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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다른 두 직무의 프리랜서로 살고 있어요

<우리가 독일에 도착한 이유> 은해: IT 번역 및 예술프로젝트 매니저, 베를린


※ 밀레니엄 시대, 한국 여성의 국외 이주가 늘고 있습니다. 파독 간호사로 시작된 한국 여성의 독일 이주 역사 이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 <일다>는 독일로 이주해 다양한 직업군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 여성들을 만납니다. 또한 이들과 연관된 유럽의 여러 젠더와 이주 쟁점에 대해서도 함께 다룹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은해 이주 이력서


이주 5년 차.

2006년 영국 런던 1년 거주

2012년 독일 베를린 2주 여행 

2013년 런던-바르셀로나-베를린에서 ‘한 달 살기’ 경험

2014년 베를린에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도착

2014년~2015년 유럽 기반 IT회사 비즈니스 매니저

2016년~현재 IT회사 사무직 및 예술 분야 프로젝트 매니저로 활동


▲ 베를린에서 은해.     ©촬영: 채혜원

 

은해는 늘 ‘이주’를 생각해왔다. 어렸을 때부터 한국 사회의 많은 요소가 불편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게 많았기 때문이다. 정치 성향도 그렇지만 물질 만능주의와 외모 지상주의, 소비문화로 인한 부분이 컸다. 아직 어린아이에게 남성성과 여성성을 강조하는 것, 여성은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2등 시민으로 살아야 하는 것, 어디에 사는지 또는 어떤 자동차를 가졌는지가 나 자신을 보여준다고 생각하는 문화 등. 은해는 이 모든 것을 겪으면서 자연스레 한국을 떠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주를 생각한 또 다른 이유는 당시 문화적으로 동경하던 영국에 살아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언젠가 외국에 취업해 자리를 잡아보고 싶다는 마음에 정치외교학을 전공하면서도 번역 관련 일을 계속 이어가며 영어 실력을 키웠다. 그러다 대학 재학 중 런던에서 1년 동안 지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영국 런던은 짐작만큼 은해에게 궁극의(ultimate) 도시였다. 문화적으로 완벽하다는 인상을 줬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런던은 완벽한 도시였던 만큼 타자(他者)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유리벽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점점 물가가 비싸지는 것도 큰 문제였다. 살 수 있는 공간도 너무 좁았고, 어떤 프로젝트를 펼쳐 보일 공간도 좁게 느껴졌다. 그렇게 런던은 은해에게 완벽한 곳이자 동시에 문화적 충격을 가장 크게 준 곳이었다. 


영국이란 나라에 진입하기에는 여러 장벽이 있었지만, 은해는 1년을 산 뒤로도 영국에 정착하고 싶다는 생각을 바로 저버리진 않았다. 여러 일을 하며 주기적으로 런던을 오갔다. 그러던 중 2012년 봄, 독일 베를린을 여행했는데 다른 독일 도시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에 매료됐다. 독일이지만 영어가 잘 통하고 물가가 저렴하고 문화예술적으로도 풍요로운 도시였다.


이때 은해는 이주를 위한 거주지 후보 리스트를 완성했다. ‘런던’과 ‘베를린’, 그리고 런던에 1년 거주할 때 한 달 살아본 스페인 ‘바르셀로나’ 이렇게 세 곳이었다.


유럽 도시 ‘한 달 살기’로 긴 여정을 시작하다


이미 런던에서 1년을 살았고 이후 여러 도시에서의 긴 여행이 이어졌지만 은해는 거주지를 정하는데 또 한 번의 실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거주지 후보 도시를 세 곳으로 추린 상태에서 2013년 봄, 런던과 베를린 그리고 바르셀로나에서 차례대로 ‘한 달 살기’를 시작했다. 당시 여러 기업과 프리랜서 계약을 맺고 일을 하고 있을 때라 ‘한 달 살기’를 감행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사실 저에겐 (외국어 중에서) 영어가 가장 편한 언어니까 세 곳에서 한 달 살기를 시작했을 때도 런던에서 취업하면 다른 도시 가는 게 수월할 거란 기대가 있었어요. 하지만 그런 곳이기에 런던은 시간이 지날수록 모든 게 비싸졌어요. 숨만 쉬는데 점점 돈이 드는 도시가 되어갔죠. 20대 초반에 이어 다시 한번 나와 살아보니까 모든 게 확실하게 보였어요.”


▲ 영국 런던 풍경.     ©촬영: 채혜원


런던과 달리 베를린은 은해에게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있는 도시였다. 은해가 베를린 여행을 했던 2012년과 한 달 살기를 했던 2013년에는 베를린에서 독일 스타트업 투자가 대규모로 시작되던 때였다. 그뿐만 아니라 유럽의 어느 도시보다 아트씬도 활발하고 다양했다.


은해는 “베를린은 런던과 달리 내가 들어갈 재미난 틈들이 보였고, 내가 여기서 처음부터 무언가를 시작해보면 어떨까 상상하는 게 가능한 도시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상상이 가능했던 건, 각자 자신만의 능력을 갖추고 뭔가 해보려고 하는 청년들이 전 세계에서 베를린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은해는 베를린에서 지내며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대부분 살면서 해보지 않았던 무언가를 시도하거나 평소 관심 있던 걸 실현하려는 청년들이었다. 예를 들어 결국 실현은 되지 않았지만 은해는 독일, 스페인, 미국에서 온 친구들과 디지털 잡지를 만들 계획을 세웠었다. 도중에 모두 세계 곳곳으로 흩어져 살게 됐지만, 베를린은 이런 프로젝트를 얼마든지 시도해볼 무한한 가능성이 열린 도시였다.


런던에서는 돈이 없어서 또는 시간이 없어서 못 했을 일을 베를린에서는 수많은 이들이 시도하고 있었다. 이런 환경은 은해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바르셀로나도 런던만큼 좋아하는 도시였지만 스페인어로 일할 수 있기까지 공부하는데 긴 시간이 필요했고, 스페인의 정치·경제 상황이 혼란스러워지면서 후보군에서 제외했다. 


은해는 세 도시에서의 한 달 살기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은 후 2014년 4월, 베를린에 다시 도착했다. 그렇게 은해의 본격적인 이주 생활이 시작됐다.


▲ 지난여름 베를린의 ‘춤과 함께하는 집회’ 모습.     ©촬영: 채혜원 


전혀 다른 두 직무의 프리랜서① IT 분야 번역 및 마케터 


처음 워킹홀리데이로 독일에 도착했을 때, 은해는 우선 1년간 독일어를 배우는데 집중한 후 영어와 독일어로 함께 일할 수 있는 일자리를 찾아 취업비자로 변경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도착 3개월 만에 한국 스페셜리스트가 필요한 유럽 기반 IT 회사로부터 일자리를 제안받았다. 이미 한국에서 번역 일과 글로벌 기업에서 마케팅 일을 해온 경력 덕분이었다.


은해는 “생활 독일어만 배운 상태였는데 영어로 하는 일을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영어로만 일하고 있어요. 독일어와 평생 멀어진 계기가 됐다고 할까요.”라며 웃음을 보였다. 은해의 주된 업무는 한국 시장과 관련한 콘텐츠와 비즈니스 모델을 개발해 한국어 자료로 만드는 일이다. 사무실이 있는 회사에는 정기적으로 출퇴근을 하고, 사무실이 없는 회사와 일할 때는 베를린의 여러 코워킹플레이스를 다니며 일한다. 


은해의 이력을 보면 지금까지 게임 회사, 모바일 회사, 여행 관련 회사 등 다양한 기업과 계약을 맺고 일해왔다. 프리랜서지만 구직 과정은 일반 정직원 채용과 같다. 기업에서 낸 공식 채용 공고를 보고 지원하는 경우가 가장 많고, 일반 구인 사이트나 기업 이벤트 등에서도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이력서를 낸 후 이력서 심사가 통과되면 인터뷰와 여러 직무 테스트를 통해 선발된다. 


전혀 다른 두 직무의 프리랜서② 문화·예술프로젝트 매니저


은해의 또 다른 직업은 ‘문화프로젝트 매니저’다. 가장 주되게 하는 일은 아시아 필름 베를린(Asia Film Berlin) 프로그래머다. 베를린에서 아시아 영화나 단편 영화, 아시아 예술가의 미디어 필름 등을 상영하는 단체인 Asia Film Berlin에서 2016년부터 정기적으로 상영회를 기획하고 있다. 이를 위해 IL KINO나 Lichtblick Kino 등 베를린 내 독립 영화관들을 상영 파트너로 두고 있고, 다양한 곳에서 아시아 영화 상영회나 이벤트를 기획하고 있다. 


은해는 “한국에서도 예술 관련 이벤트를 기획하는 일을 해왔기 때문에 여기서도 그 경험을 살려 일하고 있다”며, “아시아 영화와 콘텐츠, 아티스트를 알리는 상영회나 이벤트를 기획하는 일에 가장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다”고 말했다. 


2017년에는 다른 기획자들과 함께 한국 뮤지션의 유럽 진출을 돕는 그룹을 만들었다. 이후 서울에서의 기획 공연을 시작으로 베를린과 독일 타지역에서 크고 작은 공연을 진행하고 있다. 이와 함께 올해 초부터는 베를린 영문 매거진인 EXBERLINER와도 상영회와 관련된 협업을 시작했다.


▲ 은해가 기획한 아시아 영화 상영회 모습.     ©은해 


이 두 가지 일은 은해가 한국에서도 해왔던 일이다. 독일로 이주했지만, 그의 업무는 그대로 이어지고 있을 뿐이다. 디지털 노마드로 살면서 할 수 있는 일들이고, 거주지가 꼭 베를린이 아니어도 가능한 일들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은해에게 ‘베를린’은 도착지가 아니다. 베를린 이후에도 이주자로서의 삶을 이어갈 계획이다.


“지금은 베를린에 프리랜서로 거주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아시아 국가에서 살아보고 싶은 생각도 있어요. 이주했다고 해서 평생 한곳에 정착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래서 이주를 고민하는 여성들에게 우선 원하는 곳에 가서 경험해보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Tip. 독일의 프리랜서 비자 


독일에서는 은해처럼 전혀 다른 직무로 프리랜서 비자를 받는 게 가능하다. 한 가지 특화된 직무만으로도 비자를 받을 수 있고, 전혀 다른 직무를 동시에 할 수 있는 비자를 받을 수도 있다. 다만 프리랜서 비자를 받은 이후에는 인정받은 직무에 대해 안정적인 수입이 있다는 걸 증명해야 한다. 


독일에서 프리랜서 비자를 받을 수 있는 직무는 독일 세법에 따라 크게 4가지 분야로 나눠진다. 첫 번째는 의사, 치과의사, 수의사, 치기공사, 심리상담사 등으로 이뤄진 ‘치료 직군’이며 두 번째는 ‘세금·경제 직군’으로 변호사, 특허변호사, 공증인, 세무사, 회계사 등이 이에 속한다. 이어 과학·기술 분야(엔지니어, 건축가, 화학전문상담사 등)와 정보·언어 분야(저널리스트, 포토그래퍼, 통·번역가 등)가 있다. 기타 영역에는 심리상담사, 치료안마사, 조산원, 감정사 등이 있다. 예술 분야에서는 디자이너, 화가, 음악가, 배우, 극작가, 영상 제작자 등이 프리랜서 비자를 받을 수 있다.


▲ 독일 연방 정부에서 발행한 프리랜서 직군 안내서.     ©출처:existenzgruender.de 


비자를 받을 때 필요한 문서는 이력서, 거주 확인 문서, 건강보험증서 등 기본적인 행정 문서 외에 재정 관련 문서가 중요하다. 현재 가진 재산 규모, 재정 계획서, 안정적인 벌이를 뒷받침하는 보증 문서 등이 이에 속한다. 이에 따라 자신이 계약을 맺고 일할 개인이나 기업에서 써준 추천서 또는 계약서가 필요하다. 


비자를 받은 이후에는 관청에 제출한 계획서에 맞게 돈을 벌고 있는지 매년 세금 신고를 해야 한다. 자세한 정보는 베를린 포털(https://service.berlin.de/dienstleistung/328332)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복잡한 행정 절차보다 더 힘든 건 인종차별과 성희롱


은해 역시 여느 이주자와 마찬가지로 독일에 살며 힘들거나 불편한 점이 여러 가지 있다. 유창하지 않은 독일어 때문에 행정적인 절차가 복잡한 독일에서 수많은 문서를 처리하는 데에 늘 긴 시간이 걸린다. 당장 부당한 일을 당해도 즉각 처리할 수 없는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지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여러 친구들의 도움으로 잘 해결하고 있다. 


이런 일보다 더 자주 겪는 어려움은 인종차별과 길거리 성희롱인 ‘캣콜링’이다. 


“사실 아시아 여성에게 가해지는 인종차별과 성희롱은 모든 타 인종에 의해 가해져요. 베를린에는 너무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살고 있으니까요. 길거리에서 성희롱에 해당하는 말을 종종 듣기도 하고, 큰 규모의 베트남 쇼핑센터 앞에서 한 남자가 특정 신체를 접촉하고 도망가는 일을 당하기도 했어요. 이런 사례는 너무 많아서 다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에요.” 


인종차별과 성차별 사례를 이야기하다 은해가 한 영상을 보여줬다. 신체 접촉을 하고 도망가는 남성을 쫓아가 있는 힘을 다해 밀쳐내고 싸우면서 찍은 영상이었다. 영상 속에서 은해는 가해 남성에게 당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아느냐고, 왜 이런 짓을 저질렀냐고, 당신의 문제가 뭔지를 말하라고 따져 묻고 있고 남성은 그저 두 손 모아 미안하다고만 말하고 있다. 


은해는 누가 봐도 아시아 여성이 많이 다닐 것으로 추정되는 베트남 센터 앞에서 기다렸다가 자신과 자신의 친구에게 성폭력을 가한 이 남성을 가만둘 수 없었다. 가지고 있던 자전거를 길거리에 내팽겨치고 달려가 찍은 영상이었다. 아시아 여성들과 이런 사례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대부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분노보다 두려움과 당황스러움이 앞서 즉각 대처하기 어렵다.


물론 가해자가 혼자였고 은해는 친구와 같이 있었기에 대응하는 게 가능하기도 했다. 은해는 “가해자를 쫓아가 따져 물었을 때 (그가) 폭력적으로 반응하지도 않았던 것은 드문 경우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며, “다른 여성에게 권유할만한 대처 방식은 아니지만, 당시엔 친구가 함께 있어 가해자를 쫓아갔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은해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데에는 다른 여성들이 똑같은 일을 겪게 내버려 둘 수 없다는 마음이 크다. 이런 이유로 은해는 ‘아시아 여성 연대’만이 답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아시아 여성’이기 때문에 겪는 차별과 억압에 대해 서로 자세하게 이야기 나누고 대처 방안에 대해 논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은해는 영상 제작자, 일러스트레이터, 사운드 디자이너, 개발자 등 다양한 영역에서 일하는 아시아 여성들과 자연스레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게 됐다.


▲ 베를린에서 열린 여성 연대 집회 풍경.     ©촬영: 채혜원

 

‘아시아 여성 연대’를 통해 낯선 땅에서 적응해간다


은해는 독일에 와서야 비로소 자신과 닮은 친구들을 만났다고 했다. 자신이 부당하다고 느끼는 문제에 대해 함께 부당하다고 느끼고, 자신이 겪는 디테일한 경험을 똑같이 겪고 있는 여성들을 만났다고. 우리는 가족 공동체를 떠나 독일에서 개인으로 살고 있지만, 또 다른 가족을 만난 셈이다.


“독일에 살면서 어떤 차별을 겪었을 때 오히려 가족에게는 말하기가 어려워요. 가족은 너무 저를 걱정하기도 하고, 어떤 분위기에 어느 강도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짐작할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 여기 사는 아시아 여성이라면 정황만 이야기해도 그 자체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너무나 잘 이해해요. 그리고 그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지 논의할 수 있고요. 독일에서 그녀들은 제게 가족이에요.”


은해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힘들 때 언제든 찾아갈 수 있는 친구, 가게에서 만나는 다양한 아시아 여성들, 마음이 허전할 때면 친구들과 함께 만들어먹는 따뜻한 한국 음식, 내가 당한 인종차별에 나보다 더 분개하며 대책을 세우자고 나서는 동료들이 없었다면 나의 독일 생활은 이미 끝났을 것이라고.


한국에서도 잘 만날 수 없었던 나와 닮은 사람과의 만남 그리고 연대. 그 덕분에 장벽을 하나 넘으면 또 다른 장벽이 서 있는 이주자의 삶을, 우리는 함께 살아낸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내고 행동하는 은해를 만나, 기쁘다. 은해와 여러 아시아 여성들을 보며 독일에서 한 발자국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본다. 각자 흩어져 살던 여성 한명 한명이 모여, 독일이라는 낯선 땅에서 ‘우리’가 되었으므로.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호른바흐 광고와 베를린의 ‘아시아여성연대’] 


최근 베를린에서는 ‘아시아여성연대’(Asian Women's Solidarity)라는 그룹이 생겼다. 한국, 일본, 대만, 베트남 국적의 아시아인으로 구성되었고 지난 3월 독일 DIY 관련 기업인 호른바흐(Hornbach)의 성차별 광고에 대항하며 결성되었다. 


당시 호른바흐 기업은 광고에서 아주 젊은 동양인 여성을 늙은 백인 남성들의 땀에 젖은 속옷에 엑스터시(황홀 상태)를 느끼는 인물로 묘사했으며, 이에 대해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을 통해 수만 건의 항의가 이어졌다. 그러나 호른바흐 측은 광고 상영을 멈추지 않았으며, ‘열린 대화’에 초청한다며 모임에 관한 일시 및 장소를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여러 국적의 아시아인들이 모여 호른바흐 매장과 베를린 시내에서 여러 차례 집회를 열고 목소리를 냈다. 


그룹에서 활동 중인 프리데리카(대만, 아티스트)는 “극장에서 프로듀서로 일하면서 보고 겪게 되는 인종차별과 성차별 사례를 보면서도 연대체의 필요성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리고 “현재 4개국 출신 멤버들만 함께하고 있지만 앞으로 더 확장해나가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전했다.


▲ 베를린 ‘아시아여성연대’(Asian Women's Solidarity) 멤버들의 집회.     © 아시아여성연대 


‘아시아여성연대’의 역사는 ‘미투코리아너린넨’(Metoo-KoreanerInnen)에서 시작됐다. 이 모임은 2018년 2월 베를린의 한식당에서 발생한 성희롱 사건이 공론화되면서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진 여성들이 모여 만들어졌다. 독일에서 아시아 여성으로 살며 겪는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일상에서 벌어지는 성폭력과 성차별에 대항하고 연대하기 위한 모임으로 시작해, 지금은 독일 내 한국 여성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지원 활동도 펼치고 있다.


올해는 재외동포재단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성폭력 피해자 지원과 성폭력·성차별 근절 캠페인 사업을 벌이고 있다. 도움이 필요한 여성이 관련 기관에서 상담 및 법률 자문을 받을 수 있도록 통역과 동행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다양한 문화예술 워크숍을 통해 피해자의 일상 복귀를 돕고 있다.


‘미투코리아너린넨’ 활동가들은 “지원 사업을 시작한 이후 우리 그룹을 찾은 성폭력 피해자분들이 변호사 상담을 원하거나 법적 절차를 원할 경우 필요한 비용을 지원하고 있다”며, “앞으로도 성폭력과 관련해 상담이 필요하거나 법적 절차를 밟고 싶은 분들을 도울 것”이라고 말했다. 


‘미투코리아너린넨’은 향후 다양한 사업을 펼쳐나가려면 영수증 발행 등이 가능한 조직 구조가 필요하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현재 정식 비영리단체로 등록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미투코리아너린넨’ 홈페이지 http://metoo.korean.net

 이메일 metoo.koreanerinnen@gmail.com

 페이스북 페이지 https://facebook.com/metookoreanerinnen

 

※ 필자 소개: 채혜원. 독일 베를린 거주. 한국에서 우먼타임스, 여성신문 기자와 서울시 여성가족정책실에서 전문직 공무원으로 일했다. 현재 국제 페미니스트 그룹 ‘International Women Space’ 멤버로 활동하며,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로 유럽 페미니즘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chaelee.p@gmail.com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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