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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딸을 만나러 가는 길 (5) 전남편과의 기억

20년이 지난 지금도 남편과 연애를 했던 시절을 떠올리면, 여전히 입가에 배시시 웃음이 나온다. 그와의 관계가 이혼으로 끝났다 하더라도, 그 시절 그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내가 그를 좋아한 가장 큰 이유는 운동권이라서였다. 나 역시 학생운동권 출신으로, 졸업 후에도 노동운동을 하겠다는 야무진 꿈을 키우고 있었다. 남편과 연애할 당시는 대학 졸업 직후였는데, 사회진출 모임을 하면서 진로를 준비하고 있던 때였다. 그를 만난 건 문학운동 단체에서였다. 그는 누구보다도 운동에 열정을 가지고 있었고, 애국심으로 넘쳐, 나는 그 사람이 내 운동가적 삶을 반짝반짝 빛나게 해줄 거라고 믿었다.
 
그 다음으로 좋아한 이유는 그가 시인이라서였다. 햇볕 잘 드는 카페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탁자에 놓인 책을 베고 꾸벅 졸다 눈을 뜨면 그는 시를 써서 내게 내밀곤 했다. 그 햇빛과 졸음과 그의 애잔하면서도 섬세한 시들이 너무 좋았다.
 
게다가 그는 시인답게 낭만적이기까지 했다. 함께 대학교정을 거닐며 산책을 할 때의 일이다. 갑자기 보조를 맞추며 걷던 발걸음을 성큼성큼 내디뎌, 그가 멈춘 곳은 대형 행사가 끝난 뒤 덩그러니 놓여 있는 한 화환 앞에서였다. 그는 거기서 연분홍 글라디올러스 여러 송이를 뽑아, 다가서고 있는 내게 미소 지으며 내밀었다. 나는 그때 받은 글라디올러스를 그사이 그가 사준 안개꽃이며, 장미꽃들보다 훨씬 마음에 들어 했다. 이렇게 살아도 좋겠다고, 꽃을 살 돈이 없어도 그는 내 인생에 아름다운 꽃을 안겨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그와 결혼해야겠다고 결심을 굳히게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한 선술집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때였다. 당시, 술집에는 껌이나 초콜릿 같은 것을 팔러 오는 노인들이 많았다. 우리 앞에 그런 노인이 나타났다. 노인은 초콜릿을 그 사람 앞에 내밀었다. 나는 그의 반응이 참으로 기대되었다. 그건 꼭 몇 년 전, 다른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전에 사귀었던 남자친구와도 똑같은 경험이 있던 지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촉수를 세우며 그의 반응을 살폈다. 옛날, 물건을 내미는 노인에게 전 남자친구는 “에이, 술 맛 떨어지게!”라고 말하며, 노인을 민망하게 밀쳐냈다. 그 사건은 내가 그와 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그날 남편은 초콜릿을 사면서 거스름돈을 주려는 노인에게, 괜찮다며 상냥하게 거절했다. 나는 아직도 그가 노인을 바라보던 그 깊고 따뜻한 눈빛을 기억한다. 그와의 관계가 이혼으로 끝났다 하더라도, 그가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여전히 믿는 건 바로 이 사건 때문이다.
 
이런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 선택한 남자인 만큼, 나는 내 선택에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나서야, 아무리 운동가로 뛰어나도 성평등 의식이 없는 남자는 아내의 운동을 반짝반짝 빛나게 해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여전히 자기가 하고 싶은 일들을 아무 문제없이 해나갔지만, 나는 그의 보조자에 불과했다.
 
아무도 노골적으로 요구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가 활동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시댁과 친정의 대소사를 도맡아 했고, 내 역할은 남편을 배려하고 지지해야 한다고 은연중에 배워나갔다. 사람들은 그런 나를 칭찬했다. 아니, 남자들이라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일 게다.
 
급기야 남편은 유학을 가고 싶다며, 학비조달을 위해 내가 시어머니와 국밥집을 하면 좋겠다는 요구를 하기에 이른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난 국밥집 하려고 세상에 태어난 몸은 아니에요! 당신이 유학을 결심하면, 나도 함께 가서 공부를 하겠어요. 내 학비는 내가 마련해요.”
 
결코 국밥집을 하라고 해서 화가 난 것이 아니다. 국밥집이든, 옷 가게든, 그 일이 무엇이든, 자기를 위해 희생하라는 요구에 난 화가 났다. 내가 꿈꾸는 결혼 관계는 서로가 서로의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조금씩 나누고 도와주는 수평적인 관계였다. 그러나 현실은 그런 나의 기대를 저버렸다.
 
그는 내 꿈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는 나의 단호함에 풀이 죽어, 다시는 유학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도, 나도, 서로가 기대한 바로 그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조금씩 확인해 나가면서 1년 8개월의 결혼생활은 끝이 났다.
 
그리고 그가 재혼한 상대는 다행히도 이런 남편의 요구를 잘 만족시켜주는 사람인 것 같다. 그녀는 자신의 꿈을 모두 접고, 십여 년 간 시어머니 병수발을 들었고, 시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이제는 집안경제를 위해 남편과 함께 늦은 밤까지 일을 한다고 했다. 어린 아이들을 제대로 돌봐주지 못할 정도로 바쁘게 일을 하면서도 식구들에게 미안해하는 쪽은 늘 그녀란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가 그와 계속 살길 원했다면 이렇게 살았어야 했겠구나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이십 대에는 낭만적인 사랑에 눈이 어두워 사람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낭만적인 태도도, 정치적 신념도, 평생 함께 할 배우자를 선택할 때 중요한 판단의 잣대가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매우 절망적이었다. 이런 것보다 평등의식과 독립심이 있는 사람, 또 상대방의 인생도 자기 인생만큼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그의 꿈을 지지해주고 격려해주는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는 걸 지금은 잘 알고 있다.
 
게다가 나는 남편이 나의 꿈에 날개를 달아줄 거라고 기대하면서, 나의 운동을 반짝반짝 빛나게 해줄 거라고 믿으면서 결혼을 했는데, 그것은 모두 판타지에 불과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당시 내 이런 모습은 남편과 다른 모습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내가 진정으로 성 평등적이고 독립적이지 않았으면서, 어떻게 남편에게서 그것을 기대할 수 있었는지 지금은 부끄러울 뿐이다. 그래서 결국, 그때 내가 사랑한 그 사람의 안타까운 모습은 나의 모습이기도 했으리라. (윤하 *일다 즐겨찾기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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