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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숙소에서 자란 베트남계 여성의 ‘다른 저널리즘’

독일 <디 자이트> 온라인 판에서 일하는 바네사 부 인터뷰(상)


[하리타의 월경越境 만남] 독일에 거주하며 기록 활동을 하고 있는 하리타님이 젠더와 섹슈얼리티, 출신 국가와 인종, 종교와 계층 등 사회의 경계를 넘고 해체하는 여성들과 만나 묻고 답한 인터뷰를 연재합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어느 날, 스포티파이(음원 스트리밍 서비스) 앱 추천목록에 새로운 팟캐스트가 떴다. 제목은 ‘라이스 앤 샤인’(Rice And Shine). 커버사진은 검은 머리 여성 두 명이 아시아 슈퍼마켓 통로에 앉아있는 모습을 담고 있었다. 베트남계 독일 저널리스트 민 투 트란(Minh Thu Tran)과 바네사 부(Vanessa Vu)가 진행하는 독일어 팟캐스트로, 동남아시아 역사부터 버블티, 인종차별 반대시위까지 이주민 커뮤니티의 여러 이슈들을 다루는 토크쇼다. 독일사회의 다양한 목소리, 특히 좀 다르고 새로운 목소리를 찾아 다니는 내 눈에 단연 띄었다.


‘Rice An Shine’ 팟캐스트 공동진행자이자, 독일 유력 주간지 <디 자이트>(Die Zeit)의 온라인 판에서 기자 및 편집자로 일하고 있는 바네사 부를 만났다.


베트남계 독일인 저널리스트 바네사 부(왼쪽)를 코로나19 록다운이 한창인 11월 초 스카이프로 만났다. (촬영: 하리타)


바네사는 1991년 바이에른 주에 있는 한 난민숙소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의 부모는 베트남에서 일부러 아이를 갖지 않다가 독일에 오고 나서 정착을 희망하며 딸을 낳았다. 가족은 바네사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 여러 차례 강제 송환(deportation) 위기를 겪었다. 그러다 슈뢰더 총리 내각 시절에 이민법을 개정해 취학아동이 있는 망명신청자 가족에게 체류권을 우선 부여하면서 2년짜리 비자를 처음 받았다.


바네사 부는 뮌헨, 파리, 런던에서 문화인류학, 법학 및 동남아 지역학을 전공했다. 2017년, 독일 저널리즘 대학원(Deutsche Journalistenschule) 석사 졸업 후 자이트 온라인(Zeit Online)에 입사했다. 이듬해 저널리즘 전문 잡지인 <미디엄 매거진>(Medium Magazine)이 선정하는 ‘30세 이하 유망 저널리스트 30인’(Top 30 bis 30)상을 받았다.


Q. 자이트 온라인 지에서 현재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일하는지 궁금합니다.


바네사: “인턴으로 일하다가 정규직 제안을 받고 정식 입사하게 됐어요. 처음에 뉴스 보도팀에 있다가 2년 뒤 지금 있는 ‘팀 엑스’(Team X) 부서로 옮겼는데요, 여기는 특별판을 제작하는 부서로, 심층 리포트나 탐사 보도 같은 긴 기사를 주로 내보냅니다. 편집회의를 통해 주제가 정해지면 그에 적합한 소재들을 기자들이 직접 제안하고 취재 나가죠. 특별판 주제는 정치. 경제 분야에 한정되지 않아요. ‘뷰티’ ‘부의 분배’ ‘Z세대’가 주제로 선정되기도 했어요. 개인적인 사유를 기사에 반영하기 좋아하는 제 특성상, 지금 일이 상당히 즐겁습니다.


Q. 부서 분위기는 어떤가요? 이전에 다른 언론사들에서도 인턴 경험을 쌓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자이트 온라인만의 특색을 꼽자면 무엇인가요?


온라인 저널리즘이다 보니 자율성이 높아요. 저에게 커다란 놀이터와 같달까. 주제 선정 후 그 이야기를 적절히 하기 위한 포맷을 논의하는데, 전형적인 기사뿐 아니라 비디오, 포토에세이, 심지어 팟캐스트 형식으로 보도할 수도 있어요. 저는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라서 이렇게 형식에 제약 안 받고 다양한 실험을 할 수 있는걸 좋아해요.


가령, 올 여름에 ‘Z세대’를 특집으로 다룰 때는 기성세대의 틀에 가두지 않고 요즘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별도의 채널을 고안했어요. 인터넷 페이지에 전화번호를 하나 띄우면서 ‘여러분에게 정말로 중요한 게 뭔가요? 무엇이든 좋습니다. 음성 메시지를 남겨주세요!’라고 써놨지요. 종교적 견해부터 불평등, 기후변화에 대한 의견까지 여러 화제를 아우르는 음성 메시지들이 쌓였고, 이것들을 편집하고 않고 매거진에 그대로 올렸어요. 플레이 버튼을 누르면 인터뷰이들의 메시지가 바로 재생되는 방식인데, 그 다채로운 목소리를 들으면서 요즘 청년들은 역시 몇 마디로 획일화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어요. 이런 식의 보도는 우리 기자들도 처음이어서 새로운 실험이었던 셈이에요.


2019년 8월 ‘123개 청년들의 목소리’(123 Stimmen der Jugend)라는 제목으로 보도된 자이트 온라인 특집기사. 이름과 나이만 써놓고 무작위로 배열된 플레이 버튼들은 인스타그램 피드를 닮았다. 바네사는 다양한 주제를 다양한 형식으로 다룰 수 있는 온라인 저널리즘 일터에 크게 만족하고 있다.


Q. 저널리스트가 되겠다고 마음먹는 것은 언제인가요? 기억나는 계기가 있나요?


어릴 때 기억이 하나 있어요. 아버지가 저와 동생을 이층침대에 데려와 재우면서 물으셨어요. ‘너 기자가 되어보는 건 어떠냐? 세상을 다니면서 소식을 전하는 거다.’ 굉장히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 때 이후로 기자가 꿈이었던 것 같아요. 여동생을 독자로 두고 직접 쓴 그림과 글로 잡지를 만들기도 했는데요, 새 잡지가 완성되면 방과후교실에서 돌아온 동생이 찾아갈 수 있게 우편함에 넣어 두었죠. 녹음기가 생긴 다음에는 혼자 녹음하면서 라디오 쇼를 흉내내기도 했어요.


학창시절 전 말수가 적었고 어딜 가나 어색했어요. 친구도 별로 없었고요. 다른 사람들을 가만히 지켜보는데 익숙했어요.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말하지만, 당시에는 많이 힘들었죠. 인종차별적인 놀림이나 노골적인 차별을 워낙 많이 당하다 보니 그 상황 한가운데 있기보다 관찰자처럼 느끼는 편이 나았던 것 같아요. 


김나지움(대학진학을 목표로 한 학생들이 다니는 상급 고등학교. 수능에 해당하는 졸업시험 ‘아비투어’를 끝으로 교육과정이 마무리된다)과 대학교로 진학해서도 아웃사이더로서 외로움과 길 잃은 느낌은 계속됐어요. 거기에는 중산층 이상 아이들의 비율이 훨씬 높았죠. 큰 집에 살고, 주변에 책이 항상 넘쳐나고, 고학력자 부모가 숙제를 봐주는 아이들. 그들 속에서 외롭게 자란 경험이 지금 기자로서 이주민이나 가난한 사람들 같은 사회의 소수자에게 관심을 갖게 했을 거에요.


Q. 다른 인종, 외국인, 가난한 가족, 아시아 여성이라는 것. 상호교차적(intersectional)으로 얽혀있는 소수자 정체성에 대해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었겠네요.


그렇죠. 게다가 저는 정치에 관심 많은 여자애였어요. 학교 애들이 볼 때 그건 더 이상했고, 저같은 사람을 찾을 수 없었어요. 해가 갈수록 정치화되면서 기자가 되어야 할 더 중요한 이유들이 생겨났어요. 제 주변의 사람들이 하는 말, 제가 접할 수 있는 미디어 콘텐츠, 그 어디에도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없었어요. 아무도 다루지 않았던 거죠. 저 같은 아웃사이더의 관점을 그 안으로 가져오고 싶어졌어요.


Q. 그런 고민과 바람 끝에 저널리즘 스쿨 DJS(Deutsche Journalistenschule)에 들어갔나봐요. 저널리즘 분야에서 정평이 난 대학원으로 매년 소수정예(45명)만 선발해 2년 동안 고된 훈련을 시킨다던데, 실제로 다녀보니 어땠나요?


학교는 전반적으로 빡셌는데, 또다시 백인 대다수 학생들과 제 출신 배경 간에 차이가 크게 느껴졌어요. 다른 학생들은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낮았어요. 그래서 매번 취재거리를 피칭하는 게 고역이었죠. 항상 팀으로 같이 취재를 하고 기사를 써야 하는데 동료들과 자주 싸웠워요.


Q. 바네사의 소수자 정서와 배경에서 비롯된 특유의 시선에 다른 동료들이 공감하지 못했다는 말인데. 갈등이 있었던 일화를 구체적으로 듣고 싶어요.


특종 기사를 쓰라는 과제를 받고 유럽연합의 국경 감시 체계에 대해서 조사했던 적이 있어요. 제가 제안한 주제였는데, 다른 팀원들과 학급을 설득하면서 좌절감에 눈물이 날 때까지 언쟁해야 했어요. 유럽연합이 점점 더 많은 예산을 써가며 국경 초소에 드론, 심지어 무기를 장착한 드론들을 배치하고 있다는 게 출발점이었어요. 이런 내용을 접하자 마자 전 ‘이거야!’ 싶었고, 질문이 많이 떠올랐거든요. 사람이나 동물이 하고 있는 순찰업무를 기계가 하면, 국경에서 사건사고가 터졌을 때 누가 책임을 진다는 거지? 드론이 총으로 사람을 그냥 쏴버리면? 사람이 다른 사람을 비인도적으로 대하는 상황이 없어지는 대신, 비인도적인 일이 기계에 의해 벌어질 수 있다는 건데, 저한테는 아주 중요한 문제 같았어요.


실제로 유럽연합 어느 국경에서 드론을 도입했는지, 정확히 어떤 기술을 사용하는지, 어느 기업이 관여하고 누가 이익을 보고 있는지, 이주난민에게 실제로 해를 가하는지와 같은 부분들에 치밀한 조사와 취재가 필요했어요. 처음에 다른 학생들은 기술이 국경 경비를 대체하는 게 긍정적이고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이더라고요. 팀 주제로 어렵게 합의해서 조사경비를 충당하는 장학금을 받고 신문사 여러 곳에 피칭을 하러 다녔지만, 그들도 다 회의적이었어요. 정치적으로 민감하다는 이유도 컸죠.


저널리즘 스쿨에서 내내 지지 않으려고 버틴 건, 사람들이 다 아니라고 해도 내 관점이 꼭 틀린 건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이에요. 학교에서는 ‘사람들이 널 이해하지 못하면 그건 네 탓'이라고 가르쳤어요. 하지만 철저히 소수자로 살아온 제 생각은 달랐죠. ‘어쩌면 나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문제 아닐까’라고 의심했어요. 특히 저널리즘은 같은 사회 현상을 서로 다른 관점으로 보면서 주장을 밀어붙이는 것이니까. 처음엔 사람들 반응 때문에 제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에 확신이 없고 주눅이 잘 들었는데요, ‘내가 어떻게 말해도 저들은 알아듣지 못할 것이고, 그래도 포기하지 말고 나를 믿어야 한다’고 자주 다짐했어요.


남들과 다른 외모, 가난한 외국인 가정의 불안한 체류 상황 속에서 바네사는 사회와 늘 단절된 기분으로 살았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엘리트 집단에 들어가 기자의 꿈을 이뤘지만, 지금도 매일 자신의 ‘다름’을 확인하게 된다. ‘소수자의 시선을 갖고 저널리즘을 하는 건 마라톤 달리기’와 같다며, 매번 싸울 순 없으니 어떤 싸움을 할지 현명하게 택할 것이라고 한다. (촬영: Alina Simmelbauer)


Q. 지금은 어떤가요? 독일 언론계 역시 백인 주류 사회죠. 그럼에도 학교 때와 달라진 점이 있는지 궁금해요. 자기 정체성 때문에 이익, 혹은 불이익을 당한 적이 있나요?


저널리즘 스쿨 때에는 때때로 저 자신에 대해 의심이 들어도 학생들끼리 모여 있으니 결국 서로 비슷한 수준이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정식으로 언론사 근무를 시작하고 나서 상황이 돌변했죠. 자이트 온라인 사에서 당시(2017년) 제가 편집자-기자 중 제일 어린 축이었고 정치부에서는 더 그랬어요. 그러다 보니 자신감이 없어 자꾸 위축되고 한참 더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서 선배들에게 계속 묻고 다녔어요. 이 일을 하기에 스스로 역부족이라는 불안감이 지배적이었어요. 최선을 다했지만 ‘가면 증후군’(Imposter Syndrom, 자신의 업적이 능력과 노력이 아닌 운으로 얻어진 거라 생각하며, 주변인들을 속여 온 것이 아닌가 불안해하는 심리)에 시달린 거에요. 특히 ‘젊고 경험이 적은 아시안 여성 직원’에 대해서 주변의 시선이 회의적이라고 느꼈어요.


실제로 저를 인정하지 않는 동료들이 있었어요. 제가 자기들이 쓴 기사를 편집하지 못하게 하거나, 제가 한 편집에 꼬투리를 잡았어요. ‘맨스플레인’(man-splain, 어느 분야에 대해 여성은 잘 모를 것이라고 전제하고 남성들이 아는 척 설명하려고 하는 것)과 ‘올드스플레인’(old-splain, 나이가 어린 사람은 잘 모를 거라고 전제하고 가르치려 드는 것)을 일삼았죠. ‘내가 여기 있게 된 이유가 있겠지'라고 내심 되뇌었지만 패닉 상태였던 적이 많아요. 그 와중에 저널리즘 상을 받거나 후보에 오른 게 도움이 됐어요. 수상은 자부심은 아니고 안도감을 줬죠. ‘여기 취직이 됐고 상도 받았어. 전에 장학금 탄 적도 있지. 이 모든 걸로 비추어보면 난 괜찮은 거야.’


Q. 따돌리고 무시한 동료들이 그 이유를 직접적으로 드러냈나요? 예를 들어 아시안이라고 지목하는 등의 행동은 명백한 인종차별인데…


분명히 인종차별인 건이 하나 있었어요. 나이가 많은 남성 기자였는데, 저는 그 사람 기사를 편집하면서 그가 맥락상 ‘인종차별’을 의미하는 부분에 ‘Fremdenfeindlichkeit’라는 단어를 쓴 점을 지적하고 수정을 권고했어요. 그 단어는 영어로 번역하자면 제노포비아(Xenophobia), 즉 외국인/이방인 혐오에 가깝거든요. 기사에서는 독일인이지만 ‘외국인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겪는 차별을 다루고 있었기 때문에 안 맞는다고 봤어요. 그런데 그 기자는 굉장히 화를 내더라고요.


Q. 그걸 지적한 사람이 그의 눈에 ‘외국인처럼 보이는 독일인’이라서 더 과민반응을 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 단어를 묘하게 피했다는 게, 인종차별을 인정하지 않는 듯한 뉘앙스를 풍겨요.


맞아요. 그 사람은 길고 긴 논쟁을 걸었어요. 심지어 한밤 중에도 해당 단어에 대한 위키피디아 페이지를 보내면서 ‘Fremdenfeindlich라고 쓰는 게 적절하다. 여성, 바바리아 지역 사람,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이 모두 사회에서 이방인으로 인식된다’고 주장했어요. 그러다 ‘바네사, 너 같은 사람들’이라는 말까지 나왔어요. 그 시점에서는 더 이상 받아줄 수 없다는 판단이 들어 평소 신뢰했던 여성 상사에게 알렸어요.


바네사의 상사는 두 사람 사이에 오간 대화를 단체 채팅방에 올려서 정식으로 문제 제기하라고 했다. 하지만 사적인 대화를 공개하는 것, 신입 직원으로써 선배에게 타격을 입히는 것이 부담이 됐던 바네사는 그 기자의 ‘사과답지 않은 사과’을 받아들이고 끝냈다. 그가 한 말은 “상처 줄 생각은 없었다. 나도 예전에 머리색이 어두웠을 때 주변에서 이탈리아인이냐고 농담을 걸곤 했다”는 것.


흑인 직원이 ‘(상대방이 백인이 아닌 독일인일 때) 그러니까 진짜 출신지가 어디냐’는 질문이 인종차별적이라고 문제 제기하자, 이를 납득하지 못한 백인 직원들이 바네사의 책상으로 찾아와 다짜고짜 ‘어떻게 생각하냐’ ‘이게 어떻게 인종차별이냐’고 따져 묻는 일도 있었다. 바네사는 정체성과 관련된 사적인 부분을 그렇게 일방적으로 답하도록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례하고, 그런 논쟁에서 소수자가 겪는 감정 노동은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를 용인하고 싶지 않다.


Q. 사회문제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저널리즘 집단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게 충격적이네요. 독일에서 경찰을 비롯한 점점 더 많은 조직들이 인종차별 대항 훈련이나 다양성 교육을 의무화하는 추세인데, 자이트 온라인에는 그런 교육과정이 없나요?


도입하려는 시도는 몇 번 있었지만 아직까지 시행된 적이 없어요. 편집자와 기자들은 매일 사회 현안을 접하는 위치에 있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과신하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경제나 외교, 기후변화 문제는 일정 수준 지식을 갖춰야 발언권을 얻고 분석할 능력이 있다고 인정받는 반면, 인종차별이나 사회 갈등과 같은 이슈에서는 그 기준이 유독 낮아서 너도나도 전문가 행세를 해요. 개인적인 경험 몇 개로 일반화하려고 든다든지. 우리 회사뿐 아니라 다른 언론사들에서도 사정이 비슷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Q. 인종차별과 관련해 독일사회 전반을 보면 어떤가요? 아직 독일사회가 갈 길이 멀어 보이지만, 어린 시절인 1990년대-2000년대와 비교해 나아진 점을 체감하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어릴 때는 난민캠프가 혐오범죄로 인해 불타던 시절이었어요. 물론 최근에도 네오나치(Neo-Nazi)가 비슷한 일을 벌인 사례들이 있죠. 하지만 지금은 난민을 지지하고 보호하는 시민사회가 있다는 점이 달라요. 어떤 학생이 강제 송환 명령을 받으면 주변 학생들이 재빨리 나서서 탄원서를 모으고 집회를 벌이죠. 제가 예전에 그런 처지에 있을 때는 아무도 나서지 않았어요. 지금은 분위기가 달라져서 난민과 연대하려는 사람들이 많고, 비(非)백인에 대한 동등한 대우가 보편적인 개념이 됐죠.


독일인들은 아직도 인종차별이라고 하면 홀로코스트를 떠올리는데 머무르는 경우가 많아요. 유대인 학살이라는 과거가 오늘날과 어떻게 이어지는지, 다른 형태의 인종차별은 없는지는 잘 보지 못해요. 홀로코스트에 대한 사람들의 죄의식과 수치심은 가히 집착적이에요.


Q. 독일인들은 학교와 미디어 등을 통해서 어릴 때부터 홀로코스트에 대한 죄의식과 수치심을 다양한 방식으로 학습하면서 그야말로 대를 이어 속죄하고 있는데. 이 문제에 관한 사회 분위기가 아직도 엄중하고 경직되어 있어서 홀로코스트 관련 공식적인 통계나 팩트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 자체가 위법이라고 들었어요.


독일 전역의 수많은 기념비와 박물관들을 봐도, 방문자로 하여금 공포나 충격, 슬픔이나 수치심을 주로 느끼게끔 디자인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감정적으로 동요하고는 끝이에요. 거기에 대해 더 얘기할 수 있는 여지가 없어요. 왜 그렇게 만들어졌는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과연 요즘 시대에 이게 이상적인 방식인지 의문이 들어요. 다음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나? 토론하고 자기성찰하는 것. 수치심은 더 나은 방향으로 진보하는데 도움이 안 된다고 봐요. 사실 새로운 정책적 논의와 개혁 아이디어, 그리고 좀 다른 컨셉트로 사람들을 만나는 교육자들도 있는데 충분한 관심과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어요.


Q. 수긍할 만한 얘기입니다. 역사적인 사건을 기록하고 기억하고 토론하는 과정을 좀 더 유연하게 만들고, 새로운 발견이나 다른 시각도 허용해야 발전적인 담론이 발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2부에서 이어집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한국계 미국 이주민 '성'의 트라우마, 가족, 중독 그리고 몸에 관한 기록 『남은 인생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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