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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동안 관통해온 기억을 풀어내며
<꽃을 던지고 싶다> 1. 꿈을 꾸다 
 
[칼럼 소개: 성폭력 피해생존자 너울의 세상을 향한 말 걸기, <꽃을 던지고 싶다> 연재를 시작합니다. -편집자 주  <일다> www.ildaro.com]
 
“상처의 치유는 문제를 덮어둠으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라 문제를 들춰내며 자신의 경험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해석, 재발견함으로써 가능하다. 폭력 당한 경험을 잊으려는 노력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여성주의 시각으로 재해석할 때 가능하며, 이 때 그들은 희생자가 아니라 생존자가 된다.” -정희진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중에서
 
꿈을 꾸다
 
2007년 12월 어느 날 서른 세 해를 마무리 하던 나는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일을 경험하게 되었다. 짧은 삶을 살아오면서 스스로에게 가장 편하고 행복한 시기라고 자부하며 보내고 있었던 날이었다. 성인이 되어서 처음으로 내 밥벌이를 하지 않아도 됐고, 소풍을 나온 아이처럼 모든 일에 재미있어 하고, 나를 인정해 주는 사람들로 내 주변을 채워나갔다.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는 여유와 사치를 누리며 살고 있었다.
 
어느 때보다 내 삶은 평화로웠으며 희망차 있었고, 활기차 보였다. 적어도 난 살아있다고 느꼈고, 가끔씩 찾아오는 두통 외에는 모든 것들이 만족스러웠다. 머리가 깨어질 것 같은 두통은 병원에 입원을 필요로 할 정도였으나, 병원에서 이상 없다는 결과를 들은 터라 그냥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12월 세상의 축복과 사랑이 가득하기를 누구나 희망하는 크리스마스 전쯤, 그 날도 알 수 없는 두통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일상을 방해 받을 정도의 것은 아니었기에, 좋아하는 사람들 적어도 나를 인정해 주는 사람들, 그리고 과거의 나를 모르는 사람들과 기쁘게 집에서 와인 파티를 하였다. 그리고 오늘도 평온했다는 안도감에 잠이 들었다.
 
그것은 단순한 꿈이었다. 현실이 아니었고, 안전한 집에서 자다가 일어난 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꿈이 나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꿈에서 난 어른이었고, 한 남자에 의해 강간을 당하고 있었다. 공포에 질려 몸은 움직일 수 없었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으나 목소리는 나오질 않았다. 저항해야 할 상대는 남자라는 것밖에 기억이 나질 않았다. 명확한 것은 그가 입고 있는 옷뿐이었다.
 
죽을 것 같은 공포가 나를 에워쌌으며, 난 마지막 힘을 다해 구원을 요청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그러나 내 목소리는 너무 작았다. 거의 나오지 않는 소리로 난 울음을 멈출 수 없는 상황에서도 “살려주세요” 만을 되뇌었다.
 
그것은 명확한 죽음과 마주앉은 느낌이었다. 꿈을 꾸면서도 몸은 움직이지 않았고,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의식 속에서도 난 강간을 당하고 있었다. 나는 강간당하는 꿈속의 나를 그 남자의 등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다행히도 죽음 직전에서 나의 울음과 목소리를 듣고 새벽에 놀라서 나를 흔들어 깨우는 파트너에 의해 꿈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눈물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 공포에 난 며칠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아침에도 너무나 선명한 공포에 난 안정을 찾을 수 없었으며, 일상을 견뎌낼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선명한 공포. 기억. 알 수 없는 아픔. 그러면서 더욱 선명해진 사건에 대한 기억.
 
몇 일의 불면이 지나자, 꿈속의 그 남자가 입고 있던 황토색 옷과 청바지는 25년 전 나를 강간했던 사람의 옷 색깔이라는 사실이 머리에 뚜렷하게 각인되었다. 그 날 이후로 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참을 수 없는 두통에 시달렸으며, 밥을 먹을 수도 없었고, 자살을 시도하게 되었다. 생기 넘친다고 느꼈던 나의 일상은 순식간에 퍼석한 사막으로 변해버렸고, 관계가 깨어지며 나를 저주하기 시작했다.
 
‘세월이 약’이라는 말, ‘시간이 지나면 상처도 잊힌다’는 사회적 속설들은 적어도 나에겐 해당사항이 아니었다. 절대로 강간의 피해는 잊히지 않았다. 그 공포는 시간이 한참이 흐른 뒤에도 흐려지지 않는다는 사실만이 명확하게 각성되었다. 참을 수 없는 불안감과 혼자 감당하기 힘든 공포에 휩싸였다.
 
꿈을 꾸고 난 후와 그 전의 삶은 아주 다른 것이었다. 그 이 후의 삶은, 너무 변해버린 내 모습은, 주변의 사람들에게 이해 받지 못하였다. 관계가 깨어지는 고통, 일상을 살아낸다는 것의 어려움, 과거의 폭력이 되살아나는 아픔을 겪어내야 하는 것이었다.
 
25년 전 사건, 혹은 과거의 한 시점에서 일어났던 경험이 아니라 25년 동안 나를 관통해낸 사건을 이제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너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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