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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여성 몸 이야기⑦ 소리치기 
 
일본의 장애여성운동가 아사카 유호(쿠니다찌자립생활센터 소장)가 한국에 왔다. 유호는 골형성부전증 장애를 갖고 있는 여성이다. 1983년 미국 버클리 자립생활센터에서 연수를 받고 ‘동료상담’을 일본사회에 소개한 분으로, 이번에 한국의 장애인들과 ‘동료상담’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방한한 것이다.
 
여성으로서 운동가로서 내 역할모델이기도 한 아사카 유호와의 인터뷰는, 그녀가 공식일정을 마치고 귀국을 몇 시간 앞둔 4월 1일 오전에 이루어졌다.
 
“13살 때 자살에 성공하지 못해 기뻐요”
 

일본 쿠니다찌자립생활센터 소장 아사카 유호

골형성부전증은 뼈가 길게는 자라지만 굵어지지 못하는 병으로, 쉽게 골절을 일으키며 그로 인해 장애를 안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 특징이다. 그녀가 외부의 시선 때문에 자신의 몸에 대해 처음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다른 지체장애여성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어린 시절 스무 번 정도의 수술과 시설에서의 생활경험은 자신의 몸에 대해 특히 민감하게 반응하게 만드는 조건이 되었다.

 
“늘 어딘가 모자란 존재 취급을 받으며, 내 목숨이 환영받지 못하고 부정당한 것은 몸 때문이었어요. 굉장히 오랜 시간 이를 어떻게 볼 것인가 생각했죠. 그것은 도전이자 싸움이었어요.”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세상으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았던 것은 일본의 ‘우생보호법’(1996년에 폐지되고 모체보호법이 제정됨) 때문이었다. 장애인은 학교에도 갈 수 없는 환경 때문에, 유호는 13살 무렵 몇 차례나 자살을 기도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자살에 성공하지 못해서 참 기뻐요.” 유호가 말했을 때 나도 모르게 “정말 축하해요!”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만일 자살에 성공했다면 그녀의 빛나는 얼굴과 미소를 볼 수 없었을 테니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생각에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때 열세 살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살고 싶었을지도 몰라요. 칼로 손목을 그으면서 도저히 깊게 그을 수가 없더군요. 내 몸이 ‘아파!’ 하고 소리쳤기 때문이죠. 가스를 틀어놓고 자살하려고 했을 때는 냄새가 너무 심해 중단했어요. 몸이 반응한 것이었어요. 몸은 참으로 현명합니다.”
 
자신의 생명을 완전히 부정한 후에 몸은 참으로 현명하다는 소중한 깨달음을 얻은 유호. 그녀가 그러한 깨달음에 도달하기까지 얼마나 혹독한 세월을 보냈을지 어느 정도 짐작이 되었다.
 
의사들의 폭력, 우생보호법의 폭력
 
“어렸을 때는 수술을 스무 번이나 하고 주사도 많이 맞으면서 꼼짝없이 의사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었어요. 시설에서도 줄곧 사회복지사, 의사들의 폭력을 견뎌야 했지요. 한번은 웅변대회에 나가게 되어 ‘사회복지는 필요 없다, 중증은 의학의 대상일 뿐이다’라는 내용으로 발표를 하려 했더니 대회에 못나가게 했어요. 또 엑스레이를 많이 찍어 방사능에 많이 노출 되어야 했고요. 채혈을 많이 하는 것도 싫었어요. 왜 채혈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연구논문용이라며 그냥 잠자코 있으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어요. 혼자서 많이 울었지요. 스물다섯 살이 될 때까지 사람이 누군가를 죽여도 죄가 안 된다면 의사 세 명을 죽이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의사들이 미웠어요. 꿈을 꿔도 그 의사들과 싸우는 꿈이었구요.”
 
너무 어렸기에 자신을 억압해야만 했던 20년 세월을 겪은 후 아사카 유호는 장애해방운동에 뛰어들었다. 관공서에 찾아가 큰 목소리로 소리치기도 하고 싸움도 많이 했다. 그때 참 재미있었다는데, 마구 소리를 지르면서 어릴 적 자신을 실험대상으로 삼았던 의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했다고 한다.
 
20대는 ‘어떻게 하면 우생보호법을 없앨 수 있을까’ 생각하며 보냈다. 당시 일본에서 장애가 있는 사람은 불임시술, 임신중절을 강요당하는 실정이었다. 법률이 개인의 선택을 짓밟았던 것이다. ‘장애는 올바르지 않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유호가 장애해방운동에 뛰어든 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뇌성마비 남자들이 대부분이었던 장애해방운동 속에서, 뼈가 잘 부러지는 병을 갖고 있던 유호의 몸의 조건은 매우 불리했다. 뇌성마비 남자들은 항상 몸으로 대항했기 때문이다. 경찰이 오면 동료들이 제일 먼저 그녀를 도망치게 배려해주었지만, 그들은 상대적으로 강했기 때문에 아무리 배려해줘도 그녀로서는 무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자궁이 없는 장애여성
 
1994년 카이로에서 열린 인구개발국제회의에서 아사카 유호는 가장 큰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유호는 일본의 우생보호법에 대해 발언함으로써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전 세계 2천명이 모인 회의에서, 휠체어를 탄 사람은 그녀를 포함해 아랍계 여성 단 둘뿐이었기에 더욱 관심이 집중됐다.

 
그리고 다음날 한 신문에 “자궁이 없는 장애여성”이라고 대서특필되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2년 뒤인 1996년에 자신과 같은 장애를 가진 우미라는 예쁜 딸을 출산한 유호인데, 그녀가 자궁이 없는 장애여성이라니! 실제 그녀는 자궁을 적출당한 당사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가까운 친구들 몇 명이 자궁 적출을 당하거나 방사능에 노출됐기 때문에, 그것은 남의 일이 아니었다.
 
장애여성이라는 이유로 여성으로서의 가능성을 차단당해야 했던 친구들을 대변해 그녀는 전 세계인이 모인 자리에서 목소리를 높였던 것이었다. 그리고 2년 뒤, 일본 우생보호법에서 불임시술 관련 내용을 삭제하는데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한 친구는 엄마가 죽기 전, 자신이 죽고 나면 생리가 나오기 전에 자궁적출 수술을 하라는 유언을 남겼어요. 아버지와 오빠만 있는 가정에서 생리 처리를 해줄 가족이 없을 것을 염려해서였죠. 그리고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뒤 열흘 후에 자궁적출 수술을 받았구요. 그래도 그녀는 지금 지역에서 잘 살고 있어서 다행입니다. 다른 두 친구는 시설에서 직원이 수술을 권한 경우인데, 10대 때 수술을 하고 나니 여성호르몬 분비에 문제가 생겨 목소리도 걸걸해지고 남자 같은 모습으로 변해갔어요. 게다가 우울증도 심하고 갱년기도 빨리 와 고생하고 있어요. 그 친구들 중 하나는 십대 때 수술할 당시 자궁을 적출하고 나면 아기를 낳지 못하게 되는 줄 몰랐다고 해요.”
 
자신이 겪은 일을 적극적으로 주변에 알린 친구도 있었다. 방사능에 노출이 많이 되어 자궁이 망가지고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의사들은 연관성을 계속 부정했다. 친구는 이 경험을 담아 “우리가 당한 것들을 잊어버리기 싫어”라는 제목의 15분짜리 비디오 필름을 만들어 배포했다.
 
한국에서도 10년 전쯤 시설에서 살고 있는 장애인이 강제불임시술을 당해 사회문제로 등장한 적이 있다. 그때 이후로 장애인의 재생산 권리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는 의문이다.
 
아사카 유호처럼 사회로부터 차별과 억압을 받으며 자신의 몸을 망가뜨리거나 부정당한 장애여성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폭력에 대응하며 살아가고 있다.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장애여성은 폭압적인 사회를 견디며 대응하고 있고, 세상이 조금씩이라도 변화하기를 간절히 염원하며 우리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백발마녀)
 
(* 아사카 유호가 말하는 중증장애인의 동거, 결혼 이야기는 다음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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