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계단에 대한 공포와 거부감
[꽃을 던지고 싶다] 13. 일상을 지배하는 기억 

  
성폭력 피해생존자의 기록, “꽃을 던지고 싶다”가 연재되고 있습니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마흔이 다 되어가는 나에게는 일상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 그것은 계단에 대한 공포이다. 얼마 전까지도 왜 그리 계단으로 다니기 싫은 지 알 수가 없었다.
 
계단에 대한 거부는 일상의 많은 부분을 불편하게 했다. 예를 들면 지하철을 타면 한 시간이면 다닐 수 있는 거리를 난 버스를 세 번 갈아타고 3시간을 걸려서 다니기도 한다. 또한 지하도나 육교를 피하기 위해 돌아가는 일은 나에게는 당연한 일상이다.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고 더 부지런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일상의 불편함이 나에게 계단에 대한 거부감보단 크지 않았다.
 
지금도 어쩔 수 없이 계단을 오르내릴 때면 손잡이를 잡고 최대한 천천히 그리고 앞을 살피며 걷게 된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내 기억에는 오래된 습관이었고, 어느 순간 계단은 나에게 공포로 자리 잡았던 것 같다. 계단 앞에 서게 되면 나는 안정감을 잃게 된다. 왠지 불안하고 누군가 나를 공격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고 만다.
 
우연히 나의 습관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누군가 나에게 ‘왜 계단에 거부감이 드는 지 생각해 보라’는 조언을 했다. 최근 사진처럼 기억이 떠올랐다. 무의식적으로 일상을 지배하던 기억이…….
 
오랫동안 봉인되어 있던 그 때의 기억.
 
등굣길에서 피해를 경험하고 학교 가는 길이 나에게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상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학교를 때려치우고 집을 뛰쳐나와 안전한 곳을 찾을 만큼의 용기도 부족했다.
 
산 정상에 있는 학교에 다니는 길은 세 가지 방법이 있었다. 가장 편한 길인 내가 다니던 길, 대부분의 학생들도 선호했던 길이다. 이 길은 흔히 산에 있는 도로처럼 경사가 조금 있게 산을 에두르는 길이였다. 또 하나는 한참을 돌아 마을을 끼고 가는 길, 그리고 마지막으로 산을 직선으로 가르는 계단으로 이어진 길이었다.
 
나는 그 날의 사건 이후로 산을 에두르는 길을 피하게 되었다. 마을로 난 길은 사람들의 시선을 마주치는 게 싫어서, 산을 직선으로 관통하는 길을 택하게 되었다. 그 계단 길은 중간에 집이 몇 채 있고 사람도 별로 다니지 않아 편했지만, 무엇보다 안전할 것 같았다. 계단을 올려다보면 누가 있는 지도 알 수 있고 도망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피해를 경험하고 한 열흘쯤 지나서 계단으로 다니는 것에 안정감을 느끼고 있던 하루였다. 그 날도 별로 다를 것 없는 일상의 시작이었다. 더 이상 학교를 일찍 가는 일은 없었다.
 
그 날은 이상하게도 학교에 가기 싫었다. 하지만 집에 가부장이 있었기에, 나는 집에 있는 것을 포기하고 조금 늦게 학교로 향하였다. 학생들이 대부분 등교를 마친 시간이어서 학교에 가는 길은 한산했다.
 
산 입구에 다다랐을 때 학교 쪽을 올려다보았다. 아주 멀리서 그 남자가 보였다. 그 남자의 얼굴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선명한 것은 그 남자의 옷이었다. 다행히도 그 남자는 나를 못 본 것 같았다. 나는 재빨리 계단이 있는 골목으로 몸을 피하였다.
 
발걸음을 재촉했다. 계단은 안전하게 빨리 학교로 인도해 줄 것이라 여겼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학교에 가지 말았어야 했다. 계단 위를 바라보면서 지속적으로 누가 내려오는지 확인 했다.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에 놀라서 고개를 드니 한 아주머니가 내려오고 계셨다. 마음을 쓸어 내렸다. 이제 모퉁이만 돌면 학교 앞이었다.
 
모퉁이를 돌아서는 순간, 그 남자가 숨어 있다가 나타났다. 몸을 돌리려 했을 때 그 남자의 억센 손이 나를 잡아챘다. 나는 “살려주셔요.”를 연발했다. 죽음과 마주하는 듯한 공포. 그 공포를 다시 경험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의 몸은 마음과 상관없이 두려움에 떨리고 있을 뿐 다리와 목소리는 마비되어 있었다.
 
그는 이번에는 더 익숙하게 나를 통제했다. 나는 그 사람의 ‘걸으라’는 말 한 마디에 거부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면서 순응하게 되었다. 주변을 살피어 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몸에서 떨림이 느껴지고 눈앞이 흐려졌다. 그 남자의 억센 팔에 뒷덜미를 잡혀 끌려가는 동안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는 나를 다시 그 장소로 끌고 들어갔다.
 
방공호 안의 어두움, 그 어둠을 통과하는 빛 줄기, 그리고 쾌쾌한 냄새. 어지럼증, 쏟아지는 눈물. 떨리는 몸. 익숙해지지 않는 고통. 두려움. 공포.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마치 나의 영혼이 분리된 듯 강간당하는 나의 모습을 그 사람의 뒤에서 보고 있다. 꿈 속에서처럼 황토색 점퍼와 청바지가 보인다. 그리고 아무 느낌이 없다. 어두운 그 곳이 갑자기 환해지는 듯하고 나는 계속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아이는 미동도 없이 눈을 감고 있다. 마치 죽은 시체와 같다. 차라리 저 아이가 죽었으면 하고 바래본다.
 
기억은 여기에서 멈춰 있다.
그 날 이후 나는 기억을 잃었다.
 
오랜 시간 25년 동안 이 날의 사건에 대한 기억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후의 기억도 없다. 나는 그곳을 어찌 나왔을까? 학교는 갔던 것일까? 어떻게 그 남자의 뒤에서 강간당하는 나를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일까? 마음에 분열이 일어났던 것일까? 정신을 잃었던 것일까?
 
계단에 대한 기억은 최근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 남자에게 두 번의 강간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희미한 기억이었을 뿐이고, 그 날의 기억은 더욱 흐릿했다.
 
그 날 나는 어떤 감정이었을까? 슬펐을까? 외로웠을까?
기억은 내 편이라서 일까? 여전히 그 이후의 기억이 흐릿하다.
잃어버린 시간. 설령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고통이라 기억 너머에 존재하는 시간일지라도 이제는 알고 싶다. 어릴 적 내가 혼자 감당했을 그 고통의 크기를. 그 방공호를 빠져 나와 내가 어디를 향했는지, 어떤 감정이었는지, 알고 싶다.
 
이유도 모른 채, 일상의 불편함을 감수하는 나를 원망했던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왜 그리 계단이 싫었는지 이제는 알 것 같다. 안전하리라 믿었던 믿음은 너무도 허무하게 침해 당했다. 그 날의 사건은 나의 기억 저편에서 나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가 25년 후에 꿈으로 나를 이끌었다.
 
기억을 떠올린 후, 계단을 거부하는 나를 더 이상 원망하지 않는다. 그리고 계단에 대한 두려움도 이겨낼 수 있을 힘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날의 사건을 떠올리고 여전히 그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 공포와 거부가 계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이제는 알 수 있다.
 
너울 / 여성주의 저널 <일다> 바로가기 www.ildaro.com

댓글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