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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다니지 않는 시골소녀가 자연에서 만난 행복 
 
“모래 언덕의 혼란과 철로의 가지런함을 놓고 선택하는 순간, 그 선택된 길이 나를 어디로 이끌 것인지는 정말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백로가 느끼는 것과 같은 믿음, 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실패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나브한, ‘학교 빼먹기: 어린 자연주의자로서의 출발’ <아이들은 왜 자연에서 자라야 하는가> 그물코, 2003)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된 시골소녀가 나의 청소년 철학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 지도 제법 시간이 흘렀다. 컴퓨터도, 핸드폰도 없는 그 소녀와의 소통은 ‘서신’을 통해 이루어졌다. 외진 시골에 살면서 학교도 다니지 않는 그녀는 농사일과 공부를 병행하고 있다. 소녀의 꿈은 어른이 되어서도 농사를 짓고, 글을 쓰고, 그외 다양한 일들을 더불어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란다.
 
“밤하늘을 보다가 별자리를 발견했을 때, 내가 일군 밭에 내가 심은 씨앗에서 싹이 났을 때, 마당에는 햇볕이 비치고, 날씨는 따뜻하고, 손에는 앞으로 읽을 책이 있고, 시간도 넉넉할 때” 행복하다는 대목에서 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지금껏 가르쳐온 도시 청소년에게서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행복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 소녀의 이야기 속에는 분명 자연과 교감하는 데서 오는 행복이 들어 있었다.
 
도시에서 집, 학교, 학원을 오가면 살아가는 청소년들은 자연과 자신의 행복을 연결시키기 어렵다. 대지와 우주, 동식물과 교감을 느낄 시간적 여유도, 체험의 기회도 부족하다. 그들은 지구상의 다른 생물과의 공존, 무생물과의 상호작용, 하늘, 땅과의 교감을 박탈당한 채 인간관계에만, 특히 인간들끼리의 경쟁에 집중한 채 고립된 세계에 갇혀 있다. 심지어 관심이 인간도 아니고, 돈에 집중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허다하다. 그에 비해, 학교를 다니지 않는 시골 청소년이라면, 인간과 자연의 긴밀한 관계에 더 예민하게 반응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물론 오늘날 시골에서조차 인간의 개입이 적지 않은 마당에야, 그곳에서 접하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의 자연, 야생의 자연이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화학비료, 제초제 등과 같은 화학물질을 이용해 농사를 짓고, 농업을 위해 야생동물의 터전을 빼앗아 멸종의 길로 내몰고, 삼림을 훼손해 초지를 조성하는 목축에 골몰하는 시골이라면, 그곳의 생활도 도시생활 못지않게 자연파괴적이다.
 
하지만 자연과의 공존을 모색하는 친자연적 농업이 이뤄지는 농촌에서라면, 야생의 자연과는 다르다고 할지라도, 도시보다 그곳이 더 자연과 친밀한 곳이라 표현한다고 해서 그릇된 것은 아니다. 자연 속에서 인간의 나약성을 깨닫고, 자연에 기대고, 자연에 적응하며, 땅에 발을 붙이고, 하늘에 눈을 열어 생활하고 있으니까.
 
자연에 무관심한 도시인들

 
우리가 인식하고 있건 아니건, 우주의 작은 별인 지구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생명체,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고, 우주의 일부이다. “향기로운 꽃은 우리의 자매이다. 사슴, 말, 큰 독수리, 이들은 우리의 형제들이다. 바위산 꼭대기, 풀의 수액, 조랑말과 인간의 체온 모두가 한 가족이다.”라고 했던 시애틀 추장의 생각 속에는 인간과 지구상의 생물, 무생물과의 밀접한 관계에 대한 이해가 잘 드러나 있다. 평생 동안 구체적인 삶 속에서 야생의 자연과 직접 대면하며 살아가야 했던 인디언들인지라, 이러한 자연 이해에 도달하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오늘날의 도시인에게는 ‘인간은 자연을 소유, 지배하려 해서는 안 된다’, ‘자연이 죽으면 인간도 죽고, 자연이 살아야 인간도 산다’는 평범한 진리가 낯선 진실일 뿐인가. 도시 청소년들과 함께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는 일은 항상 쉽지가 않다. 공허한 메아리의 울림으로 되돌아오는 것 같아 실망스럽다.
 
<아이들은 왜 자연에서 자라야 하는가>의 저자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어린 시절부터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우리 삶의 터전 안에서 자신을 자연에 연결시키는 경험이 우리 인간에게 꼭 필요하고, 또 중요하다. 그러나 도시인에게는 그런 어린 시절이 결여되어 있다. 대자연 속에서 자라나지 못한 도시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어떻게 자기 아이들에게 생생한 자연의 체험을 이야기로 들려줄 수 있겠는가. 도시에서 태어나서 어른이 된 나 역시도 별로 다르지 않다.
 
자연 속으로 뛰어들어 몸으로 부대끼며 자란 어린 시절의 경험도 없는 도시 청소년들, 그들의 현재 생활 자체에도 바위, 식물, 동물, 땅, 우주가 들어 설 자리는 없다. 집안의 개, 고양이, 동물원이나 동물 서커스의 동물들, 집안의 화초나 동네공원의 나무가 그들이 겨우 만날 수 있는 동식물이다. 하지만 인간에 의해 길들여진 생명들을 접하고, 인간이 개입한 자연세계를 경험할 뿐, 그들에게 야생의 자연은 자신과 동떨어진 막연한 무엇일 뿐이다.
 
학교와 같은 공간에서 인위적으로 제공된 자연학습 프로그램을 통해 자연을 체험하기도 하고,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풍부한 자연정보에도 열려 있지만, 그들의 삶을 자연에 잘 연관짓지는 못한다. 그냥 교양과 지식일 뿐 삶은 아니다.
 
사실 대다수의 도시 청소년에게 자연은 큰 관심거리가 아니다. 어린 시절 자기 집 주변에서  자연과 직접적으로 만나기 시작해서, 성장과 더불어 지속적으로 이어가는 삶 속의 자연교육, 그야말로 ‘자연스러운’ 자연교육의 부재가 낳은 결과일 것이다. 그런 만큼 도시인이 자연과 제대로 된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자연 속에서 자유와 독립심을 배운다
 

박상은 "산책" ©www.ildaro.com

그런데, 여자아이의 경우, 어린 시절부터 자연 속에서 성장한다면, 수동적인 여성의 역할을 벗어던질 수 있다는 주장이 내 관심을 끈다.

 
“지구는 아이들이 자기 자신이 되도록 하고,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활동하고, 놀이, 시간, 상상력을 통제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가능성은 성 역할이 세워놓은 벽을 허문다.”(트림블, ‘나만의 땅: 성과 자연’, <아이들은 왜 자연에서 자라야 하는가>)
 
트림블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도 있겠다. 어릴 때부터 자연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자신을 돌볼 수 있는 여성이라면 용기 있게 스스로를 건설해나가는 능동적이고 독립적인 인간으로 살아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그의 주장에 공감하게 된 것은 바로 시골소녀가 쓴 행복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였다. “몇 년 전에, 산 아래 마을 빈집에서 혼자 종종 자고 올 때가 있었다. 일종의 캠핑이랄까? 어느날, 빈집에서 며칠 머물게 됐는데, 감기가 오려는지 목과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가져간 쌀과 야채로 혼자 죽을 끓여 먹는데, 갑자기 내가 무척이나 자유롭고, 지금 처한 상황이 무척 재미있게 느껴지면서 굉장히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하여튼 무척 이상하고 즐거운 기분이었다. 그걸 행복의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껏 도시의 십대 소녀들에게서 발견하지 못한 독립심과 자유로움이다. 이 시골소녀는 독립심에서 오는 행복감을 이미 체험했다. 가정과 학교에서 문화적 성역할을, 독립심이나 용기가 빠져있는 수동적 역할을 벌써 체득해 버린 도시의 소녀들로서는 감히 엄두도 내볼 수 없는 경험일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자연 속에서 강하게 성장해온 소녀들이라면, 자연 속에서 스스로를 돌보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해나감에 따라 충분히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문화적 성차별을 극복해 나갈 수 있다는 주장은 충분히 고려해 볼만하다. 이때 독립심과 자유는 자연과의 공존하는 관계에 기반하고 있어 진정한 힘을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지금껏 인간은 두려움을 주고 한계를 깨닫게 한 자연, 도전하고 모험하게 했던 자연, 그 자연에 맞서면서 진화해왔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을 자연의 지배자로 규정하면서, 자연을 정복하고 소유하고 마음껏 이용할 대상으로 간주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자연을 삶의 무대로 삼아온 능동적 인간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었다는 점에 주목하자. 남성들이 자연에 맞서 자신의 힘과 의지를 키우고, 자유와 독립심을 쟁취해나가는 동안, 집안에 자신의 자리를 마련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은 자연을 위험하고 두려운 공간으로 내면화한다.
 
하지만 더는 자연을 지배의 대상으로 보아서도 안 되지만, 자연의 일부인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어릴 때부터 자연과 더불어 강하게 성장해야 하고,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내게 강한 울림을 준다.
 
도시인인 나는 자연 자체에 대한 이해와 경험 대부분을 어른이 되어 스스로의 노력으로 얻었다. 그런 내게 야생의 자연은 항상 낯설고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시골에서 자연과 더불어 성장하고, 자연 속에서 행복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소녀에게 자연은 내가 느끼듯 낯설고 두렵기만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미 자연과 더불어 좋은 방향에서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는 그녀라면, 그 어떤 도시 청소년보다 씩씩하고 의지적이고 독립심 강한 어른, 여성이 되지 않을까? 오직 길을 찾음에 있어 자연과 연결된 자신을 믿고 성큼성큼 나아가라고 격려해주고 싶다. (이경신의 도서관 나들이)
 
* 일다 2010 스토리텔링 강 <풀뿌리 여성활동가 13인과의 대화>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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