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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시대 한국 여성의 이주 이야기
<우리가 독일에 도착한 이유> 연재를 시작하며

 

 

나의 독일 이주는 ‘헬조선’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페미니즘 매체 기자와 전문직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젠더 영역에 대한 전문성을 더 키우고 싶었고, 몇 차례의 국외 출장을 통해 외국에서 도전하고 싶다는 목표가 생겼었다. 이후 여러 자료 조사 끝에 프리랜서로 비자를 취득할 수 있는 길이 다른 나라에 비해 열려 있는 독일로 오게 되었다.

 

독일에 온 후, 그동안 내가 입고 있던 학력이나 직업 이력 등의 옷이 모두 벗겨지고 철저하게 다시 알몸이 되어 삶을 일궈나가야 했을 때 고통스러웠다. 어딘지 잘 모르는 작은 나라에서 온 ‘아시아 여자애’가 되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고, 일상에서는 지하철에 앉아있는 나를 긴 시간 훑어보는 옐로 피버(Yellow fever, 일종의 페티쉬로 동양 여자에 대해 갖는 성적 선호)들과 온갖 아시아 인사말을 건네며 다가오는 무례한 남성들을 마주해야 했다.

 

시간이 지나 이주·난민 여성 이슈를 다루는 페미니스트 그룹 ‘국제 여성 공간’(International Women Space, 이하 IWS)을 만나 함께 일하게 되고, 유럽의 페미니즘 이슈를 취재해 글로 쓰기 시작했다. IWS는 브라질, 이스라엘, 터키, 케냐 등 전 세계에서 독일로 이주 온 여성과 난민 여성 그리고 독일 여성들이 함께 일하고 있는 국제 페미니스트 그룹이다.

 

이 그룹은 난민 여성과 이주 여성 외에 이주 배경이 없는 여성도 포함해 그들이 겪는 문제와 억압으로부터 스스로 방어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구체적으로는 이주 여성과 난민 여성에 관한 책 출판과 다양한 캠페인 진행, 전 세계 페미니즘 이슈에 대한 집회 조직, 난민 여성 지원 등의 일을 한다.

 

필자가 활동 중인 국제 페미니스트 그룹 'International Women Space'에서는 전 세계에서 베를린으로 온 여성들이 함께 일하고 있다. 사진 채혜원 제공.

 

독일에서 페미니스트 활동가로 살면서, 날마다 새로운 전 지구적 여성 연대를 경험한다. 다른 유럽 국가나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등 전 세계에서 온 여성과 함께 일하며 그 나라의 페미니즘 이슈와 그들이 이주한 이유에 대해 생생하게 듣는다. 그들과 함께 일하며 자연스레 ‘우리’, 즉 한국 여성의 이주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1966년 파독 간호사로 시작된 한국 여성의 독일 이주 역사가 반세기나 지난 지금, 어떤 한국 여성들이 독일로 이주하고 있을까. 우리는 왜 이주했는가. 수많은 국가 중 왜 ‘독일’을 선택했는가. 독일에서의 삶은 어떤가. 이주여성으로서의 일상은 어떠한가. 그들은 나와 어떻게 비슷하고 또 다른 시간을 독일에서 보내고 있을까.

 

‘생존형’, ‘파견형’이 아닌 밀레니엄 시대 여성의 이주

 

외교부 자료에 따르면(2017년 12월 기준), 현재 총 743만688명의 재외동포 중 독일에 4만170명이 살고 있다. (재외동포재단법에 따르면 재외동포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외국에 장기체류하거나 외국의 영주권을 취득한 사람, 또는 국적에 관계 없이 한민족의 혈통을 지닌 사람으로서 외국에 거주, 생활하는 사람을 뜻한다.) 이중 ‘일반체류자’가 1만4천490명으로 가장 많고 이어 영주권자 8천187명, 유학생이 7천566명 순이다. 시민권자는 9천927명이다. 독일은 중국, 미국, 일본, 캐나다, 우즈베키스탄 등에 이어 12번째로 많은 재외동포가 거주하고 있는 국가다.

 

독일 재외동포를 남녀로 나눠서 보면, 여성 재외동포(1만7천626명)가 남성(1만2천617명)보다 조금 많다. 여성 재외동포는 다시 일반 7천949명과 영주권자 4천941명, 유학생 4천736명으로 나뉜다. 도시 중에서는 베를린에 압도적으로 많은 여성 재외동포(총 2천392명)가 살고 있다.

 

독일 베를린에는 약 2천여 명의 한국 여성 재외동포가 살고 있다. 사진 채혜원 제공.

 

각기 다른 이주 동기를 가지고 독일에 체류하고 있는 다양한 직업군의 한국 여성들의 이야기를 약 1년간 모았다. 그 이야기를 바탕으로 이 연재는 생계부양자인 파트너를 따라서가 아닌 본인의 선택으로, 본인의 삶을 새롭게 개척하기 위해 이주한 한국 여성들을 만난다.

 

이들은 실제 독일의 수도 베를린부터 환경 수도라 불리는 프라이부르크까지 독일 곳곳에 거주하고 있다. 연재를 통해 만난 한국 여성들은 회사에 다니다 독일로 건너와 재취업했고, 유학을 왔다가 정착했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기 위해 한국에서의 모든 걸 정리하고 독일에서 일하고 있다. IT 엔지니어부터 헤어 디자이너, 셰프, 회사원, 비영리단체 활동가, 패션 디자이너 등 직업군도 다양하다. 나이는 대부분 30대와 40대다.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생계유지를 위해 노동력으로 국경을 넘은 ‘생존형 이주’나 선진국에서 부족한 노동 인력을 채우기 위한 목적으로 국가 간 계약을 통해 국경을 넘은 ‘파견형 이주’가 주를 이뤘던 과거와 달리, 이제 여성들은 자신을 둘러싼 사회질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기회를 찾기 위해 독일로 이주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여성에 대한 차별이나 성별 고정관념, 직업에서의 성별 분리 등은 이제 한 국가의 경계를 넘어 전 지구적 차원에서 확장되어 나타난다. 지구화의 확대로 국경을 넘어 이주하는 여성들이 늘어났을 뿐 아니라, 여성들이 직면하는 다양한 기회와 위험들이 새로운 양상으로 변화한다.(황정미 “지구화 시대의 이주와 젠더”, <젠더와 사회> 한국여성연구소 엮음, 동녘, 2018) 이에 연재에서는 원고별로 유럽의 여러 젠더 쟁점에 대해서도 함께 다룰 예정이다.

 

최근 한국 여성의 이주 비율이 높아지면서, 재외한인 여성들의 권리 증진과 실질적인 지위 향상에 기여할 정책 수립을 위한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학계의 움직임이 있다. 대학과 아시아 연구원, 영화제 등의 행사에서 ‘한인 디아스포라’를 주제로 한 학술대회와 세미나 등이 연이어 열리고 있다. 이 연재가 한국 이주여성을 위한 밑 작업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란다.

 

이 연재를 통해 우리는 독일 곳곳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 여성들을 만난다. 사진 채혜원 제공.

 

우리는 독일에 도착했을까

 

인터뷰를 통해 독일로 떠나온 한국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했다. 우리는 독일에 도착했을까. ‘도착’은 ‘목적한 곳에 다다르다’라는 사전적 의미를 담고 있지만 그 ‘목적지’에서 우리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혹은 짐작보다 고되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목적지’는 정착지로 이어지지 않기도 하고, 다른 곳으로 바뀌기도 한다. 그럼에도 독일에 사는 많은 한국 여성들은 독일에 ‘도착’하기 위해 낯선 땅에서의 도전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이 연재는 나의 이야기이자 그녀의 이야기,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다. 지금도 어디선가 집을 떠나 ‘이주자’로 새로운 곳에 도착 중인 한국 여성들과 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이주자는 어려운 이주를 결정하고 실행한 만큼 모험심이 강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모두 생애의 한순간 임시적이거나 장기적으로 이주자가 되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굳이 해외에 나가지 않더라도 학업과 취업을 위해 타 지역으로 이주할 때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 어떤 각오와 결심을 했는지를 되돌아보면 우리 안에 들어온 이주자가 낯선 타자가 아님을 알게 된다. 우리는 모두 집을 떠난다.” -김현미, <우리는 모두 집을 떠난다>(돌베개, 2014) 중에서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 필자 소개: 채혜원. 독일 베를린 거주. 한국에서 우먼타임스, 여성신문 기자와 서울시청 여성가족정책실에서 전문직 공무원으로 일했다. ‘젠더’ 영역에 대한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 독일로 이주, 국제 페미니스트 그룹 International Women Space 멤버로 활동하며 유럽 페미니즘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chaelee.p@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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