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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즘 새지평

“어떻게 아빠 없이 애를 낳아요?”

그 여자들의 물결 일다 2011.08.16 16:21
김산의 <두 엄마의 육아일기> 3회 

<일다> www.ildaro.com 의 새 연재. 캐나다에서 동성 파트너와 함께 아이를 양육하고 있는 ‘김산’님이 “두 엄마의 육아일기”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어떻게 아빠 없이 애를 낳아요?”

우리 커플과 정자기증자 후보로 나선 그가 6개월 간 데이트(?)를 하던 중 우리 쪽에서 결단을 내리고 그에게 작별인사 겸 마지막 식사 대접을 한 뒤였다.
 
그가 신은 투박한 하얀 운동화의 소박함 때문일까. 아님 듬직한 허우대와 맞서 애써 감추려 해도 소용없이 드러나는 실망스런 표정 때문일까. 신호등 너머 뒤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쓸쓸하게 느껴지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만감이 교차하는 반년 간이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결국엔 우리 쪽에서 먼저 말을 꺼내기로 했다. 정자기증자로 나서는 이에 비해 기증자를 찾는 여성들이 훨씬 많기 때문에, 그의 입장에서 보면 별로 손해도, 상처도 아닐 것이라고 정리하면서도, 내 파트너 훈과 나는 여전히 미안한 맘을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밀려오는 안도감이랄까.
 
정자기증인 후보자에게서 기증을 받지 않기로 한 이유

▲ 시대별 레즈비언의 삶을 그린 옴니버스 영화 <더 월 2>(If These Walls Could Talk 2)의 한 장면.    
 

지금도 생각하면 아쉬울 정도로 그는 여러모로 뛰어난 사람이었다. 아는 이를 통해 소개 받았고, 인간성 좋고, 창의성과 사회비판적 시각이 균형 있게 잡힌데다, 의지도 강하고, 본인을 비롯해 동성/양성애자 형제자매와 사촌들이 많은 자기 가족을 자랑스러워했다. 무엇보다도 아이를 무척 좋아하고 정자기증을 통해 낳은 아이와 나름대로 관계를 이어가고 싶어했다.
 
이런 점이 우리에게 매력이었던 건, 아이가 기증인에 대해 궁금해 할 경우를 대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한 아이의 양육에 관여하는 이들이 많을수록 기르는 게 수월할 수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었다. 으레 자녀 양육에 있어서 가족에게 기대하는 지지나 도움을, 우리의 경우엔 양쪽 집 모두에게서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그의 조건은 우리의 필요에 딱 맞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왜 그런 사람에게 정자기증을 받지 않기로 했나? 실질적인 이유로 보자면 스케줄이 안 맞았다. 그는 반년 간 우릴 세 번밖에 만나지 못할 정도로 시간이 빠듯했다. 준비를 시작한 지 2년이 되어가는 우리 입장에선 이래서 언제 정자기증을 받나 싶었다고나 할까. 서로 맞는다 결정이 나더라도, 상의해서 계약서를 작성하고, 건강검진을 마치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했다.
 
게다가 매월 산모 후보자의 순환주기를 모니터링 해서 제때에 정자를 제공(?)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견디려면, 정자기증자가 시간이 꽤 넉넉하거나 우선순위를 분명하게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는 중진 프리랜서로 생활을 해나가는 중이었기 때문에 그런 사치를 부릴 여유가 없었다.
 
더 심중에 걸렸던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아이와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한다는 점과 관련이 있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떤 식의 관계를 맺고 싶은지가 분명하지 않다는 거였다. 법적 양육인이 아니어도 상관없다고는 했지만, 기증한 아이에 대한 애착이 강하고 이미 자식으로 여기는 듯했다.
 
이 부분에서 캐나다의 법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캐나다에는 이반커플을 일반커플과 차등을 두지 않는 진보적 주가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사실 양육인과 자식 관계로서의 ‘이반가족’을 법적으로 인정하게 된 것은 주에 따라 차등이 있지만 빨라도 10년 안팎이다. 내가 있는 주에선 출생신고 작성란에 두 엄마를 모두 기록할 수 있게 된 것이 5년 정도밖에 안 된다.
 
정자기증인을 통한 출생은 “known donor”(알음알음 만난 기증인)와 “unknown donor”(정자은행을 통한 기증인)로 나뉜다. 전자의 경우, 기증 당시 기증인은 법적으로나 재정적 양육책임이 없는 것으로 계약서를 작성했어도, 그가 아무 때나 아이 아버지로 번복하여 진정할 권리가 있다. 실제로 그런 일이 발생해왔는데, 이유와 결과는 다양하지만 돈과 법정소송 문제로 결부돼 진저리 칠 정도로 질질 끄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런 정보를 정자기증인 후보자를 만나기 시작한 뒤에야, 이반커뮤니티센터가 마련한 ‘이반 양육자 되기 프로그램’에서 변호사를 초청해 설명을 듣는 과정에서 알게 되었다.
 
물론 우리 주변 경우처럼, 그런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운이 좋아 오랫동안 알던 지인에게 기증을 받는 경우도 있다. 그런 운이 없는 우리 같은 커플에겐, 결국 이 문제는 특정한 정자기증자 후보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과연 “known donor”를 선택할 준비가 되었는지 여부의 문제였다. 짧은 시간 동안 만난 기증자에게 평생을 거는 문제를 두고 신뢰를 줄 수 있는지, 신뢰를 주고 나서 잘못되면 감정적, 재정적으로 감당할 여유가 있는지 돌아보게 된 것이다.
 
결론은 착잡하게도, 우리는 그런 가능성을 챙길 여유가 그리 없다는 것이었다. 정자은행을 통해 구입하는 정자야 말로 자본주의의 상품화 과정의 최첨단이라고 생각했던 초기의 맘과 달리, 우리는 매우 현실적인 생각들로 내달리게 되었다.
 
정자은행을 이용하기로 결정하고서
 
그렇게 정자은행을 이용하기로 결정하고 나서 우리는 희비를 경험했다. 시장의 장점이랄까, 우리에게 나름대로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 인종이나 외모(사진이 있을 경우), 또는 비판적 사고력이나 성격 등(기증자 인터뷰나 에세이가 있을 경우), 그리고 가족과 본인의 건강기록들이 정보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자를 구입하는 비용(현재 한 샘플에 100만원이 넘는다. 더구나 한번에 성공할 비율은 매우 낮다)과 임신출산클리닉 비용(법적으로 정자은행을 통한 정자 구입과 투여는 임신출산클리닉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주에 따라 비용이 안 들기도 하고, 내가 있는 곳은 점점 비싸지고 있다)도 적지 않다.
 
또한 우리가 왜 같은 동양계를 선호하는지, 왜 외모도 고려하는지 등의 문제에 대한 성찰은 실리에 타협하는 우리 자신들에 대해 씁쓸함을 느끼게 되는 경험이기도 했다. 특히나 정자은행에서도 동양계 쪽으로 기증된 정자 수는 유럽계 백인종의 정자 선택에 비해 매우 적다. 미국에 근거한 정자은행들은 기증인에게 보상을 지급하는데도 드물거늘, 캐나다 정자은행처럼 최근에 바뀐 ‘인간재생산법’(Assisted Human Reproduction Act)에 의해 정자기증인들에게 보상을 지급하는 것이 불법화된 상황에선, 정말 가뭄에 콩 나는 경우다.
 
그런데도 왜 동양계를 고수했나? 지난 글에서 밝혔듯이, 다른 인종에 대한 입양의 경우 아이에게 입힐 혼선과 상처들을 설명한 것과 같은 이유라고 보면 되겠다. 인종적 분열을 넘어서자는 나의 이상주의적 결심의 대가를 내 아이가 치르게 되면 안 될 것 같은 심정 말이다.
 
정자은행을 이용하는 이들에겐 경제적 타격 말고도 대비할 일이 따로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같은 정자를 사용한 이들끼리의 ‘관계 맺음’이다. 내 주변엔 같은 유태계 쪽 정자를 사용한 이들(Donor Sibling)이 우연히 서로 알게 돼 아이들이 자라며 함께 만나가는 이들도 있다. 우리 커플도 그럴 가능성이 있나? 우리가 이용한 정자를 사용한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된다면, 유전자를 나눴다는 이유로 정치성과 인격에 상관없이 “chosen family”(혈연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가족)을 형성하기 위해 만나고 싶어질는지. 아직 모르겠다.
 
이렇게 해서, 우린 “아빠 없이” 기증인을 통해 아이를 낳았다. 아빠와 기증인의 차이를 생각해보지 않은 이들은, ‘여자 둘이 어떻게 아이를 낳느냐’고 가능성을 쉽게 배제해버린다. 심지어 도시에서 교육받고 교외에서 근무하는 의사들도 예외가 아니다. 관심 있는 클라이언트들(일반 이반 여성 모두)에게 정자은행과 임신출생클리닉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야 하는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정자’라는 생물학적 요소와 ‘아버지’라는 사회학적 요소를 분리시켜 생각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내가 아는 한 의사는, 전남편과 이혼한 뒤 그와 사이에 낳은 아이가 있는 한 이반여성이 다른 여성을 만나 가정을 이루며 사는 것에 대해서는 이상한 점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결혼피로연에 참석해 밤새 놀고 온 것이 되려 그의 진보성을 대변하는 예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그 의사가 ‘어떻게 여자 둘이 아빠 없이 아이를 낳느냐’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호탕한 웃음을 지을 땐, 그의 무지함과 오만함에서 오는 오류가 의사로서의 권위 때문에 도용되는 게 걱정스러울 따름이다.
 
그래도 우린 아이를 낳았고,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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