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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신의 도서관 나들이] 행복과 평화를 얻는 길

10시 30분 전이다. 반납할 책을 챙겨들고 서둘러 집을 나왔다. 밤바람이 아직은 차다. 낮 시간동안 이런 저런 일을 하다 보니, 이렇게 늦은 시간에야 도서관 갈 짬을 낼 수 있었다. 그나마 지난 3월부터 종합열람실이 밤 10시까지 문을 열어두면서 가능한 일이다. 밤에 도서관 갈 일이 뭐가 있겠나, 했었지만 이렇게 막상 갈 일이 생긴다. 늦은 시간이라 사서를 피곤하게 할 것 없이 얼른 기계로 도서를 반납했다. 필요한 책을 찾아 대출까지 끝냈는데도 아직 문 닫을 시간까지는 몇 분 남았다. 그리고 열람실을 둘러보니, 늦은 시간에도 책 읽는 사람이 여럿 눈에 띈다.

이번에 대출한 책은 존 러스킨의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느린 걸음, 2007)이다. 이미 감동적으로 읽은 책이지만, 요즘 내가 철학을 가르치고 있는 한 고등학생 때문에 이 책을 다시 집어 들게 되었다.

이 학생은 누구보다도 총명하지만, 물질적으로 큰 풍요를 누리는 것 이외에 다른 꿈이 없어 늘 나를 안타깝게 했다. 물론, ‘부자 되세요’가 덕담인 이 나라에서 그녀의 모습이 유독 특별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부와 행복은 별개라는 것, 아니 부를 추구하는 이상 진정한 행복을 맛볼 수는 없다는 것을 꼭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19세기 사람, 러스킨의 ‘부’에 대한 칼날 같은 비판의 목소리를 꼭 들려주고 싶었다.

이웃을 가난으로 내모는 부자의 기술

‘왜 그토록 부자가 되고 싶으냐?’는 나의 질문에 학생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질 수 있고, 큰 집에서 살 수도 있고, 자녀들에게 원하는 공부를 마음껏 시켜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부자가 되고 싶은 다른 사람들처럼, 우선 자신의 물질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부가 필요한 것으로 보였다.

실제로 많은 사람은 막연히 부를 추구할 때 개인적 욕망을 충족시켜 행복해지는 것 이외에 다른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막상 부를 쌓기 시작하면, 나의 물질적 욕망을 채우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타인에게 인정받으려는 욕망은 비뚤어지고 과시의 욕구로 변질된다. 즉 타인의 시선 앞에서 자신을 부풀려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자 하는 허영심은 날로 커져만 간다. 하지만 아무리 물질적 욕망을 충족시켜나가도 내면적 행복에서는 자꾸 멀어질 따름이다. 지금까지 현자들이 수없이 반복해 우리에게 전하고 있지만, 아직도 우리가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진실이 그것이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부를 추구한다는 것이 단순히 내 개인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행복을 이루는 문제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한 개인이, 또는 한 집단이 부를 추구하고 획득한다는 것이 다른 개인, 또는 다른 집단에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생각지 못하고 놓치거나 그냥 무시해 버린다.

“‘부’라는 명목 하에 사람들이 실제로 욕심내는 것은 본질적으로 타인에 대한 지배력이다. (...) 그리고 이 부의 힘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가 지배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가난에 정비례하고, 또한 우리만큼 부자이고 공급이 제한되어 있는 물품에 대해 우리와 동등한 대가를 기꺼이 지불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수에 반비례한다. (...) 평범한 의미에서 ‘부자’가 되는 기술은 절대적으로나 궁극적으로나 자신을 위해 많은 재산을 모으는 기술일 뿐만 아니라, 이웃이 자기보다 적게 소유하도록 획책하는 기술이기도 하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자신만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 최대한의 불평등을 확립하는 기술”인 것이다.” (존 러스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제 2편 ‘부의 광맥’-콘힐 매거진 1860년 9월호)

러스킨은 우리에게 ‘인간관계적’ 측면에서 ‘부’의 진실을 들려주고 있다. 그에 의하면, 부자의 기술이란 이웃을 가난 속에 방치하고 빈곤으로 내모는 기술이자 인간들 사이의 불평등을 고착화하는 기술이다. 내가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바로 지구 위에서 나랑 함께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내몰린 처참한 빈곤의 현실에 눈을 감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아니 더욱 가난해지도록 끊임없이 획책하는 데 동참해야 한다면 어떨까? 그래도 부자가 되고 싶을까? 타인의 희생을 대가로 부자가 되어서도 과연 행복할까?

소위 부자들은 사적 공간 속에서 타인의 노동을 헐값에 사 들여 자신이 감당해야 할 노동을 전가시키며 살아가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이윤을 늘리는 데 골몰한다. 노동력만 착취하는 것이 아니다. 생존을 좌우하는 식량조차도 이윤을 늘리는 투기의 대상으로 삼는다. 타인의 생존은 아무래도 관계없다. 돈만 벌면 되는 것이다. 아니, 누군가 굶어죽어야 돈이 생긴다면 기아에도 눈을 감는다.

타인을 지배하고, 가난으로 내모는 것은 큰 부자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잘 사는 나라의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사람 역시도 공모자가 아니라 자신할 수 없다. 먹고 입는 것을 포함해서 내가 물질적으로 누리는 것이 가난한 나라의 농부나 노동자를 착취하고, 그곳의 자원을 수탈한 데서 얻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모른 척 한 적은 없나? 내가 물질적 욕망을 충족하려고 하면 할수록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뜨려야 하고, 또 얼마나 지구의 자원을 낭비하고 훼손시켜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빗겨갈 수는 없다.

부를 끝없이 추구하는 한, 평화는 없다

부를 추구하며 나만의 끝없는 탐욕을 채워나가려 하는 한, 타인의 희생은 불가피하다.  간디의 말대로, 이 지구의 자원은 우리 생존적 필요를 충족시키기에는 충분할지 몰라도 어리석은 탐욕을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상기해야 할 때다. 여러 사람에게서 같은 생각을 만난다. 과거의 사치품을 필수품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현대인을 비판하는 슈마허의 생각도 그렇다.
 
“부자는 세계의 한정된 자원을 터무니없이 많이 필요로 하므로, 힘도 없고 저항도 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뿐만 아니라 그 이상으로 다른 부자들과도 충돌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 미를 구하고 덕을 쌓는 일은 모든 사람이 번영을 이룩한 후에 해도 되며, 정신적 내지 도덕적 회의에 빠지는 일 없이 한결같이 부를 추구하면 세계에 평화를 구축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현실을 무시하는 일이며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인 일이다.” (E.F. 슈마허 <작은 것이 아름답다>(문예출판사, 2002) 제 2장 ‘평화의 영속성’)

밑 빠진 독과 같은 부자의 욕망은 결국 사람들 사이의 충돌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는 지적은 중요하다. 인간이 부를 끝없이 추구하는 이상, 평화는 없다. 슈마허는 주장한다. 우리가 욕망을 줄여야만 사람들 상호간의 긴장, 갈등, 충돌을 줄일 수 있고 전쟁의 근본 원인을 없애 진정한 평화의 길로 들어 설 수 있다고.

타인을 공존해야 할 존재, 존중해야 할 존재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지배하고 착취해서 나의 이익을 증진시켜야 할 도구로 본다면, 어떻게 평화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해 낼 수 있겠는가. 억압당하고 박탈당하는 자들의 절망과 분노가 폭발하는 것은 당연하다. 부자들이 돈을 퍼부어 사회 안전을 유지하려고 발버둥을 쳐보아도 그것은 미봉책에 불과하다. 부당하게 지배받고 억울하게 빼앗기는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평화로운 사회가 가능하겠는가? 평화롭지 못한 세상에서 어떻게 나만 홀로 행복할 수 있겠는가?

언젠가부터 다들 부자를 꿈꾸고, 부자 되라는 말을 인사로 건네고, 부자임을 과시하고, 부자임을 부러워하는 그야말로 부자 권하는 사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서로를 짓밟고 올라서는, 약육강식의 동물의 세계보다 더 잔혹한 경쟁사회가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정신문명의 퇴보가 아닌가?

물론, 우리 자신은 물질적 욕망을 잘 제어해 낼 수 없는 어리석은 존재일 수 있다. 그래서 그 욕망의 끈을 완전히 놓지 못할 수도 있다. 또 내가 가난으로 고통 받고 있다면 속으로 부자가 되어 빈곤을 탈출하는 꿈을 꿀 수도 있다. 하지만 타인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부자의 꿈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또 부자 되라는 이야기가 감히 덕담의 탈을 써서도 안 된다. 생존을 위해 필요한 이상의 부는 결코 내세울 거리가 아니다.

지금 우리 사회, 아니 이 지구에서 우리가 꿈꾸어야 할 것은 평화이고, 행해야 할 것은 나눔이다. 비록 내가 조금 덜 가진다고 해도 서로 나누며 평화를 이룰 때, 행복할 수 있다. 만나면 서로 평화를 인사하고, ‘많이 나눕시다’를 덕담으로 이야기하는 사회는 정녕 불가능한가?

나는 미래 사회를 짊어지고 나갈 청소년에게서 그 희망을 포기할 수 없다. 물질적 욕망을 채우려하지 말고 부를 추구하지 말고 가진 것에 만족하고 스스로 가난을 택하는 성숙을 말하는 현자들, 그들의 이야기가 케케묵은 궤변처럼 전락한 오늘날에도 꾸준히 그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일다 www.ildaro.com

[다른 칼럼 보기]   ‘일’이 나를 만든다  | 빗물의 진실을 아시나요? | ‘도서관 나들이’를 시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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