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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길이 만들어지고 있다’
레즈비언으로 살아가는 인생의 선배들과 만나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이순이

[일다는 장년층 레즈비언들의 삶과 진솔한 목소리를 담기 위해 ‘그루터기’ 회원들의 글을 격주로 연재합니다. ‘그루터기’는 공동체를 지향하는 35세 이상 여성이반모임입니다. –편집자 주]


솔직하게 나를 표현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다음 달이면 ‘그루터기’에 들어온 지 딱 1년이 된다. 그 1년 사이에 내 삶은 참으로 많이 변했다. 파트너와 나, 늘 둘이서만 지내던 우리가 다른 레즈비언들을 처음으로 만나고, 마음의 문을 열고, 함께 노동을 하고, 음식을 나누어 먹고, 많이 웃고, 우리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면서 진짜 ‘그루터기’ 회원이 되었다.
 
그루터기가 무슨 뜻인지 한번 검색을 해봤다.

1) 풀이나 나무, 또는 곡식 따위를 베고 남은 밑동
2) 밑바탕이나 기초가 될 수 있는 사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그루터기 선배들은 정말 나에게 그루터기 의미 그대로네’ 하는 생각이 스친다.
 
애인과 둘 만의 세상에서 갇혀 지내던 어느 날, 우리의 동지들을 찾아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서 처음으로 손을 내민 곳은 한국레즈비언상담소였다. 그곳에서 알게 된 ‘그루터기’라는 모임에 가입하게 되었다.
 
‘그루터기’는 35세 이상을 회원가입의 기준으로 정했기 때문에, 나이가 살짝 모자랐던 나는 가입이 거부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문을 두드려보기로 했다.
 
다행히 면접에서 통과해 다음 정기모임부터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만약 안 된다고 하면 35살 되는 그 날까지 기다려야 하나? 다른 모임을 알아봐야 하나?’ 하는 걱정을 날려 버릴 수 있어서 너무나 좋았다.
 
내가 가입하고 싶었던 모임은 오래도록 함께 진정으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있는 곳, 솔직하게 우리를 표현할 수 있는 곳이면 족했다.
 
외롭지 않게 이 길을 쭈욱 걸을 수 있다는 자신감
 
레즈비언으로 살아오면서 가장 안타까운 점은 떳떳하게 커밍아웃을 하지 못하고 그 동안 소중하게 지냈던 많은 친구들과 선후배들과 멀어진 점이다. 이제 그 텅 비고 쓸쓸했던 자리를 ‘그루터기’ 선배들이 하나 둘 채워주고 있다.
 
내가 늘 긍정적으로 생활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중의 하나가, 힘든 일이 있을 때 그 고통의 원인을 ‘레즈비언’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레즈비언이라서 겪어야 하는 부당한 차별과 피해도 분명 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사소한 일에도 피해의식이 생기고, 레즈비언으로 살아가는 일이 너무나 힘겹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그냥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네 삶이 그런 것이라고, 예전에 비하면 그래도 세상이 조금씩 친절해지고 있으며, 더디겠지만 앞으로는 더욱 친절해지리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걷고자 하는 이 길에서 사람의 흔적이라곤 찾을 수 없어 자신감을 잃어가고 쓸쓸함과 두려움이 한없이 커져만 가던 중에, 저쪽에서 환하게 웃으면서 “이리로 오렴” 하고 다정하게 손을 흔들어주는 인생의 선배님들이 있다는 것은 많은 위안과 용기를 준다.
 
예전처럼 외롭지 않게 이 길을 쭈욱 걸어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불끈 생긴다. 먹구름에 가려져있던 무지개가 이제는 선명하게 보인다.
 
세상에 내 편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커다란 축복이다. 그래서 ‘그루터기’와의 인연이 더욱 소중하다. 난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기 때문에, 감사할 일들이 많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 옆에 함께하고 있고, 내가 찾고 준비하던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멋진 그루터기 분들과 손잡고 서로를 의지하고 힘이 되어주면서 이 길을 걸어나갈 것이다.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던 새로운 길이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뒤따라오는 사람들이 조금 수월해지길 바래본다.
 


2008/09/17 [00:04] 여성주의 저널 일다 ⓒ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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