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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여자를 좋아하면 다 ‘걸크러쉬’야?
미디어에서 가려지는 퀴어 서사①
“그래서… 넌 나 얼마나 좋아했니? 지금은 얼마나 싫어하는지 궁금해서. 그것도 정해지면 공지해줘.”
“안 싫어해요. 단 한 번도 싫어한 적, 없어요… 공지 끝”
사뭇 긴장한 목소리를 말을 건네는 사람. 그리고 수줍게 답하며 부끄러운 듯 뛰어가며 사라지는 사람. 이 대사와 연출만 봤을 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건 로맨스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이 모두 여성이라면 이 장면을 어떻게 봐야 할까? 레즈비언?! 하지만 극 중에서 두 사람 모두에게 명백하게 로맨스 관계이거나 잠재적 로맨스 관계인 남성 파트너가 있는 설정이라면?
물론 그 캐릭터가 양성애자나 범성애자일 수도 있고, 우정이나 동경이라는 범위에 ‘연애에 가까운/유사한’ 감정들이 포함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캐틱터의 성적 지향에 대한 언급이 일절 없는 상황에서, 마치 의도된 듯 오묘한 긴장감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분위기를 더 애틋하게 만드는 부드러운 음악까지 더해진다면 이 장면을 어떻게 해석하는 게 좋을지 의문이 생긴다.
최근 방영이 끝난 tvN 드라마 시리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이하, 검블유) 이야기다. “내 욕망엔 계기가 없다”는 세 여성의 성공과 ‘로맨스’를 다룬 이 드라마는 “걸크러쉬”나 “워맨스”로 홍보되었고 그렇게 소비되도록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의문은 더해진다. 애초에 걸크러쉬와 워맨스는 대체 뭐지.
tvN 드라마 시리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 3화 장면 ⓒtvN
여자한테 반하다, 걸크러쉬(Girl Crush)의 유래
걸크러쉬(Girl Crush)는 영어에서 온 말로, 크러쉬(Crush)는 ‘나 너한테 반했어/관심 있어’(I have a crush on you) 말에 쓰이듯 ‘반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보통 ‘이성을 대상으로’ 이 말을 쓸 땐 로맨틱/섹슈얼한 감정이 담겨 있는 뜻으로 사용한다.
영어단어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는 사이트인 Dictionary.com에 따르면, 걸크러쉬라는 말이 미국에서 쓰이기 시작한 건 1990년대 즈음이며, 레즈비언/양성애자 여성들 사이에서 쓰이면서 퍼졌다고 한다. 퀴어 여성들이 다른 여성을 향한 자신들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걸-크러쉬’(여자한테 반함)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2002년 레즈비언/양성애자 여성들을 타깃으로 만들어진 대중문화 온라인 사이트 애프터엘랜(Afterellen)은 2007년부터 퀴어 여성들로부터 인기를 얻은 셀러브리티를 투표로 선정하는 ‘Hot100’(2016년까지 진행됨) 이벤트를 실시했다. 이건 퀴어 여성들이 자신들의 걸크러쉬가 누군지 적극적으로 보여 주는 하나의 창구였다. ‘Hot100’은 해를 거듭할수록 ‘일반 대중’ 및 미디어로부터도 관심을 받게 되었고, 순위에 오른 셀러브리티들도 자신의 걸크러쉬를 언급하는 등 ‘걸크러쉬’라는 말의 사용이 점점 자연스러워졌다.
2015년 애프터엘랜 Hot100에서 1위를 차지한 루비 로즈(Ruby Rose)는 이제 더 많은 여성들의 걸크러쉬로 거론되고 있다 (출처: 루비 로즈의 인스타그램 @rubyrose)
한편 2009년엔 Got a Girl Crush Magazine, 2011년엔 Girl Crush Zine이라는 온라인 매거진 사이트가 생겼다. 이들은 그동안 사회, 특히 미디어에서 ‘여성은 다른 여성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속설이 틀렸다는 걸 강조하고 ‘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 frenemies, Friends+Enemy) 구도만 조명해왔던 점을 지적하며 ‘여성들도 여성을 좋아하고 동경하며 존중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이런 흐름에서 알 수 있듯이 ‘걸크러쉬’가 담고 있는 의미는 여성들이 다른 여성을 향한 긍정적 감정을 표현하는 말로 확장되어 갔다. 그로 인해 걸크러쉬가 여성들 간의 긍정적 감정을 쉽게 표현할 수 있는 발판이 되고 ‘이성애 규범성’(Heteronormativity)에서 벗어나 여성들의 다양한 섹슈얼리티에 대한 가능성을 연 측면이 있다. 하지만 걸크러쉬라는 말이 너무 쉽게, 많이 쓰이다 보니 그 의미가 처음에 비해 흐려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걸크러쉬’의 쓰임새가 수상하다
특히 국내 미디어에서 걸크러쉬가 쓰이는 방식을 들여다보면, 과할 정도로 많이 언급되는 것에 비해 그 의미는 어떤 한계에 머물러 있는 걸로 보인다. 그 방식이 ①남성들이 생각하는 ‘일반적 여성성’에서 벗어나면 무조건 ‘걸크러쉬’ 붙이기(일명 쎈 언니의 ‘걸크러쉬 섹시’, 머리만 좀 짧게 잘라도 ‘걸크러쉬 매력’) ②일반적으로 기대되는 여성의 행동에 벗어나면 무조건 ‘걸크러쉬’를 붙이기(일명 ‘털털한 걸크러쉬’, ‘걸크러쉬 액션’) 등이기 때문이다.
포털에서 ‘걸크러쉬’라는 단어를 검색했을 때 나오는 기사 제목들에서 걸크러쉬가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미디어나 사회가 ‘일반적으로 남자들이 좋아하지 않는 것’을 걸크러쉬라고 규정하고 그 인식을 강화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 인식 속엔 여성들이 무언가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으면 다른 여성을 좋아할 리 없다, 그러니까 여전히 여성들은 기본적으로 여성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통념이 여전히 자리 잡고 있다는 불편함이 느껴지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 걸크러쉬로 불리는 ‘여성상’은 최근 몇 년 사이에 탄생한 신인류도 아니다. 1980년대나 1990년대에도 가수 이선희나 이상은 등과 같은 당시의 ‘여성적’ 매력에서 조금 비껴 난, 언니부대를 몰고 다닌 여성들은 늘 우리 곁에 존재하고 있었다.
설사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새로운 ‘걸크러쉬 여성상’이 발현되었다고 하더라도, 여성들이 그런 존재들을 자신의 ‘걸크러쉬’라고 적극적으로 호명하는 일과 미디어에서 자꾸 ‘어떤 여성상’을 걸크러쉬로 지정하는 일 사이엔 분명 차이가 있다. 후자의 경우는 앞서 말했듯이 ‘이성애 규범성’을 벗어나는 게 아니라 여전히 그 안에 머무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하나 더 있다. 걸크러쉬 쓰임이 과해지면서 퀴어 여성들의 ‘진짜’ 걸크러쉬가 드러날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여성들이 무언가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으면 다른 여성을 좋아할 리 없다, 그러니까 여전히 여성들은 원래 여성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인식은 퀴어 여성의 존재를 지워버리거나 이들의 가시화를 방해한다.
‘브로맨스’ 탄생의 불편한 진실
그럼 이제 ‘워맨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워맨스(Womance, Women+Romance) 또는 시스맨스(Sismance, Sister+Romance)는 브로맨스(Bromance, Brother+Romance)에 대항하며(?) 여성들의 관계를 강조하고자 할 때 쓰이고 있다. 그러나 서구권에선 거의 쓰이지 않는 단어다. 그 이유를 밝히기 위해선 먼저 만들어진 ‘브로맨스’의 탄생과 그 쓰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책 <Reading The Bromance>에서 설명하길, 브로맨스는 1990년대 잡지 <스케이트보드>의 편집자 데이비드 카니가 처음 썼지만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건 2005년에 나온 영화 <40살까지 못해 본 남자>(The 40 years old Virgin, 주드 애파토우 감독)의 영향으로 본다. 이후 그즈음 방영되고 있던 TV 드라마 <하우스>(House)의 닥터 하우스와 윌슨, <보스턴 리걸>(Boston Legal)의 알랜과 윌리엄 등의 남/남 관계도 브로맨스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미디어에서 브로맨스를 적극적으로 호명하면서 그 쓰임이 금세 대중화되었지만, 브로맨스의 탄생은 한편으로 ‘동성애 혐오’(Homophobia)와 깊은 연관이 있다.
브로맨스라고 불렸던 대표적인 관계인 <하우스>(House)의 닥터 하우스와 윌슨(상),
<보스턴 리걸>(Boston Legal)의 알랜과 윌리엄(하)
남성들 간에 우정보단 ‘찐’하지만 연애 관계는 아닌 알쏭달쏭한 관계를 묘사하는 브로맨스가 비성애적(Non-sexual)인 남성들 간의 ‘순수한’ 연대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이 강조되었다는 건, 명백하게 동성애와 선 긋고 있기 때문이다. 언뜻 ‘동성애인가? 아닌가?’라는 혼란스러움과 줄타기를 보여 주는 것 같지만, 실상은 “우리(남성들 간)의 관계는 특별하지만 동성애는 아니”라는 메시지, 즉 브로맨스는 존재하지만 남성 간 로맨스는 존재하지 않음/할 수 없음을 보여 준다는 측면에서 ‘브로맨스는 동성애혐오적 단어’라는 얘기다. 이에 대한 논쟁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워맨스의 경우는 어떤가? 워맨스가 자주 쓰이게 된 경위가 그동안 너무나 부족했던 여성 서사 및 여성들 간의 이야기를 조명하기 위함이라는 점과, ‘여성들의 우정이 (이성애)로맨스보다 못한 게 뭐냐!’는 목소리를 낸다는 점에서는 의의가 있는 게 분명하다.
다만 브로맨스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과 그걸 둘러싼 비판이 이미 제기되고 상황에서, 과연 워맨스는 그 비판 지점과 무관하다 할 수 있을까? 워맨스라 부르는 여성들의 관계를 들여다보면 지금까지 써 왔던 우정이나 의리, 자매애와 같은 말로도 충분히 표현될 수 있는데 왜 이런 용어를 쓰는 걸까? 시대의 흐름이거나 한낱 유행일 뿐일까? 그리고 여성‘들’만 나오면 워맨스라 부르는 것이 정말 다양한 여성들의 관계를 보여 주는 방법일까.
워맨스, 로맨스일 수는 없는 관계?
기사에서 첫 부분에 언급했던 드라마 시리즈 <검블유>에는 누가 봐도 멋있고 매력적인 세 명의 여성이 주인공으로 나왔다. 또한 그들이 모든 걸 걸고 서로를 구해주는 끈끈한 관계 속에 있다는 걸 보여줬다. 하지만 이들의 관계와 감정을 ‘워맨스’로 퉁쳐서 말해도 되는 건지 혼란스러운 지점들이 있다.
tvN 드라마 시리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 3화 장면 ⓒtvN
와인바 앞에서 지나가던 자전거와 부딪힐 뻔한 송가경(전혜진 역)을 차현(이다희 역)이 한 팔로 끌어당겨 안으며 구해준 장면을 보자. 한국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멋있게 구해주는 전형적 로맨스 장면이었다.
그뿐만 아니다. 차현은 고등학교 때 선배인 가경을 보고 ‘예뻐서’ 첫눈에 반했으며 남학생들이 가경을 괴롭히고 있을 때 구해준 전력이 있는 특별한 사이라는 과거도 있다. 이 둘 사이에 등장하는 배타미(임수정 역)와의 관계는 또 어떠한가. 중요한 업무 협상을 하기 위해 만난 세 사람이 한 테이블을 두고 앉아 엄청난 긴장감을 조성하다 “차현 내놔”라는 조건을 내민 장면은 그 어떤 삼각관계보다 짜릿했다.
이 이야기들은 한국판 엘워드(The L Word, 2004년부터 2009년까지 미국 Showtime 채널에서 방영된 TV 드라마 시리즈로 LA에 사는 레즈비언과 퀴어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아냄. 2019년 리부트 예정)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한 서사였다.
하지만 <검블유>의 또 다른 축은 세 여성의 이성애 로맨스였다. 그렇기에 ‘이성애 규범성’이 자리 잡은 <검블유> 세계에서 이 여성들의 관계는 로맨스로 보일 여지가 넘치는데도 로맨스일 수 없는 것이다. 이걸 워맨스라 부른다면, 워맨스의 한계는 바로 이 지점일지 모른다.
걸크러쉬와 워맨스는 여성들의 욕망과 관계를 확장하고자 하는 의미와 역할을 가졌음에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오히려 어떤 여성들의 욕망과 관계를 지워버리거나 배제할 수도 있다. 이걸 의식하지 않는다면 쉽게 ‘퀴어베이팅’(Queer Baiting)을 하게 된다. 다음 기사에서는 아직 많은 사람들에게 낯선 개념인 퀴어베이팅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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