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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고윤정의 멘토 찾기(4)
부산 인문학공간 '카페 헤세이티' 운영자 변정희 

 

아랫배가 살살 아린 것이 달거리가 시작되려나 보다. 쌉쌀한 쑥차가 급 당겨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오늘 헤세이티에 있어?” “응, 쑥차 있어. 와”
 
내 친구 변정희. 그녀가 ‘카페 헤세이티’에 실무 주체로 활동한지 1년이 다되어 간다. 맛난 보신용 차와 좋은 강연들이 이어지는 인문학 카페에 내 친구가 있다는 것이 더 없이 멋져 응원 하고 있다. 하지만 1년 전 그녀가 카페일을 시작하겠다고 했을 때는 사실 ‘어쩌자고 저러나’하는 심정이었다.
 
멀쩡히 잘 다니고 있는 직장을, 그것도 특별한 불만도 없다는 직장을 그만두고 지인들과 카페를 만들겠다는 것도 모험처럼 보였다. 더구나 원래부터 바리스타를 꿈꿔왔던 것도 아니고, 좋은 마실 거리를 팔아 돈을 벌겠다는 목적도 아닌 ‘인문학 공부’라니.
 
“망하면 어쩌려고?”
“그러게.”
 
절대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도, 망해도 어쩔 수 없다는 의연한 자세도 아닌 답. 애초부터 자본주의 사회에서 통용되는 ‘망하고 망하지 않는 것’의 의미나 경계선이 그녀의 뇌구조에 5%라도 차지하고 있나 싶다. 그냥 좋은 사람들과 함께 공부하고 인문학 공부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예쁜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이 카페로 이어진 것이다.
 
뭐가 되기보다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하기

2009년 대학 때 함께 여성주의 활동을 했던 친구들과 떠난 '자유녀성캠프' 때 정희 모습.
 
2009년, 대학 때 만나 여성주의 활동을 함께했던 친구 8명과 남해로 ‘자유녀성 일상탈출 캠프’를 떠난 적이 있다. 졸업 후엔 뿔뿔이 흩어지기 마련인데 유난히 멤버십이 강했던 우리는 일상에 지칠만하면 한번 씩 이렇게 요상한 이름을 붙인 만남을 가졌다. 그리고는 맥주 1박스씩 비워대며 정말 신나게 놀았다.
 
그날 밤 바깥바람도 쐴 겸 그녀와 달빛 데이트를 하며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 때 나눴던 대화들이 살면서 종종 떠올려 질 때가 있다.
 
“정희야 뭐하고 싶어?”
“나, 뭐 그런 거 특별히 없는데. 그냥 도시는 아닌 것 같아서 귀농을 준비하는데 쉽지는 않겠지.”
 
나중에 뭐가 될래? 라는 질문은 유년기 때만 듣는 것이 아니다. 대학 졸업 후에도 언제쯤 뭐가 되고, 언제쯤 어떻게 되어 있을 것인가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준비하기를 강요받는다.
 
‘슈퍼스타 K’나 유사 오디션 프로그램들을 볼 때마다 모두들 ‘꿈’을 이야기 한다. 학교에서는 boys be ambitious!!(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라며 외치고, 사회에서도 어떤 위치로써 꿈과 비전을 가지라고 말한다. 어떤 삶을 보낼 것인가 하는 바람은 황혼의 몫이고, 무엇이 되기 위한 꿈은 청년의 상징이라고 한다.
 
나라고 예외는 아니다. 20대에 뭘 하고, 30대에는 또 뭘 해야 한다는 세간의 룰에 의연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학교사회복지사가 될 거야~”라고 했지만 막상 되고 나니 꿈이 없어진 듯 느꼈다. 뭔가를 이루기 위해 나를 다그쳐야 하는데 손 놓고 있는 듯 해 불안했다.
 
그런데 내 친구 정희에게는 한 번도 ‘뭐가 되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적이 없다. 정희는 늘 ‘어떻게 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할 뿐이다. “좋은 사람들이랑 생각을 나누며 지내고 싶어”, “적게 쓰고 싶어”, “인문학이 삶에서 실천되면 좋은데”라는 바람들이다. 그렇게 그녀는 나에게 어떤 위치나 직업이 아닌 ‘삶을 사는 방식’에 관한 생각을 천천히 그리고 촉촉이 젖게 하는 가랑비다.
 
어울려 노는 즐거움을 배우다

▲ 한 손에 술잔을 들고 반달눈이 되어 노래하는 모습. 딱 정희다.     
 
그녀를 보면서 가장 예쁘다고 느낄 때는 “와~” 하면서 손바닥을 다다닥 치고는 반달눈이 되도록 웃을 때다. 그리고 이 모습이 가장 많이 보이는 순간은 그녀가 사람들과 어울려 노래를 흥얼거릴 때이다.
 
이제 서른을 갓 넘긴 나이인데도 민중가요들을 줄줄이 꿰고 있으며, 김민기․양희은 세대의 명곡들은 그녀의 애창곡이다. 노래패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어떻게 다 아냐고 물으면 그냥 ‘좋아서’ 불렀단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참 잘 논다. 여행 가서는 백세주에 빨대 꼽아 쭉 마시고는 자기 전까지 사람들에게 노래를 불러줬다. 친구들 결혼식 축가도 잘 불러주고, 여성단체 단합대회에서는 손담비의 ‘미쳤어’를 미치게 잘 추기도 했다. 최근에는 과거 밴드 출신 언니들이 운영하는 공간에서 기타를 치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고 그녀가 음악적 재능이 대단히 뛰어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즐거움의 감수성은 누구보다 높다.
 
늦도록 술을 퍼마시는 거나, 공연장을 꼭 가야지 즐겁게 노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사회생활을 하고 나서는 노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다. 주말에 하는 여가 활동은 쉬는 것을 포기하고 짬을 내야 하는 것 같아 더 어렵다. 그런데 그녀는 직장생활을 할 때나 지금이나 시종일관 잘 논다.
 
그녀에게 노는 것은 어울림 자체이다. 외향적이거나 사교적인 성향은 아니지만 만나는 사람들과 의미 있게 교류하며 관계 맺기를 즐거워한다.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격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교류를 맺는 방식이 대게 어울려 함께 놀면서 이루어진다. 좋은 차를 마시면서, 글귀를 읽으면서, 노래를 부르면서, 시를 나누면서.
 
작년 말에 강원도 여행을 가는데 그녀에게서 문자가 왔다. ‘오늘 아침 그르니에 산문집에 파리로 돌아갈 차비도 없이 베니스 여행을 하던 날들을 인생의 행복한 순간중 하나로 회상한 글을 읽었어. 너는 여행과 잘 어울리는 조합인 것 같아. 즐거운 여행되길 바란다.’ 라고.
 
그녀가 나에게 보내준 시에서는 그녀가 떠오른다.

강물에 빠진 달을 보러 가듯

                                - 고정희
 
강물에 빠진 달을 보러 가듯
새벽에 당신 사는 집으로 갑니다.
깨끗한 바람에 옷깃을 부풀리며
고개를 수그러뜨리고 말없이 걷는 동안 나는 생각 합니다.
어제 부친 편지는 잘 도착되었을까
             (중략)
품속에 간직한 초설 같은 편지 한 장
문틈에 꽂아놓고 하늘을 봅니다.

깨끗한 바람에 사뿐히 걸어가서는 인기척 없어도 초설 같은 편지 한 장 꽂아놓고 분명 즐거워 할 내 친구 정희다. 좋은 노래, 글귀, 시를 나누는 것이 노는 것이고 즐거움인 그녀와 그 틈에 즐거워하는 나. 나는 그녀에게서 ‘꼭 시간을 내어야 하는 여가로서의 놀이’가 아닌 ‘일상에서 소통과 관계 맺음의 노는 것’을 배우는 것 같다.
 
말씨 귀히 여기는 그녀, ‘하다’를 선물하다
 
그녀 소개로 김영민 교수의 인문학 강좌를 들으러 간 적이 있다. 그 중에 ‘말은 몸이다’라고 했던 내용이 유난히 기억에 남았다.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한 시대이다. 외국어가 재산이고 발표는 곧 능력이다. 그런데 다치지 않게 말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 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간혹 그녀의 말씨를 듣고 있자면 통상적으로 잘 쓰지 않는 언어들을 구사하거나 새로운 의미 부여를 잘한다. 처음은 그녀의 말씨가 어렵다고 느끼기도 했지만 곱씹으면 씹을수록 은은한 향기가 풍긴다. “말이 곧 몸이거든. 나쁜 말을 들으면 몸이 아프지 않나.” 라는 지론이다.
 
나의 예명인 ‘하다’도 더 씩씩하고 멋져지라며 ‘씩씩하다, 상큼하다’의 하다로 그녀가 새롭게 명명해주었다. 그래서인지 하다로 불리면 더 크게 웃고 밝고 예술적이게 변모하는 것 같다. 사진가로 활동할 때는 오묘하다로, 글을 쓸 때는 솔직하다가 된다.
 
한번은 그녀에게 누군가 머리가 크다고 재미삼아 한 말에 아주 예민해진 한 친구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외모를 두고 유머삼아 말하는 것은 유머가 아니라 아주 나쁜 거야”라고 말했다. 정희는 끈질기게 토론을 이어가더라도 상대의 말을 막아서거나, 누구를 비난하지도 않는다. 아, 간혹 술 마시다가 같은 말 반복 강조하는 주사는 예외다.
 
욕심 없이 내어주니 채워도 주더라 

▲ 2010년 <실천하는 인문학>에 대해 강의 중인 정희.  
 
누구든 그녀를 만나고서 불편했다거나 부담된다거나 하는 인상을 받지 않는다. 오히려 순하고 편해서 만만하게 보이는 것이 걱정일 정도다보니 누구든 쉽게 그녀를 찾고 만난다. 그래서 최근 그녀에게 붙여진 별명이 ‘인문 마담’이다. 썩 유쾌한 표현은 아니지만 인문학 카페에서 편안함을 주는 대표 얼굴이긴 분명하다.
 
“사람 많이 만나는 것이 안 힘드나”라고 물으면 “즐겁게 만나면 좋은데 어쩔 때는 감정 노동 하는 것 같기도 하다.”고 말한다. “그래도 좋은 사람들 만나면서 나누는 것이 좋다”랬다. 하기야 친한 과후배들이 통영에 모였다고 늦은 밤에 차로 달려가 새벽까지 이야기 하다 오는 그녀이니 얼마나 사람과 말을 아끼는지 알만하다.
 
정희에게 “만약 네가 빈 털털이가 되면 아마 친구나 주변 사람들이 무슨 방도라도 마련해 줄 것 같다”고 했더니 웃으며 동의 했다. 욕심이나 의도 없이 사람을 대하고 가지고 있는 것을 곧잘 꺼내어주는 그녀다 보니 그녀를 지켜봐주고 도와주는 사람들도 많다. 사회적 자본이니 인적 네트워크니 하는 것이 그렇게 맺어지니 끈끈하고 탄탄한가보다.
 
나도 그녀에게 받은 것이 꽤 있다. 좋은 시나 책도 있지만 마음과 몸이 맑아지고 싶을 때면 그녀에게 연락한다. 그녀와의 수다가 아픈 배를 달래주는 쑥차다. 연애며 사는 거며 이야기 나누다보면 멀리가지 않아도 초록 무성한 휴양림에 온 것 같이 느낄 때가 많다.
 
지금 자신은 바라는 대로 살고 있어서 당장 죽어도 아쉬운 게 없다고 자평 해 나를 기겁하게 만든 그녀. 집으로 돌아오며 문득 나는 어떻게 살면 죽어도 여한이 없는 정도일까 떠올려봤다.
 
정희씨. 나는 하고 싶은 거 실컷 더 하고 흥나게 놀고 싶으니, 부디 건강하게 오래 살아서 나에게 잘 노는 법 재미나게 사는 모습 꾸준히 많이 보여주시게나.  (고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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