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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범죄와 ‘아레이오스 파고스’ 
 
성폭력 사건 가해자에 대해 법원이 무혐의 판결이나 경미한 처벌 판결을 내리고 있어, 재판부의 법 해석에 대한 강한 문제제기가 계속되어 왔다. 특히 아동성폭력 사건에 대해 관대한 판결을 내리거나, 정신지체 장애인의 ‘항거불능’ 상태를 법적으로 잘못 해석하여 성폭력을 인정하지 않는 등의 판결은 법의 취지를 의심케 하는 사건들이다.

법원의 이러한 법적 해석에 대해 ‘법과 정의’에 대해 성찰하게 하는 역사적인 일화를 하나 소개할까 한다. 법의 정의에 대한 근원적인 개념으로 거슬러 올라가 살펴보면, 현재 법원의 성폭력 범죄에 대한 태도가 얼마나 피해자의 인권을 도외시하고 법의 정의를 벗어나 판결하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이 법의 정의인가

그리스어로 대법정은 ‘아레이오스 파고스(Areios Pagos)이다. 이 단어의 뜻은 ‘아레스의 언덕’인데, 이 언덕에서 아테네 시민 12명이 인권과 정의를 세우기 위해 첫 배심원 재판을 열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스 사람들은 아직도 아테네 대법정을 이 언덕의 이름을 빌려 부르고 있는데, 기원은 그리스 신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법정의 어원이 된 ‘아레이오스 파고스’에서 올림푸스 열두 신이 모여 첫 판결을 내린 사건은 공교롭게도 성폭력 사건이다.

사건의 개요는, 전쟁의 신으로 알려져 있는 아레스가 숲 속을 거닐던 중에 비명소리를 듣게 되면서 시작된다. 아레스가 소리가 난 쪽으로 가봤더니, 자신의 딸 알키페가 강간을 당하고 있는 게 아닌가. 아버지로서 이 장면을 목격하게 된 아레스는 성폭력 가해자를 그 자리에서 죽여버린다. 그리고 자신의 딸을 구하게 되는데, 뒤늦게 알고 보니 딸을 강간한 자는 다름아닌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들 할리로티오스였다.

위계서열 상 포세이돈은 제우스 다음으로 간다고 말을 한다. 거의 제우스에 버금가는 권력을 가진 2인자 포세이돈은 자기 아들을 죽였다는 이유로, 아레스를 살인죄로 고발한다. 그렇게 해서, 올림푸스 열두 신들은 이 언덕에 모여 역사상 처음으로 재판을 하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막강한 포세이돈의 권력에도 불구하고 신들은 오랜 고민을 거듭한 끝에 아레스의 행위가 정당함을 인정하고, 아레스에게 무죄를 선언한다. 그 후, 이 언덕은 첫 배심원 판결이 열린 곳이라고 기념되어 ‘아레이오스 파고스’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법의 정의를 상징하는 대법정을 이 언덕의 이름을 따서 지어지게 된 것이다.

그리스 신화 속의 일화가 주는 메시지

그리스 신화 속에서 법 정의와 인권을 상징하는 이 일화가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최근 우리의 법원은 일화 속에 나타나있는 법의 취지와 인본주의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성폭력 범죄 가해자들이 법의 허점을 이용해 무죄선고를 받는가 하면, 오히려 가해자들이 파렴치하게도 성폭력 사건을 공론화시킨 용기 있는 피해자 및 시민사회단체를 명예훼손 혹은 무고죄로 역고소해 피해자를 위협하는 수단으로 사용한 것은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것은 사회적 인식의 부족 탓을 하기 앞서, 피해자 인권을 위해 존재해야 할 법원이 제 기능은커녕 오히려 피해자 인권을 무시하고, 강한 자들이 큰소리를 칠 수 있는 사회풍조를 조장하고 있는 꼴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몇년 전, 말로만 듣던 ‘아레이오스 파고스’를 방문했다. 아크로폴리스에서 아고라로 내려가는 길목에 있는 이 언덕에 앉아 아테네시를 한 눈에 내려보며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을 맞으며 한동안 앉아있었다.

당시 이 언덕에 방문한 사람이 많지 않아 한적하게 오후 햇살을 쬐고 앉아있는데, 언덕을 힘겹게 오르는 다른 여행객이 있었다. 언덕 위에 올라선 그들은 아버지와 딸로 보였는데, 여자아이는 대리석 바위에 올라서서 아래에서부터 언덕 위로 불어오는 바람을 안고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아버지는 딸이 자유를 느끼고 있는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약자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법과 제도, 자유와 정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과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평등한 사회. 한국사회로 돌아와 이런 단어를 되뇌일 때면 너무도 큰 이상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 윤정은/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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