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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윤하의 딸을 만나러 가는 길 (31) 내가, 선택한 아이
[연재 소개] 이혼을 하면서 두고 온 딸은 그녀에게는 늘 어떤 이유였다. 떠나야 할 이유, 돌아와야 할 이유, 살아야 할 이유……. 그녀는 늘 말한다. 딸에게 하지 못한 말이 너무 많다고. <딸을 만나러 가는 길>은 딸에게 뿐만 아니라 이 땅의 여성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윤하의 고백이 될 것이다. <일다> www.ildaro.com
언제부터였을까? 겨울, 눈이 내릴 때마다 마음속 깊숙이 슬픔이 차오르게 된 것이. 벌써 20년이 넘었다. 왜, 아직도 눈은, 또 그날의 기억은 여전히 차갑게 발목을 휘감는 걸까? 그날 아침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이를 낳기로 서로 합의하고, 결혼을 계획한 것은 6개월 전의 일이었다. 그렇게 결혼식을 꼭 보름 남겨둔 어느 날, 남편 될 사람은 아이를 낳지 말자고 나를 설득했다. 그러나 난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더 전에, 몇 개월 더 전에 이런 제안을 했다면 동의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당시 내게 임신중절은 배속에서 이미 6개월이나 자라 거침없이 태동을 하며, 살아있음을 온 몸으로 전하고 있는 아이를 죽이는 것을 의미했다.
임신이 도대체 무엇인지 채 실감을 못하다 4개월에 접어들어 처음으로 태동을 느꼈을 때의 놀라움과 경이감은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그때서야 비로소 내 몸 속에 생명체가 자라고 있다 걸 실감하게 되었다. 처음 꼬물꼬물 움직이기 시작한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움직임이 커가고 그 횟수도 늘어만 갔다. 그런 아기를 죽일 수가 없었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살아있는 아이를 죽일 수는 없다고 눈물로 매달렸지만, 전남편의 부담도 만만치는 않았던 것 같다.
그동안 한 번도 출산과 관련된 마음의 부담을 표현하지 않았던 전남편이 뒤늦게라도 용기를 내어 솔직한 심경을 표현한 것이다. 그는 결혼은 예정대로 하고 싶지만, 아이 낳는 건 부담스러우니 출산만은 좀 미루자고 했다. 나는 그런 그를 설득하지도 못했고, 더 붙잡지도 못했다. 그저 밤새도록 울었다. 그렇게 꼬박 밤을 새고, 나는 모든 걸 포기하고 남편의 손에 이끌려 산부인과를 가기 위해, 이른 아침 그의 자취방을 나왔다.
집을 나왔을 때 거리에는 밤새 내린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고, 여전히 주먹만 한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소리 없이 눈물처럼 떨어지는 눈 속을 나서는데, 전남편은 다정하게 눈을 맞지 않도록 내게 우산을 받쳐주었다.
‘아이를 죽이러 가면서 그까짓 눈이 뭐라고, 우산을 받칠까?’
난 그의 이런 모습을 위선적이라고 생각하며, 잠시 진저리를 쳤다. 임신중절을 하고 나면, 그와 결혼도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건 그가 우산을 받쳐준, 바로 그때였다. 이런 사람과 결혼은 하지 않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며 병원을 들어섰다.
현재, 임신 6개월째이고 임신중절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내게 의사는 말했다.
“너무 아이가 커서 한 번에 수술은 할 수 없습니다. 오늘은 주사만 맞고 돌아간 다음, 며칠 뒤 조각을 내어 꺼낼 겁니다.”
의사는 별 표정 없이 담담하게 말했지만, 난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주사약으로 태아를 죽이고, 그런 다음 아이를 조각낸다고!’
순간, 그건 절대로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의사에게 주저하지 않고 부탁했다.
“전 아이를 지울 생각이 없어요. 밖에 애기 아빠 될 사람이 함께 왔습니다. 지금 아이를 유산시키는 것은 힘들다고 말해 주세요.”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아이가 6개월이나 돼서 중절 수술은 너무 복잡합니다. 한 번에 되지도 않고. 태아를 조각내어 끄집어내야 하는데, 그건 산모에게도 위험합니다. 비용도 너무 많이 들고......”
아이를 조각내서 끄집어낼 거란 말에도 표정의 변화가 없던 남편은,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말에 체념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은 내게 깊은 상처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의사에게 이런 부탁을 할 생각이 어떻게 났는지 신기할 뿐이었다. 그때는 그저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생각 외에 다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 순간 난 모든 걸 포기했다. 불행할 것이 뻔한 결혼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당시, 나는 아이를 핑계로 남자를 붙잡은 사람이 되고 말았지만, 미혼모가 된다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아니, 그런 상상을 할 수 있었더라도, 미혼모로 아이를 낳는 선택을 할 만한 용기는 절대로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결혼을 했다. 그런 만큼, 우리의 결혼은 파국으로 빠르게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다.
그날 내린 눈 때문에 그 후로 눈이 올 때마다 그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눈은 늘 마음을 슬픔으로 채웠다. 그러나 20년의 세월이 지나서야 슬퍼할 일이 아니라는 걸 생각해냈다. 나는 기억해냈다. 아이를 낳은 걸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부터 눈이 내리면, 옛날처럼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눈이 올 때마다 그날의 내 선택을 축하해야겠다. 그날, 바로 내가 선택한 아이! 임신이 무엇인지, 아이가 무엇인지 채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던 내게, 비로소 그날 내 가슴 속으로 차박차박 걸어 들어온 아이! 아이는 내가 지킨, 최초의 무엇이었다. 지금은 눈을 기다린다.
윤하 / 미디어 <일다> www.ildaro.com
[연재 소개] 이혼을 하면서 두고 온 딸은 그녀에게는 늘 어떤 이유였다. 떠나야 할 이유, 돌아와야 할 이유, 살아야 할 이유……. 그녀는 늘 말한다. 딸에게 하지 못한 말이 너무 많다고. <딸을 만나러 가는 길>은 딸에게 뿐만 아니라 이 땅의 여성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윤하의 고백이 될 것이다. <일다> www.ildaro.com
언제부터였을까? 겨울, 눈이 내릴 때마다 마음속 깊숙이 슬픔이 차오르게 된 것이. 벌써 20년이 넘었다. 왜, 아직도 눈은, 또 그날의 기억은 여전히 차갑게 발목을 휘감는 걸까? 그날 아침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이를 낳기로 서로 합의하고, 결혼을 계획한 것은 6개월 전의 일이었다. 그렇게 결혼식을 꼭 보름 남겨둔 어느 날, 남편 될 사람은 아이를 낳지 말자고 나를 설득했다. 그러나 난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더 전에, 몇 개월 더 전에 이런 제안을 했다면 동의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당시 내게 임신중절은 배속에서 이미 6개월이나 자라 거침없이 태동을 하며, 살아있음을 온 몸으로 전하고 있는 아이를 죽이는 것을 의미했다.
임신이 도대체 무엇인지 채 실감을 못하다 4개월에 접어들어 처음으로 태동을 느꼈을 때의 놀라움과 경이감은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그때서야 비로소 내 몸 속에 생명체가 자라고 있다 걸 실감하게 되었다. 처음 꼬물꼬물 움직이기 시작한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움직임이 커가고 그 횟수도 늘어만 갔다. 그런 아기를 죽일 수가 없었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살아있는 아이를 죽일 수는 없다고 눈물로 매달렸지만, 전남편의 부담도 만만치는 않았던 것 같다.
그동안 한 번도 출산과 관련된 마음의 부담을 표현하지 않았던 전남편이 뒤늦게라도 용기를 내어 솔직한 심경을 표현한 것이다. 그는 결혼은 예정대로 하고 싶지만, 아이 낳는 건 부담스러우니 출산만은 좀 미루자고 했다. 나는 그런 그를 설득하지도 못했고, 더 붙잡지도 못했다. 그저 밤새도록 울었다. 그렇게 꼬박 밤을 새고, 나는 모든 걸 포기하고 남편의 손에 이끌려 산부인과를 가기 위해, 이른 아침 그의 자취방을 나왔다.
집을 나왔을 때 거리에는 밤새 내린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고, 여전히 주먹만 한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소리 없이 눈물처럼 떨어지는 눈 속을 나서는데, 전남편은 다정하게 눈을 맞지 않도록 내게 우산을 받쳐주었다.
‘아이를 죽이러 가면서 그까짓 눈이 뭐라고, 우산을 받칠까?’
난 그의 이런 모습을 위선적이라고 생각하며, 잠시 진저리를 쳤다. 임신중절을 하고 나면, 그와 결혼도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건 그가 우산을 받쳐준, 바로 그때였다. 이런 사람과 결혼은 하지 않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며 병원을 들어섰다.
현재, 임신 6개월째이고 임신중절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내게 의사는 말했다.
“너무 아이가 커서 한 번에 수술은 할 수 없습니다. 오늘은 주사만 맞고 돌아간 다음, 며칠 뒤 조각을 내어 꺼낼 겁니다.”
의사는 별 표정 없이 담담하게 말했지만, 난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주사약으로 태아를 죽이고, 그런 다음 아이를 조각낸다고!’
순간, 그건 절대로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의사에게 주저하지 않고 부탁했다.
“전 아이를 지울 생각이 없어요. 밖에 애기 아빠 될 사람이 함께 왔습니다. 지금 아이를 유산시키는 것은 힘들다고 말해 주세요.”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아이가 6개월이나 돼서 중절 수술은 너무 복잡합니다. 한 번에 되지도 않고. 태아를 조각내어 끄집어내야 하는데, 그건 산모에게도 위험합니다. 비용도 너무 많이 들고......”
아이를 조각내서 끄집어낼 거란 말에도 표정의 변화가 없던 남편은,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말에 체념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은 내게 깊은 상처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의사에게 이런 부탁을 할 생각이 어떻게 났는지 신기할 뿐이었다. 그때는 그저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생각 외에 다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 순간 난 모든 걸 포기했다. 불행할 것이 뻔한 결혼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당시, 나는 아이를 핑계로 남자를 붙잡은 사람이 되고 말았지만, 미혼모가 된다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아니, 그런 상상을 할 수 있었더라도, 미혼모로 아이를 낳는 선택을 할 만한 용기는 절대로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결혼을 했다. 그런 만큼, 우리의 결혼은 파국으로 빠르게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다.
그날 내린 눈 때문에 그 후로 눈이 올 때마다 그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눈은 늘 마음을 슬픔으로 채웠다. 그러나 20년의 세월이 지나서야 슬퍼할 일이 아니라는 걸 생각해냈다. 나는 기억해냈다. 아이를 낳은 걸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부터 눈이 내리면, 옛날처럼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눈이 올 때마다 그날의 내 선택을 축하해야겠다. 그날, 바로 내가 선택한 아이! 임신이 무엇인지, 아이가 무엇인지 채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던 내게, 비로소 그날 내 가슴 속으로 차박차박 걸어 들어온 아이! 아이는 내가 지킨, 최초의 무엇이었다. 지금은 눈을 기다린다.
윤하 / 미디어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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