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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즘 새지평

‘여자춤’과 ‘남자춤’ 사이 어디쯤에서

그 여자들의 물결 일다 2021. 10. 27. 12:34

[젠더의 경계 위에서] 춤 안에서 마주하는 경계들

 

※ [젠더의 경계 위에서] 시리즈에선 확고한 듯 보이는 성별 이분법의 ‘여성’과 ‘남성‘, 각각의 한계를 재단하는 ’여성성‘과 ’남성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다양한 경험과 도전, 생각을 나누는 글을 소개합니다.  일다 https://ildaro.com

 

춤추는 몸과 젠더의 경계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원고 요청을 받고, 고민이 깊어졌다. 나는 이런 상황을 은연중에 두려워하며 직접 말하길 피해왔기 때문이다. ‘춤추는 사람’이라는 정의에 대해서도, ‘젠더의 경계’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내 경험과 감각을 말로 잘 엮어낼 자신이 없었다. 더 정확히는 오해받는 게 두려웠다. 조용히 살다 보면 잘 설명할 수 있는 때가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지도 10년쯤 되었다. 그러나 달라진 건 노화로 줄어든 몸의 에너지뿐이다.

 

나는 사실 춤을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고, 내 춤을 해석하기 어렵고 두려워서 적당히 외면할 구실을 만들어온 사람에 가깝다. 춤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궁금해졌다. 왜 내가 할 수 있는 얘기가 있다고 생각하셨을까? 이렇게 한 마디 꺼내길 어려워하는 ‘나’와 누군가가 보는 ‘나’ 사이에도 틈이 있는 것 같다. 춤, 젠더, 경계 이 모든 주제가 기대와 오해, ‘어쩌면 이해’의 틈에서 구성된 무엇 같다.

 



▲ 극단 Y의 연극 <퍽킹젠더>(강윤지 연출, 2020)에서 공연 중인 이누와 팀 노댄스(NoDance).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몸에 잘 붙지 않았던 ‘여자춤’

 

춤이라는 것을 처음 접한 건 초등학생 때였다. 나는 댄스신동이 아니었기 때문에 마이클 잭슨을 보고 꽂혔다거나 하는 그런 멋진 기억은 없고 유행에 빠른 친구들이 하는 웨이브나 팝, 발을 꼬아대며 움직이는 스텝을 골목에서 땅따먹기 배우듯 따라 한 게 시작이다. 그냥 재밌어 보여서 몇 번 해본 움직임들이 이 그룹 저 그룹 잘 묻어다니던 내 성격과 결합해 수련회 장기자랑과 댄스동아리로 흘렀다. 그건 발야구나 태권도, 달리기와 다를 것 없는 그냥 움직임 놀이였다.

 

고등학생 쯤 되어서야 ‘여자춤’과 ‘남자춤’이란 게 정해져 있는 듯한 분위기를 감지했으나, 소화하지 못한 개념은 금방 잊혔다. 솔직히 좋아하는 음악들에 이래저래 맞춰 움직이다 보면 젠더의 경계 같은 건 인지하기도 어려웠다. 음악을 온몸으로 좋아할 수 있고, 친구들이랑 같이하면 얼음 땡 같은 움직임보단 모양이 그럴듯해 쉽게 성취감을 주는 놀이. 눈치가 없는 성격도 한 몫 했겠다. 어쨌든 춤은 그 자체로는 별 의미가 없었다. 특별할 것도 없는, 내가 좋아하는 많은 놀이 중 하나.

 

특이할 게 있었다면, 난 ‘여자춤’을 몸에 붙여보고 싶었던 적이 딱히 없었다. 여자춤을 욕망하지 않는다는 건 남자처럼 되고 싶다는 걸까? 하지만 나는 브레이크 댄스만큼 발레를 배우고 싶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가장 몸에 담고 싶은 움직임은 현대무용에 있다. 내 안무를 고르거나 직접 짤 때엔 감정이 깊고 몸 선이 곱게 흐르는 것을 원했다. 그니까 뭐랄까 나는 고운 선이 흐르는 브레이크 댄스를 현대무용 작품 안에서 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나는 여자춤 안에 남자춤을 넣고 싶은 건가? 그건 모르겠지만, 브레이크 댄스는 그 당시 이름부터 비보잉(B-Boying)이었고 학원을 겨우 찾아가면 힘 센 남자애들밖에 없었다. 발레학원엔 여자애들이 많았지만 섞이기 어려웠고, 백조 사이에 낀 오리 같이 느껴졌다. 내가 추는 춤이, 내가 추고 싶은 춤이 뭔지는 알 것 같은데,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넌지시 주워듣는 춤의 장르가 많아질수록 하우스, 락킹, 칼춤, 탈춤 등 하고 싶은 건 늘어갔다. 하지만 난 이걸 추니까 “여자춤도 춰!”라고 얘기할만한 취향은 영영 생기지 않았다. 특히 ‘섹시 컨셉’은 정말 창피하기만 했다. 어려서부터 자세가 안 좋아 앞으로 구부정하고 가슴에 지방이 적고 허벅지가 튼튼한 내 몸은 거울에 비치길 기대하는 목표 그림과 불화했다. 무엇보다 그런 춤의 캐릭터나 정서를 표현할 줄 몰랐다. 섹시함이란 것을 내 몸과 마음, 상상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남자춤’은 이해하기 쉬웠다. 당시 유행가엔 자신의 지독한 감정에 푹 빠진 표현이 많았다. 인기 남자 아이돌의 안무 스타일은 아크로바틱이어서 나와 친구들은 서로를 세워두고 순서대로 뛰어넘거나 몸으로 탑을 쌓아 다같이 데구르르 굴러 무너지곤 했다. 내 감정에 취하고 온 힘을 다해 몸을 날리는 게 고도의 매력을 다루는 동작보다 훨씬 쉬웠다.

 

게다가 또래 친구들이 박수 치는 ‘어려운 춤’은 거의 ‘남자 안무’였다. 춤을 잘 추는 게 뭔지 몰랐고, 가요 프로그램 영상 돌려보고 친구들이랑 움직여보면서 움직임을 찾아온 내가 꿈꿀 수 있는 ‘잘 추는 춤’의 선택지는 넓지 않았다. 지금 같은 유튜브 시대에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를 볼 수 있는 아이였다면 막막함이 덜어졌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땐 그랬다.

 

고등학교 3년간 동아리에서 남자 아이돌 춤을 나오는 족족 거의 다 췄다. 여자 아이돌 춤도 종종 췄지만 그 장르에서 난 ‘너무 키가 컸고’ 얼굴이나 몸에 시선을 끌어오는 동작을 얼버무리는 걸 주체하지 못했기 때문에 무대까지 올라가진 못했다. 반면 너무 큰 키는 남자 아이돌 춤에선 유리하게 작용했고, 파트너 무용에서도 ‘그림이 되는’ 특징이 있었다. 조금 더 자신의 매력을 뽐낼 줄 아는 친구들은 나아가 ‘섹시 컨셉’도 췄지만, 나는 다 같이 추는 춤에서 센터에 서는 애였을 뿐이다.

 

춤을 추고 있을 땐 문제가 없었다. 대화 중 “남자춤”이나 “여자춤”같은 단어를 사용할 때엔 은연중 모두 이게 이상한 말이라는 걸 느꼈다. 그런 말을 대체할 언어가 없어 답답하면, 우린 포지션을 바꿔 추고 놀았다. ‘너 느끼한 옆집 오빠 스타일 같아’, ‘넌 책만 읽던 단발머리 소녀가 처음 장기자랑 나온 것 같아’ 이런 말을 하며 서로를 납작하게 놀리고, 얼마든지 넓어지고 변하는 평가 속에서 안심하며 냅다 도전하고 박수 쳤다.

 



▲ 다양한 춤의 시공간을 만드는 ‘블루홀’에서 기초반 리더를 맡고 있다. 기초반 수업 중인 모습. (이누 제공)

 

“혹시 남자가 되고 싶어?”

 

그런데, 종종 새로 친해지게 된 친구들이 물었다. “네 무대 봤어. (여기까진 새 학기에 늘 하는 인사다.) 혹시 남자가 되고 싶어?” 그 은밀한 질문엔 어떤 가시도 없었지만, 거기에 대한 대답이 내 안엔 없다는 감각, 텅 빈 불안이 서서히 쌓였다.

 

내 머리가 짧아서 그런가? 미용실에 가면 미용사는 내게 귀 파기(머리로 귀를 덮지 않고 귀 둘레에 맞춰 자르는 것) 여부를 언제나 조심스럽게 물어보셨다. “이렇게 하면 너무 남자같을 텐데 괜찮으세요?” 음, 뭐 머리는 다시 자라니까 설사 선생님 실수로 두두두 밀어버리셔도 괜찮다고 할 거긴 한데, 제가 이러면 남자같을 까요? 왜요? 차마 묻을 수 없었다. 나는 아무도 공격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런 질문은 자체로 가시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나는 이목구비가 물렁살이라 머리가 짧아야 훨씬 예뻐 보였다. 짧은 머리카락은 고도의 꾸안꾸(꾸민 듯 안 꾸민 듯) 같았고, 망설였던 헤어디자이너분들도 커트 후엔 “짧은 게 잘 어울리시네요!” 하셨다. 거기에 “예쁜 남자애 같다”는, 뉘앙스는 칭찬인데 의미는 어려운 말이 덧붙여지곤 했다.

 

나를 향해서 오는 다양한 해석들은 계속해서 서로 충돌했기 때문에, 꾸밈이라는 건 점점 더 어렵게 느껴졌다. 자신의 매력을 가장 뽐낼만한 무대화장을 할 때도 어떤 스타일이 나에게 ‘좋은’지 알아내긴 도무지 어려웠다. 이런 저런 조언을 받아 꾸밀수록, 나는 내 안무를 추기에 ‘너무 여자 같은 얼굴’이 되었버려서 결국 무대에 올라가기 전 화장을 지웠다.

 

어느 방향이든, 내가 뭘 할수록 미끄러지는 것 같았다. 뭐든 간에 하나가 잘 어울리면 좀 편하련만. 눈치게임하듯 배우는 ‘남성성’은 ‘여성성’만큼이나 나와 멀리 있었다. 선을 그어보자면, 나는 딱히 또래에 비해 힘이 세거나 씩씩하거나 호전적이지 않았다. 수줍음이 많고,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에 말도 곱게 하는 편이고 글씨도 동글동글 귀엽게 썼다.

 

들여다보고 고민할수록 여성성/남성성이란 구분은 날 헷갈리게 했다. 어떤 것도 내가 행하기에 불편하진 않았지만, 사람들은 자꾸 내게 ‘생각보다 여자 같다’거나 ‘여자 같은 남자 같다’고 했다. ‘네가 남자였음 사귀고 싶었을텐데’라거나 ‘그렇게 하고 다녀서 남자친구 생기겠냐’고 했다.

 

빗나가는 평가와 질문들 속에서 스스로 대답을 못 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턴 나도 슬그머니 내 정체가 의심스러워졌다. 그 의심은 출구 없는 미로였다. 섹시 댄스를 못 추는 게 문제인가? 하고 한때 극복하리라 집착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도 어렴풋이 그게 문제의 본질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다. 당연히 미로에서 탈출할 수 없었다. 애쓸수록 실패만 늘었고 어떻게 해도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가장 춤에 가까웠던 10대 말엔 이 고민이 아주 숨 막혔다. 얼마나 고민이 됐냐면 남자가 되고 싶냐는 질문, 레즈비언이냐는 질문을 하도 받고 그게 버거워서 진로 고민은커녕 남들 앞에서 춤추는 게 두려워졌다. 그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이해해야 할 게 많았다. 남자가 되는 게 뭐지? 성별적합 수술을 하고 싶냐는 말인가? 레즈비언은 뭐지? 좋아하는 여자가 있냐는 얘긴가? 평생 남친이 없어야 하나? 초등학교 3학년 0반, 내게 반지 줬던 그 남자애가 사랑이었나? 가시 없는 질문들이 내 안에서 켜켜이 쌓여 따끔거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춤추는 시간보다 질문의 자리가 커졌다. 가만히 있을 걸, 왜 춤을 춰서 온갖 질문을 받게 됐을까. 나 자신이 피곤해졌다. 웅크렸다. 춤추는 것이 비밀일 때 가장 안전했다. 나는 나의 춤을 사랑할 힘이 없었기 때문에 ‘춤추는 나’는 점점 나에게조차 은밀해졌다.

 

나는 ‘진짜 춤’을 추고 있는 걸까?

 

지금도 나는 춤을 이야기하기 부끄럽다. 춤을 추는 게 부끄러웠고 동시에 춤을 포기하는 게 부끄러웠던 감각이 내게 남아있다. 뭘 부끄러워하는지 정확히 알기 전에 부끄러움을 들키면 안 될 것 같은 두려움이 먼저 선명해졌고, 그 이후로도 오래도록 나와 함께 있었다. 내 정체와 두려움의 정체를 함께 의심하면서 난 언제나 길 잃은 상태로 숨죽여 도둑처럼 움직여왔다. 그래서 지금 빈 종이 위에 그 텅 빈 길들을 어떤 말들로 적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토록 언어 없음이 껄끄럽고 부끄럽다.

 



▲ 오늘 춤추는 모두가 댄서다. 다양한 춤의 시공간을 만들고자 하는 ‘블루홀’의 슬로건을 담은 이미지.

 

그렇지만. 나는 지금도 춤을 춘다. 여전히 설명 아니 설득할 수 있는 건 없이, 춘다. 내겐 그 사실만이 명확하다. 사람들 앞에서 춤추는 게 두려워졌던 날을 기억하면서, 경계라고 읽히곤 하는 선을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한다.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자꾸 반복하면 그건 또 춤 같기도 하다. 어느새 나의 몸만, 움직임만 있다. 언어가 없고 무한히 비어있다.

 

내가 추는 춤을 자신도 춰보고 싶다 하는 사람들이 생겨, 최근엔 곁을 내어보기도 했다. 여자춤, 남자춤, 섹시함, 잘 하고 못 함 등의 표현에 따옴표를 붙여 그 의미가 고정된 것이 아님을 설명하면서, 사람들과 춤을 춘다.

 

안무는 악보다. 우린 모두 몸이라는 고유한 악기를 갖고 있다. 눈을 안으로 뜨고 내 몸의 감각에 집중하자고 말한다. 매주 다양한 이들을 만나 몸과 말을 다 해 동작을 설명하고, 각기 다른 몸으로 각기 다른 감각을 담아 각자, 같은 노래에 움직인다. 같이 논다. 각 악기가 빚는 역동이 내 눈엔 정말,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을 믿기 위해, 그때 내게 필요했던 동료가 되기 위해, 용기 내어 언어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도 이기적이고 방어적인 내 마음은 해석을 모두 미뤄두고 ‘당신이 한 번 춰보는 게 어떻겠냐’는 말만 남기고 이 모든 글을 지우고 싶어 한다.

 

여전히 춤을 모르겠다. 내가 여자춤을 추고 싶은지 남자춤을 추고 싶은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진짜 춤’을 추는지 종종 의심스럽다. 나는 ‘춤추는 사람’인가? 춤이라는 문화와 역사의 문법을, 경계를 하나도 배우지 못한 나는 ‘댄서’인가? 나는 사람들에게 춤을 감히 가르칠 수 있나? 춤을 가르친다는 건 뭘 목표로 해야 할까?

 

하지만 더 이상 그런 질문이 날 옥죄지는 않는다. 모른 채로 움직이기로 한다. 의미의 경계는 내 몸과 내 몸이 아닌 것의 경계처럼 계속 닿아있는 채로 이동한다. 나는 또는 우리는 박자에 맞춰 몸을 펼쳤다 접었다, 조였다 풀었다, 뛰었다 엎드렸다 한다. 같은 동작을 보고 설명을 들어도 도무지 다른 모양으로 거울에 비치는 서로를 본다. 한시도 붙잡을 수 없는 시간 위에 흐르는 모든 물질의 역동성을 우리는 모두 다르게 읽어낸다. 그 정보는 각자에게 들어가 이름을 갖는다. 그게 어떤 경우에는 남성성이나 여성성이고 어떤 경우에는 하늘색, 매운맛, 진실 또는 허상일 것이다. 그 이름의 경계도 늘 움직이고 있다.

 

근데 이 모든 게 춤이 아니면 무엇일까.

 

[필자 소개: 이누. 오늘 춤추는 모두가 댄서라는 믿음으로, 고유한 각자의 움직임이 안전하게 받아들여질 다양한 춤의 시공간을 만드는 ‘블루홀’에서 기초반 리더를 맡고 있다. 떠도는 취미댄서들의 베이스캠프같은 동료가 되어 할머니 될 때까지 함께 재밌게 춤추는 게 꿈이다.]  일다 https://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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