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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일을 하고, 가고 싶은 곳을 가다
<선 밖으로 나가도 괜찮아> 김아람의 ‘떠나는 삶’  
 
‘여성주의 저널 일다’는 사회가 강요하는 10대, 20대의 획일화된 인생의 궤도를 벗어나, 다른 방식의 삶을 개척해가는 청년들의 시간과 고민을 들어봅니다. 특별기획 “선 밖으로 나가도 괜찮아” 연재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일다> www.ildaro.com
 
2000년 17살 여름의 끝, ‘탈학생’이 되다 

▲ 태국의 정글에서. 좀 더 넓은 곳으로 가고자 하는 마음이 부산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세계로 나를 이끌어 주었다
 
2000년 고등학교 1학년 1학기를 끝으로 학교를 나왔다. 여름방학에 다녀온 이주간의 짧은 유럽연수가 준 해방감과 세상에 대한 호기심은 학교생활을 견딜 수 없이 답답하게 만들었다. 좀 더 넓은 곳으로 가고자 하는 마음이 부산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세계로 나를 이끌어 주었다.
 
서울의 하자센터에서 나와 비슷한 사정의 친구들을 만났다. 서로 딱히 좋아하지 않아도 우리에겐 동지애가 있었던가보다. 대안학교가 흔하지 않던 그 시절, 탈학생은 곧 문제아였고 그래서 우리들은 수많은 어른들과 세상을 설득해내며 살아가야만했다. 10년이 훨씬 지난 지금, 우리들은 종종 만나 ‘너희가 있어서 좋았다.’ 라고 말하곤 한다. 함께 학교를 다녔다기보다는, 함께 시련을 헤쳐 나갔다는 기분이 들기 때문일까.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 일이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스스로를 알아갈 기회가 늘어간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었지만, 결국 탈학교는 내가 나를 더 알아가지 않을 수 없게끔 욕망하도록 만들었다. 나는 나를 설명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사회에 둘러싸여 ‘학교를 다니지 않는 것이 그렇게 큰 잘못인가? 다른 사람과 같지 않다는 것은 그토록 사회를 위반하는 일인가? 내가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그렇게도 손가락질 당해야하는 일인가?’ 같은 물음을 달고 살았다. 공교롭게도 그런 물음은 내 인생을 이런저런 다양한 일들과 만나게 해 주었다.
 
‘손으로 만들기’는 그런 내게 큰 해방이었다. 재봉틀을 가지고 만들 수 있는 모든 것을 만들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옷이며 가방, 쿠션을 비롯해 기회가 되면 뭐든 만들던 나는 몇몇 예술장터에 나가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내가 만든 무언가를 궁금해 하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정말 근사했다. 곧 나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먹고 살기도 하겠구나,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라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우연한 기회에 친구와 함께 시작하게 된 하자센터 내의 스낵바 또한 내 그런 마음을 확장시키는 사건이었다. 우리가 만들어 낸 스낵바의 콘셉트와 메뉴를 보고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들이 먹고 마시며 즐거워한다. 많은 이들의 사랑방이 되어가는 우리들의 작은 가게는 길지 않은 시간동안 내게 이런 방식의 일들이 내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 요소가 될지를 알려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들로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사실이 학교 바깥의 ‘반항아’ 십대였던 나에서 잘하는 것을 통해 자연스럽게 내가 설명되는 행복한 경험으로 나를 이끈 것이었다.
 
갈망 속에 떠난 여행이 알려준 것 

▲ 하자센터에서 친구들과 만든 인형     
 
늘 갈망하던 여행 또한 끊을 수 없었다. 여행을 다닐 때면 타국의 낯선 사람들이 가시 돋친 질문을 던지는 한국인들보다 더 가깝게 느껴지곤 했다. 설령 검은머리의 어린 소녀가 대체 여기서 뭐하는 거지, 라는 눈빛을 받는다 해도 그것은 그저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한 호기심일 뿐이었다. 그들에게 내가 다니는 학교가 대안학교이건 인문계이건, 알게 무어였겠는가.
 
그 외진 곳을 용감히 찾아온 동양인 소녀에게 그들은 밥도 지어주고 길도 알려주고 때로는 그냥 어딘가를 데려가주기도 했다. 여행은 탈학생으로서의 내가 아니라 그냥 나를 만나게 한 것이었다. 그 매력에 빠져, 두세 달 후 돌아온 여행이 6개월이 되고 6개월이 지난 후엔 15개월에 이르는 여행을 떠나게 되고야 말았다. 시간을 생각하지 않고 멀리 멀리 발 닿는 곳까지 가본다면 어딘가 완벽하게 내게 맞는, 살만한 곳을 찾게 되겠지. 그게 내 생각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어딜 가든 사람들이 참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아니 어쩌면 똑같은 모습으로 살고 있다 말해야할지도 모르겠다. 궁전 같은 저택에 사는 러시아의 친구들도 부부싸움을 했고, 돈 없이 가난해서 방 구할 여력이 없던 학생 부부 친구들은 단칸방에 나를 재워주면서도 그렇게 행복해보일 수가 없었다.

관광객이 전무한 작은 독일 마을까지 유학 간 일본인 유학생과는 서로 동양인을 오랜만에 만나 그토록 반가웠고, 딱 한국사람 같은 성격의 그리스인 가족들은 내 인생을 통째로 간섭하려 들기도 했다. 마드리드에서도 아침 버스로 출근을 하고, 중국에서도 해질녘이면 사람들이 집을 향해 우르르 몰려가긴 마찬가지였다.

 
긴 시간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보고 많은 일들에도 끼어보고 많은 곳을 돌아다니고 또 많은 곳에서 자보고 나니, 나도 한국이 그리워졌다. 그렇게 싫어했던 잔소리꾼 어른들도 이해가 되었고,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우리네 학교 시스템에도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대체 나만 가지고 왜 이러세요, 라고 묻고 싶던 수많은 순간들이 이제는 이해가 되었다. 어느새 화내고 불만해하고 주눅 들고 외로웠던 나는 사라졌던 것이다. 나는 15개월의 여행을 접고 2005년 말,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
 
‘숙박업소’ 아닌 ‘여행자의 집’을 열다 

▲ '잠 게스트하우스'에 들른 여행자들이 남긴 메모들.      
 
문제는 10대 탈학생이라는 타이틀을 벗고 나서 내게 부여된 ‘비대학생’의 타이틀이었다. 어렵게 하나의 관문을 통과했더니, 여전히 거기에는 또 다른 관문이 놓여있었다. 한국은 학력이 없으면 좋은 자리의 기회는 거의 박탈당하기 일쑤니 나는 늘 인턴 급에 머물러야했다. 어쩌다 들어간 회사들에서는 또 되레 내가 그 답답함을 견디지 못해 사장님과 싸우기 일쑤였다. 이거야 원, 세상사는 게 고등학교 나올 때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사회는 학교와 달라서 자아 찾기만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또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도 대기업에 들어가기 위해 대학을 가야하나? 친구들처럼 유학을 가야하나? 아니면, 어째, 또 외국으로 가?
 
결국 2010년까지 취직과 사직을 열 번은 해보고 나서, 나는 그냥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최고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다. 다행히도 나는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 행복한 사람이고 어떤 모양으로 삶을 만들어가고 싶은지 흐릿하게나마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을 해야 할 지를 떠올리자 여행하면서 생각해두었던 일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첫 번째가 여행자를 위한 쉼터, 게스트하우스. 내가 수년을 돈 없이 무사히 여행했던 것은 수많은 친절한 타인들 덕분이다. 그러니 내가 사는 서울에 지금처럼 많은 여행자들이 찾아온다면, 나는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어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지 않겠는가.
 
숙박업의 붐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로 세상이 떠들썩하기 전에, 나는 방 세 칸짜리 작은 집 하나를 빌려 ‘잠 게스트하우스’ 라는 여행자의 집을 열었다. 할 줄 아는 것을 모두 활용 해 가구도, 이불도, 침대도 다 내가 만들고 친구들 불러다 벽에 색칠도 하면서 말이다.
 
‘잠’을 만들고 나서부터는 정말 신나는 생활을 해왔다. 숙박업소를 열었다고 생각한다면 공간대비 최대한의 수익을 얻으려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나는 낯선 타국에서 자신의 집을 만난다는 취지로 공간을 꾸며놓았으니 조금 더 마음이 편했다고나 할까. 장기 게스트가 한 명이라도 있는 날에는 동해로 파도타기를 하러 달려갔고, 때로는 부산의 집에도 내려갔다 오곤 한다. “네 집처럼 생각해”라고 키만 맡겨버리고서는 말이다.
 
사업을 시작했으니 그래도 예전과는 달리 길게 떠날 수 없는 메인 몸이 되었지만 세계 각국에서 찾아오는 여행자들이 때때로 선물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가 통하는 사람과는 친한 친구가 되기도 하면서 여행의 기쁨을 고스란히 ‘잠’으로 가져와 주고 있어서 또 행복하다. 때로는 누군가가 작은 하우스 파티를 열기도 하고,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의 수다의 장이 되기도 하는 공간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내게 자신의 공간을 거리낌 없이 보여주었던 수많은 사람들 덕분이 아닐까 한다.
 
여행자의 길을 넓히는 여행자로 살기 

▲ 2010년 홍대 앞 거리에서 레모네이드를 만들어 팔던 때.   
 
지금은 ‘잠’ 1주년을 기념하는 책을 준비하고 있다. 너무 많은 기억, 너무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아 만들어진 곳이고, 참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아 운영되고 있는 곳이기에, 그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또 다가오는 10월부터는 손님들에게 게스트하우스를 전적으로 맡겨버린 뒤에 더 많은 여행을 다니면서 다음에 펼쳐 볼 일들을 구상하고 싶다. 쇼핑과 클럽으로 점철된 한국 문화가 아니라, 진짜 사람을 만나는 한국 여행. 서울에만 치우친 외국인 여행자들의 여행길을 넓혀보고 싶다.
 
내가 수많은 나라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소중한 곳에 데려가 주고,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주었다. 거의 대부분 그 나라 기념품이랄 것 하나 가지고 돌아오지 못했지만, 정말 많은 장소와 많은 사람이 내게는 고스란히 여행의 선물로 남아있다. 아마 다른 여행자들도 그리한다면 즐겁기는 마찬가지가 아닐까. 시골에 가서 옥수수 하나 건네받아 먹어보는 기쁨이 한국의 정이라는 것 아닌가. 또 시간이 없다면 멀리가지 않더라도 서울에서 한국인들과 어울려 놀고, 먹고 이야기 나누는 자리도 더 만들고 싶다.
 
거기다 나중에는 ‘스펙’ 쌓기에 급급해 급히 떠났다 급히 돌아오는 많은 한국인 여행자들을 위한 재미난 여행 문화도 만들고 싶다. 대안교육까지는 아니더라도 초중고생들이 집 밖에서 하루 자보면서 삶을 배우는 프로그램도 진행해보고 싶고, 아이들과 노인, 아이들과 여행자가, 여행자와 비여행자가 만나는 장소들을 다양하게 계속 만들어보고 싶다.

어느 한쪽에 치우쳐 살다보면 결국 자신과 다른 사람을 손가락질 하게 되는 반면,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는 일이 자연스럽게 늘어나다보면 그들을 이해하게 되는데, 그게 대안 교육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내 안에서 점점 자라나버렸으니 말이다.

 
타고난 여행벽이 어디가지 않는 이상 나는 여전히 어딘가로 떠나면서 살아갈 것이다. 지금은 사업을 한답시고 이런 저런 일들을 펼치고 있지만 몇 년 후에 또다시 삶에 의문을 품고 여행을 떠날지도 모를 일이고, 도시가 싫다며 어디 시골에 들어가 농사를 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이 모든 것은 내가 누군지 고민하던, 그래서 늘 머리를 짜내어 질문에 대답하고 어른들을 설득해야하던 10대 시절보다는 조금 낫다. 서른이 코앞이니 이제는 아무도 내게 대놓고 따져 묻지를 않는다. 이제 잘 설득하고 잘 다독여서 평생 함께 가야할 ‘내 자신’ 말고는 말이다.  (김아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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