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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찾아나선 미국의 흑인여성문학
[여성주의 저널 일다] 김윤은미

미국의 흑인, 그 가운데서도 여성의 이미지는 19세기까지 몇 가지로 고착되어 왔다. 그들은 인종차별과 성차별, 가족부양이라는 삼중고에 시달리며 살아왔다. 또한 백인남성집단에 의해 성적 대상으로 비춰져 왔다. 그래서 흑인여성과 백인남성 사이에 일어난 사건들은, 흑인여성에 대해 가부장적 지배를 하고 있는 흑인남성의 문제와, 흑인여성과 선뜻 연대할 수 없는 백인여성의 문제까지 결합하여 유난히 날카롭고 예민한 갈등을 부르곤 한다.

역설적으로 미국의 흑인여성들은 스스로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위해 부단히 애써 왔으리라는 점을 예견할 수 있다. 미국의 흑인여성문학은, 차별 받는 ‘타자’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찾아내고자 하는 커다란 줄기에서 수많은 가지들과 잎이 뻗어나간, 풍성한 숲인 것이다.

조라 닐 허스튼과 <그들의 눈은 신을…>

조라 닐 허스튼의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는 1970년대에 새롭게 발굴되기 시작한 미국의 흑인여성문학의 선두로 꼽히는 소설이다. 허스튼은 1920년대 뉴욕의 할렘을 중심으로 생겨난 문화운동 ‘할렘 르네상스’의 구성원이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뉴욕에는 흑인공동체가 생겨났다. 이들은 ‘새로운 흑인’(New Negro)을 표방하면서, 자신들 또한 백인 못지않은 문화적 감각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어 흑인이라는 인종에 자부심을 갖고자 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대안으로 내세울 만한 흑인의 이미지가 부재했다. 아프리카 전통문화는 미국으로 거의 전해지지 못했고, 이들은 백인들에 의해 규정된 ‘타자’로서만 살아왔던 것이다. 그래서 어떤 작가들은 ‘원시적이고 정열적인 흑인’의 이미지를 고스란히 수용하는가 하면, 다른 작가들은 신분상승을 꿈꾸는 ‘물질주의적 흑인’ 이미지를 내세우기도 했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 허스튼은 흑인의 민속전통이 남아있었던 남부 시골을 배경으로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를 썼다. 허스튼이 ‘할렘 르네상스’ 구성원인데다가 인류학자였던 만큼, 이 소설은 언뜻 보기에도 흑인의 전통적인 문화를 도드라지게 강조한다. 주인공 제니는 친구 피비에게 대화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한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구조를 통해 흑인들의 구전 전통을 나타내는 것이다. 제니가 속한 흑인공동체 사람들은 해질 무렵이 되면 마을의 한 장소에 모여, 말장난에 가까울 정도로 하릴없는 대화를 나누면서 고된 하루의 피로를 푼다.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에서 허스튼은 분명 흑인공동체의 매력을 전달하려 했다. 그러나 여성주인공 제니가 세 명의 남성을 통해 얼마나 주체적인 힘을 기르게 되는가가 더욱 뚜렷하게 전달된다. 제니는 세 번의 결혼을 통해 부단히 변화한다. 오히려 제니는 흑인들의 전통 속에서 제외된다. 제니가 자신의 자아를 찾아 나선, ‘개인주의’를 추구하는 여성이기 때문이다.

토니 모리슨과 <술라>

1970년대 이후 다수 발표된 흑인여성문학들은 흑인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차별의 복잡함을 면면히 파헤치는 주도 면밀함을 보인다. 그 대표적인 작가가 토니 모리슨이다. <술라>는 그의 두 번째 작품으로, 타자가 아니라 오롯이 그 자신으로 서기 위한 여성의 모험을 담고 있으되 그 모험이 결코 자기긍정적인 방향으로 흐를 수 없음을 암시한다.

<술라>는 1919년 흑인들이 살고 있는 언덕마을에서 시작된다. 술라는 지나칠 정도로 개방적인 가정에서 자라난다. 할머니 에마는 한쪽 다리를 스스로 잘라 보험금을 받아내고, 아들이 변을 보지 못하자 항문에 직접 손을 집어넣어 아들을 구할 정도로 집착적이고 강한 인물이다. 어머니 한나는 마을의 그 어떤 남자와도 자유분방하게 관계를 맺으면서 욕망에 충실하게 산다. 술라는 할머니가 두렵고 어머니가 싫다. 그러나 술라에게는 본받을 인물이 없다. 그에게는 오로지 자신 뿐이다.

술라와 넬이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을 위해 살기로 다짐하게 된 계기는, 이들이 어린 소년을 빙빙 돌리다가 호수에 빠트려 죽여 버린 사건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술라는 그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으며, 넬 또한 당황한 술라에 비해 침착함을 유지하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우월감을 느낀다. 이 같은 도덕적 무감은 특히 술라에게 강하게 나타난다. 10년 동안 마을을 떠났다가 돌아온 술라는 정신이 멀쩡한 할머니를 양로원에 보내고, 수많은 남성들과 단 한 번의 관계만을 가지면서 깊은 관계를 회피한다. ‘자아도, 초자아도 없다’고 스스로 고백하는 술라는, 급기야 친구 넬의 남편 주드와 관계를 맺어서 넬의 가정을 파괴한다.

<술라>는 억압된 상태에서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가운데 나타나는 자기중심적인 상태를 선명하고 때로는 비극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같은 자기중심성은, 술라와 넬만의 문제가 아니라 흑인공동체, 나아가 시대의 문제이기도 하다. <술라>의 처음 등장인물은 1차대전에 참전했다, 옆에서 뛰어가던 병사가 머리가 날라간 채 몸만 뛰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 정신병원을 거쳐 마을로 돌아오는 쉐드렉이다. 그는 주인공은 아니지만 시대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상징적인 인물이다. 쉐드렉은 광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국민 자살일’을 만들어 매년 행진한다. 자기 자신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거칠고 폭압적인 시대적 분위기가 그를 통해 제시되는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갑작스레 술라에 대한 그리움에 사로잡힌 넬은 “우린 둘 다 소녀였지.”라고 중얼거리며 깊은 슬픔에 잠긴 채 울음을 터트린다. ‘타자’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 그것은 사회적 차별을 받는 소수자의 위치가 지속되는 한 완성될 수 없는 지난한 과정일 것이다. 토니 모리슨은 술라와 넬에게 어떤 도덕적인 책임을 묻기보다는, 그들이 지나온 과정이 어떤 의미와 한계를 가지고 있는가를 보여주고자 했다.
 
‘백인행세하기’를 통해 파헤친 흑인정체성: 넬라 라슨의 <패싱>

패싱(passing)은 ‘백인과 유사한 신체적 특징을 지닌 흑인들이 자신의 흑인 정체성을 숨기고 백인으로 행세하는 것’을 의미한다. 백인과 흑인, 그 어느 인종도 아닌 우리로서는 손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피부색이 다른데 어떻게 패싱이 가능하냐고. 하지만 흑인과 백인, 그리고 그 밖의 수많은 인종이 모여 산 아메리카 대륙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인종차별의 벽이 아무리 높다고 해도, 함께 사는 이상 흑인과 백인은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게 될 테니.

흑인여성작가 넬라 라슨이 <패싱>을 쓴 1920년대는 전후 흑인들의 경제적 지위 향상을 배경으로 흑인들의 ‘패싱’ 인구가 급격히 팽창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즉 '가난하다/아니다’의 문제로, 더 이상 흑인과 백인을 구별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패싱>은 흑인들의 ‘패싱’을 통해 소수자로서 흑인들이 지니게 되는 심리가 어떤 것인지, 흑인과 흑인 사이를 흐르는 연대적인 심리는 과연 어디까지 가능한지 파헤친 소설이다. ‘패싱’은 흑인이 백인을 속이는 일종의 무기이지만, 반대로 흑인이 태어날 때 주어진 조건 자체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삶을 죄어버릴 수도 있는 양날의 칼이다.

그래서 자신의 일상을 엄격히 지키려는 주인공 아이린은 흑인출입이 금지된 호텔이나 미용실을 이용할 때만 제한적으로 ‘패싱’을 한다. 아이린이 백인인 척하는 방식은 아주 간단하다. 당당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흑인이 접근할 경우 백인처럼 무시해버리는 것. “그들은(백인들은) 언제나 그녀(아이린)을 이탈리아 사람, 스페인 사람, 멕시코 사람, 또는 집시로 보았다.”

즉, 누군가 ‘패싱’을 하는 사람에게 신경을 쓰지 않을 경우, ‘패싱’은 절대로 들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특정한 요소 때문에 차별을 당해 본 사람이야말로 자신을 부정하는 능력을 획득할 수 있으므로. 그래서 아이린은 “흑인이 백인행세를 하는 것은 쉬워요. 그러나 백인이 흑인인 척하기란 그리 단순하지 않을 거예요”라고 말한다.

소설은 흑인공동체 사이에서 가장 완벽하게 ‘패싱’을 해냈다고 평가 받는 클레어 켄드리라는 매혹적인 여자를, 친구 아이린의 눈에서 바라본다. 아이린의 삶은 중산층의 표본에 가깝다. 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한 중산층 가정을 꾸린 주부로 파티와 바자회에 바쁜 아이린은, 안정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자신의 기준을 남편과 자식에게 강요한다.

바로 그 때 클레어가 나타난다. 클레어는 아이린에게, 아이린처럼 흑인으로서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메시지를 열정적으로 보내며 아이린의 파티에 성실하게 참석한다. 그래서 아이린은 클레어가 두렵다. 희생을 감수하는 태도, 그것은 아이린이 가지지 못한 것이다. 클레어와 아이린의 갈등은 복합적이다. 일차적으로 그녀들의 갈등은 욕망을 위해 희생할 줄 아는 사람과 일상을 지키려는 사람의 갈등이지만, 그 저변에는 ‘패싱’을 했다가 흑인공동체로 돌아오려는 사람 대 이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흑인의 갈등이 깔려있다.

아이린은 클레어가 자신의 남편을 빼앗아갈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고 클레어의 정체를 폭로하고 싶다. 그러나 아이린은 같은 흑인으로서 클레어를 클레어의 인종차별적인 남편으로부터 지켜야 하는지, 아니면 그냥 무시해도 좋은지 갈등한다. 어쩌면 클레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아이린의 시선은, 클레어라는 여성에 대한 억누른 욕망일수도 있다. 그녀는 “흑인들 스스로가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용서하고, 경멸하면서도 찬미하고, 묘한 혐오감을 느끼고 그것을 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보호하는 모순적인” 존재인 것이다. 
앨리스 워커, 모든 폭력에 반대하는 영혼
 
앨리스 워커의 소설 <은밀한 기쁨을 간직하며>를 읽었을 때 인상적이었던 점은 여러 가지 억압이 복합적으로 작동하는 흑인여성의 문제를 쉽고 간명하게 전달한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전달보다는 ‘호소’라는 단어가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소설은 정서적인 부분을 강하게 자극한다는 면에서 대중적인 종교 서적을 읽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은밀한 기쁨을 간직하며>는 흑인여성 타쉬의 몸에 가해진 끔찍한 할례의 고통과 그녀가 할례로 인한 트라우마(외상, 영구적인 정신장애를 남기는 충격)적 기억과 싸우는 처절한 과정을 그린다. 그러나 소설은 결코 타쉬의 고통과 상처에 매몰되지 않는다. 작가는 타쉬의 문제를 강제로 타 대륙으로 이주 당한 후 성차별, 인종차별, 노동착취에 시달리는 흑인여성 집단의 역사적인 문제로 연결시키고, 그녀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억압에 반대하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를 소설 전반에 걸쳐 드러낸다.

독자들은 역사가 보여주는 (백인남성들의) 폭력성과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삶을 살아온 여성들의 생명력을 한없이 믿고 그녀들의 삶을 드러내기 위해 애쓰는 작가의 목소리를 통해 정서적인 힘, 약간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세상을 치유하고자 하는 영적인 힘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즉 “세계가 대부분 우리의 ‘아들’, ‘형제’, 그리고 ‘아버지’에게 할당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지만, 내 어머니의 끝없는 반영이기도 한 어두운 여성들이 별다른 노력 없이 스스로 얻어진 자생의 힘으로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은밀한 기쁨을 간직하며>에서 다룬 여성할례 문제의 경우 그녀는 할례를 반대하는 대회에 참여해서 할례 당한 여성들 당사자의 이야기를 들은 경험을 서술하면서, 할례에 대해 “일상적이고 놀라울 정도로 무심한 공격”이라고 명명한다. 또한 그녀는 할례와 같은 여성 폭력이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폭력에 무심하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진저리 나는 고통 속에 있는 한 우리는 태초부터 스스로에게 부여된 역할, 즉 주위의 환경을 돌보는 역할을 할 수 없다”)

이 책은 “과거를 살아내고 그로부터 자양분을 받아 유지하기 위한 나의 투쟁일 뿐 아니라 현재를 껴안고 미래를 위해 싸우기 위한 투쟁을 대변한다.” 때문에 앨리스 워커가 전하는, 호소하는 듯한 강력한 메시지들에서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어떤 본질적인 여성성에 대한 찬양이 아니라, 여성성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투쟁해 온 여성들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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