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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을 만나러 가는 길 (32) “이게, 왜 여기 있니?” 

[연재 소개] 이혼을 하면서 두고 온 딸은 그녀에게는 늘 어떤 이유였다. 떠나야 할 이유, 돌아와야 할 이유, 살아야 할 이유……. 그녀는 늘 말한다. 딸에게 하지 못한 말이 너무 많다고. <딸을 만나러 가는 길>은 딸에게 뿐만 아니라 이 땅의 여성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윤하의 고백이 될 것이다.   <일다> www.ildaro.com

옷장 속에 처박혀 있던 실뭉치를 생각해 낸 것은 목도리를 짜고 있다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난 직후였다. 늘어나 쓸 수 없게 된 털모자를 풀러, 지난 해 목도리를 떴었다. 나는 목도리 말고 다른 건 뜰 줄 모른다. 뜨개질이라면, 중학교 가정 시간에 배운 것이 다여서, 그때 떠본 기억을 더듬어가며 조금 뜨다가 끝내지 못하고 던져놓았다. 이렇게 추운 겨울에는 뜨개질이 제격이라고 중얼거리며, 미뤄놓았던 걸 다시 잡았다.

 
생각해야 할 것들을 잠시 접고 뜨개질 삼매경에 빠져 겨울밤을 보내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뜨개질이나 바느질, 혹은 자수 같은 걸 하노라면, 마음이 고요해지는 경험을 해서 좋다. 뜨개질을 하고 있자니, 옛날에 아이를 보내고 수를 놓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다가 문득, 혼자 화를 내기도 했다.
 
“어떻게 그 자수가 거기 있을까!”
 
나는 소리 내어 투덜거리기까지 했다.
 
이혼을 하면서 아이를 전남편에게 보낸 직후,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 쓴 채, 여러 날 꼼짝 않고 난 잠만 잤다. 그러다가 벌떡 일어나, 수예점으로 달려갔다. 거기서 원앙 문양의 베갯모 재료를 사가지고 와, 수를 놓기 시작했다. 베갯모를 선택한 건, 상점 안 재료들 중, 값이 제일 쌌고 도안도 가장 간단했기 때문이다.
 

▲ 전남편에게 아이를 보낸 후, 상처와 서러움으로 수 놓았던 베갯모.  
 
머릿속이 복잡할 때는 꼼꼼하게 바느질해야 하는 전통자수가 제격이다. 바늘땀 하나하나에 집중하지 않으면, 절대로 모양이 그려지지 않으니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다. 그렇게 허허롭기만 한 마음을 붙잡기 위해, 여러 날 수틀에 코를 박고 있었더랬다.
 
그래서 그 베갯모는 내게 너무 특별했다. 나는 완성된 베갯모를 여러 해 동안 서랍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 자수에 눈물 자국은 없다. 그러나 수를 놓으며, 마음속으로 울고, 또 울었다. 나는 당시 내 상처와 서러움으로 그 수를 놓았었다. 그래서 그 자수를 볼 때마다 항상 마음속 깊숙이 북받치는 슬픔을 거둘 수가 없었다.
 
당시, 부모님은 내게 함께 살 것을 권하셨다. 어머니는 “시집가기 전처럼, 그렇게 살자!”하셨다. 그 제안에 나 또한 그러겠노라고 흔쾌히 대답했지만, 부모님과 동생들이 있는 집에서는 울 곳이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소리 내어 엉엉 울기라도 했으면 속이 시원할 것 같았지만, 울 수가 없었다. 숨죽여 울 곳조차 없었다.
 
나는 유학을 떠나면서, “아버지 베개 만들어 드리세요!”하며, 어머니께 그 베갯모를 드렸다. 그러나 유학에서 돌아온 뒤, 집안 어디에서도 내가 수놓은 베개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나는 너무 궁금한 나머지 어머니께 여쭈었다.
 
“내가 아버지 만들어드리라고 한 베갯모는 어떻게 했어요?”
 
어머니는 내 물음에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네가 언제 그런 걸 주었냐”며,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표정을 지으셨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내가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했던 건데, 어머니는 전혀 기억을 못하고 계셨다.
 
그 자수의 행방은 미궁에 빠졌고, 나도 그 존재에 대한 궁금증을 버려야겠다고 마음먹은 한참 뒤, 어느 날 평소 뭐든지 간직하길 잘하는 한 여동생이 그녀의 집을 방문한 가족들 앞에서,
 
“언니! 생각나? 언니가 나 준 베갯모!”
하며, 내가 어머니께 드린 베갯모를 내놓는 것이었다.
 
“이게, 왜 여기 있니?”
“언니가 나 시집갈 때 쓰라고 줬잖아!”
“......?”
 
여전히 미혼인 여동생은 아직 베개를 만들지 않은 상태 그대로, 그것을 간직하고 있었다. 동생이 보관을 어찌나 잘 해왔던지, 수틀에 고정시키기 위해 내가 가장자리에 덧댔던 천을 떼지도 않은 상태 그대로였다. 게다가 빛바랜 구석 하나 없이 새 것 같았다. 20년이 다 되어간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깨끗한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어이가 없었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수를 놓았는지 알 길이 없는 동생과 어머니께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아마도 어머니는 내가 아버지께 만들어 드리라고 한 것을, 내가 이러저러하게 하라더라는 말까지 마음대로 보태며, 여동생에게 주었던 것 같다. 그래서 동생은 내가 그 자수를 자기에게 주었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날도 그 여동생은 내가 항상 예쁘고 귀한 건 자기를 준다는 걸 모인 사람들에게 증명해 보이기 위해, 바로 그 베갯모 자수를 들고 나왔다. 내가 귀한 걸 아무리 그녀에게 잘 주어도, 이 베갯모를, 그것도 결혼할 때 쓰라고 주었을 리 없었다. 그건, 그렇게 동생에게 줄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에게, 특히 어머니께 내가 어떤 마음으로 그 수를 놓았는지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으니, 그들이 내 마음을 알 턱이 없다. 그날, 결국 동생의 베갯모를 사진에 담아오는 것에 만족하고 돌아온 뒤에도, 난 한동안 동생에게 그것을 준 어머니를 원망했고, 가끔씩 화가 나곤 했다. 그래서 뜨개질을 하다가 문득 수를 놓았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다시금 화가 끌어 올랐던 것이다.
 
하지만 내 곁을 떠난 물건이다. 어머니께 드린 바로 그 순간, 내 손을 떠난 물건이었다. 그리고 어떤 물건에 특별한 의미를 붙이는 것도, 이제 그만 하는 것이 좋겠다. 그저, 뭐든 잘 간직하는 동생에게 그것이 간 것만도 행운이라고 생각해야겠다. 여전히 수놓은 그때, 그대로 잘 간직하고 있는 건, 바로 그 동생이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니 말이다. 여전히 나는 그 베갯모를 수놓았던 당시의 기억을, 마음속에 잘 간직하고 있으니 말이다. 

윤하 / 미디어 <일다> 즐겨찾기!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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