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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쫄지 않는’ 방법을 알려 준 내 친구야
고윤정의 멘토 찾기(6) 나를 믿어 준 친구 구하늘 
 
우리 인생에는 멘토가 필요하다! “고윤정의 멘토 찾기”의 필자 고윤정님은 부산에서 9년간 교육복지사로 일해 오고 있는 30대 여성입니다. 대학시절 여성주의에 눈 뜨며 멋진 페미니스트 친구들과 만나게 되었고, 졸업 후 지역공동체운동을 하며 ‘나의 삶과 세상이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모색 중입니다. 그녀의 멘토 이야기를 통해,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여성들의 다양한 모습과 끈끈한 연대가 우리 삶에 귀감이 될 것입니다. - [일다] 편집부
 
스무살 무렵 만난 너
 
두 달 전쯤, 그러니까 10월 22일 비오는 토요일 오후 부산시 온천천 야외 굴다리 밑에서 비롤 쫄딱 맞으며 결혼식이라는 걸 했다. 문화적 감수성이 풍부하신 부모님 덕분에 적당히 타협한 선에서 시끌벅적한 축하의식은 막을 내렸고 지금은 비교적 향기 좋은 깨를 볶으면서 지내고 있다.
 
결혼이 인생에서 꼭 거쳐야만 하는 통과의례가 아니며 사회적으로 확인 도장을 받아야 할 필요는 더욱 없다. 함께 한다는 것. 그 깊고도 오묘한 삶의 긴 시간에서 친구와 짝꿍과 동무와 벗을 만나는 과정이 결혼이라고 나름 정의내리고 있다.
  
▲ 스무살 무렵 만난 씩씩한 내 친구 하늘이.     

 
나는 함께 해 줄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조금은 안다. 내 친구 구하늘. 하늘아 나 가끔씩 길을 걷다가도 문득 너에게 참 고맙다는 생각을 한단다. 20대를 갓 넘긴 그때 너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어땠을까?
 
키티 머리띠에 흰 힙합 바지와 분홍색 하트를 좋아하며 까르르 웃어대기를 잘 했던 나의 스무 살. 고등학교 때 인물과 사상을 즐겨 봤다는 것 외에는 사회 정치적 이슈에 큰 관심도 없었으며 돈 잘 버는 좋은 남자 만나 결혼하는 것이 최대 관심사였다. 몇 가지 소소한 사건에 욱해서 학보사에 들어갔지만 반쯤은 ‘여기자’ 하면 떠올리는 멋진 폼 새가 탐나서이기도 했다.
 
내 학보사 동기인 하늘이는 나와 반대로 맨얼굴에 티셔츠 하나 걸치는 패션 테러리스트였으며 학생회 활동 및 각종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예쁘장한 얼굴에 비해 말투는 거칠어 ‘시골 심은하’라는 은혜로운 별명도 갖고 있다. “야, 오늘 데모 안 나가면 니 양심 썩을 끼다”라며 동기들을 반쯤(?) 협박 했던 씩씩한 내 친구.
 
대학 성폭력 사건의 기억 “나는 너를 믿는다”
 
지금은 그 때 일을 떠올려도 눈물이 나지 않는다. 그냥 그때 참 많이 아팠다는 통증만이 미약하게 전해진다. 올해 큰 이슈가 되었던 ‘고대 성추행 사건’ 같은 일이 내게도 있었다. 수차례 성추행과 음담패설을 해댔던 남학생 때문에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만큼 마음고생이 심각했었다. 하루는 내 생일이라며 음란물 선물을 보내온 남학생 때문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밤늦게 내 친구 하늘이에게 울면서 전화를 했다. 사실 나와 그녀가 그렇게 절친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난 왜 그날 그녀에게 전화를 했을까.
 
그녀와 이야기 하면서 그 남학생이 제대로 처벌 받고 정식으로 나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 싶었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고 나라는 사람이 그렇게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 받고 싶어 피해 사실을 공식화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면서 힘든 일이 많았다. 견디기 힘들어 내가 이유 없이 소리를 질러대거나 의기소침해질때마 하늘이는 내게 “믿는다”고 말해주었다. “믿는다”라는 말이 얼마나 큰 힘을 가지는지 그때 처음 느꼈다. 누군가 나를 믿어 준다는 것. 지치고 상처 받았을 때 다독거리는 것 보다 안아준다는 것보다 믿어 준다는 것이 가장 큰 위로이자 상처치료제가 되었다.
 
나는 한국 사회에서 성폭력 피해자들이 사건을 공개하는 어려움이 어떤 것인지 안다. ‘진실 조사’라는 명목 아래 수차례 진술을 반복해야 하는 것은 물론, 내 앞에서 며칠 전까지 나와 웃고 떠들던 이들이 나란 사람이 얼마나 정직한지 아닌지 공개 토론 해대는 걸 보아야 한다. 주로 내가 들었던 진실 추궁은 ‘왜 추행에 즉각 대응을 하지 않았는가’와 ‘서로 좋아 했던 것이 아닌가’였다. 내 옷차림, 관심사, 웃음소리까지 논의 대상이 되었다.
 
지금도 여론 공세나 시민단체의 항의가 거세지 않고서는 대학 스스로 적극적인 성폭력 대책을 내 놓지 못한다. 하물며 내가 대학을 다녔던 90년대 말은 성폭력 학칙 자체도 제정되지 못한 경우가 허다했으며, 경찰 및 심의 관계자의 2차 성폭력 제재는 더욱 어려웠다. 사회적 인식 또한 성숙되지 못해서 내 사건은 대학 자유게시판에서 공개적으로 난상 토론이 벌어질 정도였다. 처벌 수위에 대한 토론이 아니라 내가 꽃뱀인지, 쌍방 잘못인지, 처벌이 필요한지가 관심 거리였으니 지금 생각해도 그때를 견뎌낸 내가 참 대단하다.
 
동무를 만들어 주는 사람
 

▲ 경기도 과천의 대안학교 <물이랑 작은 학교> 여는 잔치에서. 왼쪽이 하늘이.   

 
살면서 별의 별 욕을 그 때 다 들어봤다. 공개 사과 및 학칙 처벌을 요구 한 것 때문에 욕설도 듣고, 서류 더미로 맞아도 봤다. 동문 이름 더럽힌다고 나가라는 소리도 듣고 학칙 심사를 담당했던 학생과장에게는 행실이 나빠서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 남학생의 친인척은 면면이 화려하고 부유한 반면 뭣도 없는 내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 주는 경우가 희박했다. 문제는 욕설을 들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낮아져만 가는 내 자존감이었다. 무능함, 무력함, 무지함을 느끼면서 위축되고 우울해졌다.
 
그럴 때 내 친구 하늘이는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들어줬다. 여학생회를 소개 시켜주고 성폭력 상담소에 도움을 받게 해줬다. 격려 하는 대학 선배들을 모이게 하고 힘이 되는 친구들을 만들어 주었다. 그때 여성주의와의 만남이 처음 시작되었다. 든든한 친구들이 있다는 것을 그녀는 나에게 매번 확인시켜주고 위축되지 않고 당당해질 수 있도록 도왔다.
 
쫄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힘이 없으면 힘을 합치면 된다는 것. 그 힘을 그녀는 나에게 선물하고 보여줬다.
 
길을 가다가도 노동자 해고나 불합리한 상황에 대해 피켓 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을 보면 꼭 서명을 하고 지지를 했던 친구. 하늘이는 꼭 억울한 상황이 생기면 눈을 크게 뜨고 책상을 퉁 치면서 "지가 뭔데!"라고 소리치며 함께 했던 친구다.
 
그 모습에 나도 용기 받고 같이 '쫄지마'를 외쳤지. 그녀는 해결사가 아니라 동력자였다. 내가 처해 있는 어려움을 대신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동력을 받아 스스로 극복하게끔 도와주는 사람. 그 덕에 나도 참 많이 성장했다.
 
생활 운동 얼리어답터
 
그러고 보면 그녀에게 영향 받은 것이 참 많다. 교육 문제는 크게 관심도 없던 나였는데 열혈 사범대생 이었던 그녀 덕분에 나는 교육계에서 근무하고 있다. 귀농이며 환경에 대한 관심도 그녀로부터 출발했다. 공동육아라는 말도, 글쓰기 운동이라는 것도 그녀 입에서 처음 들었다. 대안 학교가 활발해지기 이전부터 대안 학교 운동을 했다. 가끔씩 보거나 연락 할 때마다 유기농 재료나 좋은 육아방법을 이야기 해준다. 아마 그녀가 장흥이 아니라 부산에 살았다면 못해도 아파트 부녀회장이나 역량 있는 활동가가 되었을 것이다.
 
비오는 날 끝내 야외를 고집하며 굴다리 밑에서 주례도 피아노 반주도 없이 웃으면서 끝난 내 결혼식도 사실 그녀의 결혼을 많이 차용했다. 하늘이는 7시간이나 걸려 경기도 파주의 작은 성당과 성당 마당에서 열린 야외 결혼식에 하얀 웨딩드레스보다 친지가 직접 만든 분홍색 한복을 입고 결혼을 했다. 야외에서 폐백을 했고 마을 잔치처럼 결혼식이 진행되었다.
 
당시 나에겐 수능 점수가 꽤 높은 국립대 사범대학을 졸업한 내 친구가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안학교 교사 길로 나갔던 것이 대단한 일로 여겨졌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신학도의 길을 포기하고 대안학교에서 시 쓰는 가난한(?) 남편과 결혼을 쉽게 결정한 점이었다. 그것도 27살 꽃띠에.
 
지금이야 나 역시 '행복'을 고민하며 중요한 삶의 결정을 하려 노력하고 있지만 27살에는 '난 왜 이것 밖에 못 버는가'에 자책했으니 그녀의 선택은 당연히 놀라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딱히 연고도 없는 전라도 장흥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여기서 황토 염색도 하고, 농사도 짓고 아이고 많이 낳을 거야"랬다.
 
"진짜 귀농은 통장 잔고 0원이 될 때부터"
 
▲ '옳은 것은 언제나 옳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세상으로 함께 가는 거야'   

 
하늘이는 그다지 유복한 집 딸이 아니었다. 대학 등록금 마련한다고 고생이 많았고 집안  일도 신경 써야 했다. 앞길 훤한 교사 일을 접고 산골로 들어간 그녀가 대단하면서도 걱정이 되어서 결혼하고 3년 후인 2008년도에 장흥에 간 적이 있다.
 
"안 두렵나" 물었더니 "두렵지. 막상 부딪히니까 머리에 그렸던 그런 농촌은 아니더라"랬다. 동네 할머니들은 시시콜콜 소문을 만들어 내고 집은 춥고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많지 않다고 했다.
 
"돈은?"

하늘이는 "당연히 걱정이지. 진짜 귀농은 통장 잔고에 0이 찍혔을 때부터다"라며 웃었다. 폼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돈이 없어서 버려진 집에 살던 이야기, 아이 낳고 100일도 안되어서 집을 옮겨야 했고 먹을 것이 없어서 홍시를 실컷 땄다는 이야기도 했다.
 
진짜를 경험해야 자기 것이 된다고 했다. 농촌에 대한 환상보다는 자기 삶의 방향을 고민하면서 몸으로 부딪쳐야 된다고 했다. 하늘이네 가족은 장흥에 와서 집짓기 공사도 해보고 남의 집 과수원 아르바이트도 하고 매미 껍질이 가득한 방을 수차례 쓸어 내면서 농촌에 계속 살 것인지 결정했다고 했다.
 
그날 밤 장흥에서의 고군분투를 들으며 마당에 돗자리 깔고 앉아 한우와 맥주를 많이도 먹었다. 부산으로 올 때 그녀가 준 매실 엑기스를 가득 받아 들고 차를 탔는데 괜히 고맙다는 말보다 눈물이 찔끔 났다. 대학 때 그녀가 결혼을 하면 꼭 내가 냉장고를 사준다고 했는데 그녀는 감자며 매실이며 가득 담아줬다. 내가 고작 준거라고는 몇 만원 안 되는 축의금뿐이었다.
 
그녀에게 예전 사진을 메일로 받고 보니 그녀의 메일 서명에 이런 글귀가 있다. '옳은 것은 언제나 옳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세상으로 함께 가는 거야'.
 
넌 예전에도 지금도 너무 매력적인 것 같다. 내 결혼식 전에 너 생각이 많이 나더라. 전생에 내가 너 동생이었는가 보다. 하하. 못해준 냉장고 대신 효인이(하늘이 큰 아들) 학교 들어가면 옷이랑 가방이랑 꼭 내가 사주고 싶다. 너 때문에 나 참 씩씩해졌다오. 고맙다 친구야.

고윤정 / 미디어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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