을 가진 사람이 되어가는 느낌이 든다.
이 글은 모든 아동성폭력 피해여성들의 이야기는 아니다. 어떤 여성의 이야기이고, 불행하게도 나의 이야기일 뿐이다. 사람의 생이 다 다르듯이 성폭력 피해자들의 삶도 다 다를 것이다. 나의 이야기가 그러한 사건들을 경험하고도 잘 살아냈다는 해피엔딩은 아닐지라도, 나와 같은 어떤 여성들의 기록이 많아진다면 그것이 역사가 됨을. 그러하기에 기록되지 못한, 기록되어지지 않는 어떤 여성의 이야기를 나는 힘들게 하고 있는 것이다. (너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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