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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성폭력 예방을 위한 대학공동체의 노력 계속돼야 
  
5월말 세상에 알려진 고려대 의대생 성폭력 사건은 가해자가 소위 ‘명문대’ 학생이며 환자의 신체건강을 다루는 의료인이 될 ‘의대생’이라는 점에서 여론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았다.
 
현직 의료인이 환자를 대상으로 성폭력 범죄를 저지를 경우, 사법처리 이후 다시 의료행위를 하는데 마땅히 제재할 수단이 없고, 성추행 의대생들이 현행법상 실형이나 집행유예를 선고 받더라도 의사면허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이 사건은 더 많은 이들의 공분을 샀다. 이에 따라 가해학생들의 ‘출교’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출교’는 퇴학 처분과 달리 재입학이 불허되기 때문이다.
 
가해학생에 대한 징계수위에 대한 관심이 컸던 만큼, 9월 5일 고려대학교는 여론을 의식한 듯 입장을 번복하다 결국 가해자 출교조치를 발표했다. 그리고 이제 이 사건은 일단락된 듯 여론이 잠잠해졌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보아야 한다는 시각이 많다. 재판이 진행 중이고, 가해자들의 소송여하에 따라 출교조치가 번복될 수도 있다는 점, 그리고 피해자의 앞으로의 생활을 생각하면 성폭력 사건이 ‘정리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여성주의 진영에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대학사회의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근본적인 변화들이 모색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반성폭력 학칙 제정한 지 10년이 지났는데...
 

가해자 출교조치가 발표된 지난 9월 5일, 고려대 반성폭력 연대회의는  '반성폭력운동 선포' 기자회견을 가졌다. ©고대문화 

 
사건 발생 후인 6월 중순 경, 고려대학교 내에서는 ‘반(反)성폭력 연대회의’가 결성되었다. 고려대 여성주의 교지 <석순>, 여학생위원회, 생활도서관 그리고 대학원총학생회가 참여하고 있는 학생 자치기구이다. 반성폭력 연대회의 측은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학내성폭력에 대해 조사하고, 이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나갈 기구가 필요하다”며 결성 이유를 밝혔다.
 
7월에는 고려대 졸업생이 주축이 된 시민 56명이 “고려대가 피해자 보호에 소홀했다”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이들은 진정서에서 “고려대학교는 성폭력 예방을 위해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노력한 바 없으며, 해당 규정 마련 후 만10년이 된 지금도 학내에서는 다양한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이를 계기로 고려대뿐만 아니라 다른 대학까지 범위를 넓혀 학내 성폭력 문제에 대한 조사를 시작한 상태다.
 
진정서 제출의 주축이 된 김수희씨(심리 98) 등 3명의 고려대 졸업생은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01년 6월 15일 마련된 고려대학교 “성희롱 및 성폭력 예방과 처리에 관한 규정” 제정에 참여했던 이들이다. 반성폭력 학칙은 제정되었지만, 그에 걸맞게 내실을 기하는 대학사회의 노력이 뒤따르지 못했다는 점이 안타까워 이번 사건에 힘을 모으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상당수의 대학에 학내 성폭력 문제에 대한 처리 규정을 명시한 ‘반성폭력 학칙’이 제정되어 있다. 1990년대 중후반 대학사회에서 성폭력에 관한 담론이 확산되면서,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반성폭력 학칙을 제정하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그 결과 2000년, 2001년에 걸쳐 많은 대학에 반성폭력 학칙이 제정되고 상담기구도 설치되었다.
 
그러나 학칙의 내용 면에서는 보완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경우에 따라 단 몇 줄 정도의 형식적인 규정만 두고 있는 곳도 있다.
 
교직원과 학생들에 성폭력 예방교육 ‘필수’

 
고려대학교 반성폭력연대회의의 헤라(07, 국문)씨는 가해자를 감싸는 발언으로 문제가 된 의대 교수나 학생들의 태도가 단지 ‘제 식구 감싸기’에만 기인한다고 볼 수는 없다고 말한다.
 
“고려대의 반성폭력 학칙에는 성폭력 예방교육의무가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한 학기에 한 번씩 양성평등센터에서 교수들을 대상으로 양성평등교육을 위해 이메일을 보내고 교육시간을 갖지만 참석률이 높지 않습니다. 의무가 아니기 때문이죠. 교수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공지하는 것도 기분 나빠하는 교수들도 있고요.”
 
학생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새내기를 위한 새로배움터에 교양시간이 있지만, 그 내용은 자율에 맡겨지고 있다.
 
“학내에서도 성희롱이 비일비재합니다. 하지만 (피해 학생이) 당하면서도 ‘이게 말로만 듣던 성희롱인가?’ 혼란스럽고 대처방법도 잘 모릅니다. 교수도, 학생도 성폭력 피해자를 대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헤라 씨는 교직원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성폭력 예방교육을 의무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성폭력 예방교육과 사건이 발생했을 때 해결절차를 담당하는 학내 상담기구 역시 실효성이 문제가 되고 있다. ‘성폭력 상담 전문가’를 둔 상담실을 운영하는 대학은 몇몇에 불과하며, 그 규모도 부실하여 대학 성폭력 사안을 교육부터 상담과 사건 처리까지 다루기에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고려대학교의 경우 양성평등센터의 일을 소장 한 사람이 전담하고 있다. 고려대 반성폭력 연대회의 측은 ‘고대 양성평등센터가 일을 활발히 하는 축에 속한다고 보지만, 실질적으로 한 명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한계가 있지 않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학교 측이 학내 성폭력 문제에 대해 ‘상담가 한 사람이 처리할 정도의 수준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닌지’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성폭력 문제를 둘러싸고 그 행위를 가볍게 보거나 피해자를 탓하는 왜곡된 시선이 난무하고 있다. 그러나 변화의 바람도 분명 있다.
 
이번 의대생 성폭력 사건에서 인터넷을 중심으로 피해자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는 움직임이 있었다. 반성폭력연대회의 헤라 씨는 “가해자에 대한 응징의 시선을 넘어 피해자의 피해 이후에 삶에 대해서도 주목하게 된 것 같다”며 긍정적인 변화를 읽었다고 말한다. 고려대학교 인터넷 게시판에서도 ‘피해자에 대해 신상을 알려고 하지 마라’는 분위기가 있었다고도 전했다. 성폭력 대한 사회적 인식도 제자리걸음인 것은 아니다.
 
보완해야 할 점들이 있지만, 반성폭력 학칙이 전체 70%이상의 대학에 제정되어 있다는 점으로 보았을 때 이미 큰 틀이 갖추어져 있는 셈이다. 이제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성폭력 예방과 피해자 구제를 위한 보다 내실 있는 섬세한 체계를 갖추고, 그 내용을 채워가는 일일 것이다.
 
이번 고려대 의대생 성폭력 사건에 모인 관심과 에너지가 대학 내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변화를 일굴 수 있도록 진화해가길 기대해 본다. (박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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