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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숙영의 Out of Costa Rica (12)* 코스타리카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필자 공숙영은 현지에서 마주친 다양한 인상과 풍경을 기록하고자 합니다
 
중남미의 ‘낙태’- 현실과 전망③
 

임신중절 합법화에 반대하는 시위 (브라질) ©로이터

2009년 3월 브라질의 아홉 살짜리 소녀가 임신을 하였습니다. 심각한 복통 때문에 병원에 간 소녀는 쌍둥이를 4개월째 임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이 소녀가 이렇게 된 것은 소녀의 의붓아버지 때문이었습니다. 스물 세 살의 의붓아버지는 소녀를 여섯 살 때부터 성폭행했고, 열네 살이며 장애가 있는 소녀의 언니까지도 성적으로 학대한 혐의를 받아 체포되었습니다.
 
이 사건의 파장과 논란은 브라질의 가톨릭교회를 곤혹스럽게 만들었지만, 교회는 원칙적인 입장을 고수하였습니다.
 
“이는 슬픈 사건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잉태된 그 쌍둥이가 두 사람의 무구한 인명이라는 점입니다. 그 소녀가 가진 쌍둥이는 살 권리가 있고 제거당해서는 안 됩니다. 생명은 항상 보호되어야 합니다.”
 
신의 법과 인간의 법
 
브라질 법률은 산모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거나 성폭행으로 인한 임신일 경우에 임신중절을 허용합니다. 의사들이 진단하기를 이 소녀의 경우는 저 두 가지 사유에 다 해당되었습니다.
 
“이 아이의 자궁은 너무 작아서 둘은 말할 것도 없고 아기 하나도 유지할 수가 없어요.”
 
출산이 소녀의 생명을 위태롭게 할 거라는 의학적 소견에 대해 종교계와 임신중절 합법화 반대자들은 제왕절개 수술이란 방법을 반론으로 제시하기까지 하였지만, 결국 소녀는 임신중절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그 소녀가 사는 도시의 대주교는 “신의 법은 인간의 법보다 고차원의 것”이라며 시술을 한 의사들과 소녀의 어머니 등 소녀의 임신중절 결정과 시술에 관여된 이들을 전부 가톨릭교회로부터 파문하겠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낙태죄는 살인죄와 강간죄보다 중죄다”
 

“낙태 홀로코스트를 좌시하지 말라” 임신중절 합법화에 반대하는 내용의 포스터 ©cafepress.com

“낙태는 성인을 살해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합니다. 성인은 무구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확실히 무구합니다. 그런 생명을 앗아가는 일을 묵과할 수는 없습니다.”

 
‘살인죄’보다도 ‘낙태죄’가 더 심각하다면서 대주교는 이렇게 못박았습니다.
 
“교회와 전 세계는 6백만 명이 살해당한 홀로코스트를 비난합니다. [낙태로 인해] 벌어지는 일은 침묵의 홀로코스트입니다.”
 
그러나 피해자인 소녀와 가해자인 의붓아버지는 파문당하지 않았습니다. 소녀는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파문당하지 않았고 대주교의 설명에 따르면 의붓아버지가 파문당하지 않은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극단적으로 심각한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법에 따르면 그러한 죄가 자동적인 파문으로 벌 받는 것은 아닙니다. 낙태가 강간보다 더 중대한 행위입니다. 무구한 생명을 앗아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상파울로의 대주교는 소녀가 사는 지역의 대주교만큼 맹렬한 태도는 아니지만 조심스럽게 다음과 같이 가톨릭교회의 입장을 분명히 되풀이하였습니다.
 
“설사 폭력으로 인한 임신이더라도 그로 인해 수태된 생명은 인간으로서 항상 보호받을 것입니다. 폭력적으로 아기를 갖게 된 여성이 어떤 느낌을 받을지 이해할 수는 있지만, 이런 여성이 상황을 타개해 나가도록 도울 수 있는 가능성은 항상 존재합니다. 오늘날 의학적으로 산모와 아이의 생명을 보전하도록 도울 수 있는 방법도 많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낙태’에 관한 가톨릭교회의 입장은 성폭행이나 산모의 생명에 위협을 주는 경우라도 마찬가지라고 확인하면서도 그는 이 사건에 대해 내려진 파문 결정 때문에 교회가 사회적으로 져야 할 부담이 크다는 점을 솔직히 인정하였습니다.
 
충격과 논란에 휩싸인 브라질 사회
 

“임신중절 합법화에 반대하는 지도자들의 77%는 남성이며 그들은 100% 임신하지 않는다.” ©바바라 크루거, 임신중절합법화 공익광고

소녀의 임신과 중절에 뒤이은 파문 결정은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가톨릭 국가 중 하나인 브라질 사회 전체를 불붙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도그마가 사회 전체에 강요되어서는 안 됩니다. 크리스챤이자 가톨릭 신자로서 나는 가톨릭교회의 주교가 그런 보수적인 태도를 갖고 있는 게 개탄스럽습니다.”
임신중절 합법화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던 대통령 루이즈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도 나서서 공개적으로 교회를 비판하였습니다.
 
“의사들은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 아홉 살 소녀의 생명을 구한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의약이 교회보다 올바릅니다.”
 
소녀의 중절시술에 참여한 의사 한 사람은 그 결과 논쟁이 벌어지고 브라질의 제한적인 임신중절 관련 법률이 주목받을 것이기 때문에 파문 결정이 역설적으로 반갑다고 했고, 또 다른 의사는 파문 결정에도 불구하고 계속 당당히 교회에 나갈 거라고 인터뷰했습니다.
 
“브라질 여성은 ‘이빠네마에서 온 소녀’처럼 자유롭지 않다.”
 
건강보건정책에 관한 NGO인 IPAS의 활동가인 베아트리츠 잘리는 이 소녀의 임신중절과 파문 사건이 외국에서 브라질 여성들에 대해 가지는 자유분방한 ‘이빠네마에서 온 소녀’ 이미지가 변하는 계기가 될 거라는 생각을 밝혔습니다.
 
“우리는 여성과 미성년자에 대한 성범죄가 매우 자주 일어나는 남성 중심주의적인 가부장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재생산 권리는 끊임없이 범죄 취급당합니다.”
 
‘이빠네마에서 온 소녀(The Girl from Ipanema)’는 유명한 보사노바 곡으로서 남성의 구애를 받으며 해변을 거니는 사랑스럽고 발랄한 소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임신중절이 범죄가 되어서는 안 된다.” ©브라질의 임신중절 합법화 운동단체 “Front for the Right of Abortion” 제작

임신 세 건 중 한 건은 원하지 않는 임신으로서 연간 1백만 명 이상의 브라질 여성들이 ‘불법낙태’를 하는 한편, 여성 사망의 주요 원인이 임신중절이고, 약 25만 명이 제대로 처치를 받지 못해 생긴 후유증을 치료 받으며, 15세에서 19세 사이의 브라질여성 일곱 명 중의 한 명이 엄마라는 통계조사는 브라질 여성이 겪는 현실의 다른 일면을 보여줍니다.

 
비밀리에 할 수밖에 없는 ‘불법낙태’의 현장을 들여다보면 빈부격차 및 도농격차 또한 뚜렷합니다.
 
가난한 계층은 적절한 처우를 보장받을 수 없는 무허가클리닉에 가거나 위험한 약을 먹는 반면 형편이 나은 계층은 설비가 잘 되어 있는 수술실에서 의사들의 안전한 시술을 받습니다.
 
상대적으로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대도시에 비해  농촌지역은 임신중절에 대해 보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기에, 농촌여성들이 임신중절을 금지하는 법 때문에 더 많이 희생됩니다.
 
브라질 보건장관 ‘만약 남성이 임신한다면 이럴까요?’
 
이 소녀의 사건이 브라질 사회를 들썩이고 난 직후에 개최된 여성건강에 관한 한 회의에서, 소녀의 중절시술을 수행한 의사는 기립 박수를 받았습니다.
 
이 회의를 주관한 브라질의 보건장관 호세 고메즈 템포라오는 그 의사가 개막식에 들어서자 ‘엄청난 ’일을 해낸 그 의료팀을 위해 큰 박수를 쳐 달라고 청중에게 요청했던 것입니다.
 
“만약 남성이 임신한다면 임신중절 이슈를 이토록 해결되지 않은채로 내버려 두겠습니까?”
 
이 말은 남성인 호세 고메즈 템포라오 보건장관이 이 소녀의 사건 이전에 임신중절 합법화 법안를 둘러싼 논쟁 속에서 한 발언입니다.
 
임신과 출산을 담당하는 여성이 ‘제2의 성’이기 때문에 임신과 출산으로 인한 고초와 불이익을 고스란히 떠안고 심지어 생명과 건강, 자유조차 희생하라고 남성 사회가 강요하는 거 아니겠느냐는 그의 지적이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참고자료: BBC, CNN, Telegraph, Times, The Latin Americanist, Global Voices, Medical News Today에 실린 관련 기사들  [일다의 핫이슈] 낙태, 한쪽 문 닫는다고 문제가 해결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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