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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윤하의 딸을 만나러 가는 길 (35) 

[연재] 이혼을 하면서 두고 온 딸은 그녀에게는 늘 어떤 이유였다. 떠나야 할 이유, 돌아와야 할 이유, 살아야 할 이유……. 그녀는 늘 말한다. 딸에게 하지 못한 말이 너무 많다고. <딸을 만나러 가는 길>은 딸에게 뿐만 아니라 이 땅의 여성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윤하의 고백이 될 것이다.   <일다> www.ildaro.com
 

요즘은 그래도 적은 편이지만, 내가 이혼한 사실을 숨기지 않고 말하는 것에 놀라는 사람들이 옛날에는 정말 많았다. 그 때마다 이들은 내게 ‘당당하다’라고 말하곤 했는데, 그건 적당한 표현이 아닌 것 같고, 그저 ‘담담하다’라는 말이 더 어울릴 듯하다.
 
사람들 앞에서 솔직하게 내 상황을 말하거나 이혼녀라는 사실에 주눅 들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내 노력도 필요했지만, 그보다 더 많이는 부모님의 도움 덕분이었다. 부모님이 이혼한 나를 창피하게 여기며 감추고 싶어 했다면, 나는 이혼할 때 받은 상처보다 더 깊은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얼마 전 한 장애 여성의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난 이런 우리 부모님의 태도를 주목하지 못했다. 그녀의 부모님은 자신을 부끄러워한 나머지,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손님이 방문할 때마다 방에서 나오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이런 경험이 그녀에게 마음의 상처를 준 것은 물론, 그녀를 소극적이고 자신 없는 성격의 소유자로 만들어놓았다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난 우리 부모님을 생각할 수 있었다.
 
내게도 장애인 여동생이 있다. 아기였을 때 소아마비를 앓아, 한 쪽 다리가 불편한 동생은 우리 다섯 남매 중 누구보다도 똑똑하고 명랑하다. 부모님은 그녀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독립적이고 당당한 아이로 키우셨다. 사람들 앞에 그녀를 드러내는 걸 망설이거나 창피해 한 적이 한 번도 없는 것은 물론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모님은 이혼한 나도 똑같이 대하셨다.
 
이혼 결심을 하고 친정으로 온 것은 12월 겨울이었다. 그 해 여름, 부모님은 살고 계신 곳   뒤뜰에 집을 새로 지어 이사를 하셨다. 그 뜰은 우리 가족을 먹이고 키워준 곳이다. 우리 남매들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은 그 뜰에 야채를 키우셨고, 한 때는 돼지나 닭 같은 가축을 키우기도 하셨다.
 
또 아버지는 한편에 나무들을 심어 돌보셨다. 오동나무, 호두나무, 산수유, 향나무, 주목 등 아버지가 좋아하는 나무들이 큰 키로 우거져 있었다. 부모님은 이 뜰에 늘 집을 짓고 싶어 하셨다. 두 분이 고개를 맞대고 새로 지을 집을 구상하는 모습을 보아 온 건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였지만, 막상 그 꿈은 18년이 지나서야 이룰 수 있었다. 그때 난 결혼한 상태였고, 새로 지은 집으로 이사한 부모님을 축하해드리러 가기도 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이혼 이야기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10월말, 사건이 벌어진 직후에 시어머니 손에 이끌려 부산 시댁에서 한 달 반가량 머무르다 이혼을 결심하고 친정으로 온 것은 12월 어느 날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다음 해 3월까지 살았다. 아니, 우리 가족이라고 해야 옳다. 부모님은 나를 위해 그토록 마음에 들어 한 새 집을 떠날 결심을 한 것이다.
 
내 이혼 결정을 존중해 주며, 부모님은 ‘함께 살자’ 하셨다.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결혼 전처럼 같이 살자. 그러나 이 동네는 안 되겠다. 네가 다시 돌아왔다고 말이 얼마나 많겠니? 우리는 상관없지만, 네가 불편할 거야. 그래서… 이사를 가기로 했다.”
 
그곳은 60여 채의 단독주택으로 이루어진 서울 근교의 마을이었다. 오래 전부터 함께 산 이웃이 많기도 했지만, 워낙 옆집의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조차 시시콜콜 관심기울이길 좋아하는 분위기였다. 이미 내가 아이를 데리고 있었던 몇 개월 동안도 ‘그 집의 시집간 둘째가 왜 와 있는 거지?’하며, 소문이 파다했던 터였다.
 
나야 이사를 한다면, 좀 더 마음 편하게 부모님과 살 수 있을지 몰라도 새 집에서 채 몇 개월 살지 못하고 이사를 결심한 부모님께는 죄송스러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그 집은 부모님의 오랜 숙원의 결실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곳은 야트막한 산을 면하고 있어, 공기가 정말 좋았다. 집은 햇볕이 잘 드는 정남향에, 마당에는 아버지가 아끼는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또 시야를 가리는 건물 하나 없이, 멀리 남한산의 풍경이 시원하게 병풍처럼 펼쳐져 있었다.
 
부모님은 언젠가 이곳으로 다시 올 거라며, 세를 놓고 서울 변두리의 한 단독주택을 빌려 이사를 하셨다. 옮긴 집에서 난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대학원을 다녔고, 그 후 프랑스 유학을 가기 전까지 6년을 살았다. 부모님은 다시 지금 살고 계신 곳으로 이사를 하면서, 당시 새로 지은 그 집에서 사는 행운은 영영 누리지 못하셨다.
 
하지만 그 집을 떠나온 걸 한 번도 아쉬워하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그 집과는 인연이 없었나보다”라고, 담담하게 말씀하시는 어머니의 말투에서도 나를 위해 어려운 선택을 내린 것을 후회한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이보다 더 내가 부모님을 고맙게 생각하는 건 두 분이 이혼한 나를 창피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일부러 떠들고 다니지도 않았지만, 친척어른들이나 주위 사람들에게 내 이혼 사실을 숨기지 않고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집안의 행사나 모임에 나를 소외시키지 않고, 나를 드러내는 것을 불편해 하지 않았다.
 
한번은 모임에서 어머니는 어떤 분께, ‘우리 둘째!’라고 환하게 웃으며 나를 소개를 했다. 소개받은 분이 “아! 친정으로 돌아왔다는, 그 둘째?” 라고 하자, 전혀 불쾌한 표정 없이 그저 반갑게 ‘그래, 바로 그 둘째!’라고 대답하신 어머니였다. 이런 상황에서 계면쩍은 표정을 지은 사람은 도리어 나였다.
 
당시는 부모님의 배려에 감사를 느끼지도 못했고,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부모님의 태도가 나한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시간이 지나서야 부모님이 내게 보였던 이런 모습들 덕분에 내가 자긍심을 잃지 않고 씩씩할 수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세월이 많이 흘러, 한참 나이가 들어서야 그들의 사랑을 깨달았다는 건 어리석고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래도 너무 늦지 않은 것으로 위로를 삼고 싶다. 다음에 부모님을 뵈면, 꼭 이 이야기를 하면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려야겠다.  (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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