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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딸을 만나러 가는 길 36. 그녀가 그립다
 

[연재 칼럼 소개] 이혼을 하면서 두고 온 딸은 그녀에게는 늘 어떤 이유였다. 떠나야 할 이유, 돌아와야 할 이유, 살아야 할 이유……. 그녀는 늘 말한다. 딸에게 하지 못한 말이 너무 많다고. <딸을 만나러 가는 길>은 딸에게 뿐만 아니라 이 땅의 여성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윤하의 고백이 될 것이다.  -일다 www.ildaro.com

내랑 살자”던 시어머니에 대한 기억
 
“내가 아들을 잘못 키웠다”고 말씀하셨던 시어머니도 부모님의 이혼소송으로 위자료가 거론되자, 태도를 바꿔 상처를 주는 행동을 많이 하셨다. 나는 이런 시어머니께 오랫동안 서운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세월 흘러 ‘팔은 안으로 굽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하고 생각하니, 이해가 안 될 것도 없다 싶다. 그래서 지금은 시어머니에 대한 서운함보다 내게 보여줬던 따뜻한 마음을 더 많이 생각한다. 짧은 결혼 기간 내내, 그녀는 내게 늘 따뜻했던 사람이었다.
 
시아버지의 제사가 있던 어느 한 겨울이었다. 그날, 나는 제수용으로 쓸 수박을 물로 씻다가 그만 떨어뜨리고 말았다. 마침 친척 어른들은 모두 부엌 밖에 계셨고, 그 현장에 있던 사람은 나와 남편과 시어머니뿐이었다. 박살난 수박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나와 남편에게 시어머니는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이 수박은 내가 깬 거다!”
 
그 즉시 다시 수박을 사오라고 남편을 보내고, 시어머니는 나를 꾸짖기는커녕 다정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다음부터는 단데이(잘) 해라!” 하셨다. 그리고 모인 친척어른들께는 당신이 잘못해서 수박을 깨뜨렸노라고 나의 실수를 감춰주셨다. 영문을 모르는 어른들은 “네 시어마시 덕분에 한겨울에 비싼 수박을 엄청 먹는다”며 즐거워하셨다.
 
또 한 번은 명절을 지내고 상경하려고 가방을 챙기고 있는 나한테 다가와, 아무 소리 없이 짐 속에 무언가를 꾹 찔러 넣고 바쁘게 나가시는 것이었다. 나는 시어머니의 행동에 다소 당황해하며, 넣어준 것을 들쳐보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곶감두릅’이었다. 나는 그걸 보면서 배시시 웃었다. 그날 그녀로부터 받은 건 곶감보다 더 달콤한 그녀의 마음이었다.
 
그러다가 남편이 내게 이혼을 요구해 왔다는 소식을 양 쪽 부모님께 알렸을 때, “뭐, 이혼이라고! 그럼, 누가 겁낼 줄 알고!” 하며, 즉시 이혼할 태세를 갖춘 사람은 우리 부모님이셨고, 부산에서 단걸음에 달려온 시어머니는, “이렇게 쉽게 이혼할 수는 없지요. 제가 며느리를 데리고 가겠습니다. 애미와 같이 있는 애한테 함부로 하지 못할 겁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시어머니의 이런 노력을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으니 노력해보라 하시며, 부모님도 내게 당분간 시댁에 가 있을 것을 제안하셨다. 나는 딸과 함께 시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시댁으로 갔다. 시어머니는 자초지정을 잘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아들에게 뭔가 꿍꿍이속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러면서 도착하자마자, 장에 가서 털스웨터를 사가지고 와서는 직접 내게 입혀주며 말했다.
 
“이럴수록 따뜻하게 있어야 한대이. 아이고! 불쌍해서 우짜노? 내랑 살자! 내가 널 끼고 있는데, 그 놈이 혼자 우째 이혼을 하겠노!”
 
그러면서 불교신자였던 시어머니는 남편 마음을 되돌려달라고 틈나는 대로 빌라며, 내 손에 염주를 쥐어주셨다. 그렇게 시어머니와 부산에서 한 달 반가량 살았다. 그 사이 남편은 부산에 두 번을 들려, 나를 서울로 끌고 가겠다고 행패를 부렸다. 그러다 끝내 폭력까지 쓰고 돌아간 날 아침,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것은 결코 사람으로서 사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런 상황에서 시어머니는 지금까지의 태도를 바꿔 이렇게 말씀하셨다.
 
“저렇게 이혼을 원하니, 우선 이혼을 해주고 재결합을 바라면 어떨까?”
 
아! 이제 더 이상 여기서는 살 수 없구나, 생각했다. 나는 아무 인사도 없이 아이를 업고 짐을 꾸려 시댁을 나왔다. 그때 이것이 내 대답이라는 걸 알아차리길 바라면서, 거실 중앙 탁자 한가운데에 시어머니가 준 염주를 눈에 잘 띄게 놓고 나왔다.
 
그리고 서울로 와서 남편에게 이혼을 해주겠다고 최종 의견을 표현하고 친정으로 왔다. 나를 통해 그동안 벌어졌던 일련의 사건들을 듣고, 더 기대할 것이 없다고 판단하신 부모님은 이혼소송을 신청하셨다. 그러나 끝은 그렇게 나지 않았다. 더 비루하고 속상한 일들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부모님이 소송을 제기하자, 시어머니는 다시 단걸음에 달려와 부모님을 만나셨다. 그러고는 이혼은 절대 안 된다고, 당신은 이혼을 시킬 생각이 없다 시며, 나를 다시 데려가고 싶다고 하셨단다. 그런 시어머니께, 어머니가 “직접 가셔서 애미를 설득해 데려가세요!” 하니, 시어머니는 아무 대답을 하지 못하시더란다.
 
그 후, 시어머니가 서울로 나를 만나러 와서 한 번 뵌 적이 있고, 이혼 판결 직후 지금의 아이 새엄마가 시댁에 와서 살 때도 전화가 한 번 왔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때, 시어머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시어머니는 그날은 내게 미안하다고 하셨다. 나랑 살 때가 좋았다는 말씀도 하셨다. 그리고 전화를 끊기 직전, 내게 이런 약속도 하셨다.
 
“아이가 커서 사춘기가 지나면, 모든 걸 사실대로 말해주고 외갓집으로 보내주마!”
 
나는 이 말씀은 꼭 기억하면서 살았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아이가 중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다.
 
만약, 시어머니가 아직도 살아계셨더라면, 나와 아이의 관계가 지금 같지는 않았을까? 그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가 내게 베푼 마음을 고맙게 생각했다고, 늘 잊지 않고 있다고 말씀드릴 기회는 있었을 것이다.

꼭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로서가 아니라, 그저 아주 옛날 철없고 서툴던 나를, 내 상처를 잘 알고 있는 그분과 친구처럼 지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더 일찍 그렇게 할 수도 있었겠지만, 못하고 끝이 났다. 그러기엔 인간은 너무 약해서 상처가 아무는 데도, 상처를 빠져나오는 데도 너무 많은 세월이 필요하지 않은가? 세월이 이렇게 흐르고 나서야 그녀가 그립다. 너무, 너무 늦었다.  (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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