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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겨털’을 ‘발견’의 순간으로 담아내고 싶었다”

십대여성이 몸을 보는 시선을 포착한 단편영화 <털보> 강물결 감독



스크린에 교복을 입은 여고생이 나온다. 또 다른 여고생과 야릇한 눈빛을 주고받는다. 그들은 우정과 사랑의 경계에서 아슬아슬 줄타기한다. 그렇게 욕망과 자기부정이 혼재된 관계 속에서 결국 파국을 맞이한다. 아니 어쩌면 그들의 이야기는 기묘하게 판타지스러운, 뽀샤시하게 뽀샵 처리된 순수한 사랑일 수도 있다. 혹은 남성의 시선에서 여고생들이 객체화된, 과도하게 섹슈얼한 사랑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레즈비언 영화라 분류될 수 있는 여/여 관계를 그린 국내의 퀴어 콘텐츠가 가진 클리셰(판에 박힌 줄거리나 상투적인 표현을 뜻함)다. 그게 모두 나쁘다거나 여고생의 섹슈얼리티가 금기시되어야 한다는 얘긴 아니다. 다만, 지금까지 전형적인 이야기가 많았다는 거다. 지겨울 정도로.


▲ 단편영화 <털보>(강물결 감독, 김푸름 김혜린 출연) 한 장면. ©출처: 강물결 감독


6월 5일~9일까지 대한극장에서 열린 19회 한국퀴어영화제에서 상영된 단편영화 <털보>를 봤을 때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꿈에서 본 그 여자는 누구였을까? 친구들에게 털 많은 여자친구와의 관계를 숨기고 싶은 자영, 제모에 집착하기 시작한다.’라는 영화 소개부터 흥미로웠다. 실제 영화는 더 흥미로웠다. 이 영화엔 그동안 보아온 ‘클리셰’가 없었다!


여중생 커플이 서로의 미묘한 관계로 인해 혼란을 겪는 게 아니라, 자신의 몸을 들여다보는 성장 스토리가 15분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에 임팩트 있게 들어가 있는 <털보>를 본 후, 한동안 영화 속 장면들이 떠올랐다. 더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함께, 이걸 만든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그 정체가 너무 궁금해졌다.


한국예술종합대학교 영상원 영화과 졸업작품으로 <털보>를 만든 강물결 감독은 역시 예사롭지 않은 사람이었다. <털보>를 세상에 내놓기까지의 과정이 흥미진진했을 뿐만 아니라 창작자, 감독으로서의 그의 뚝심에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인터뷰하는 내내 ‘이 감독이 얼른 다음 작품을 했으면 좋겠다’는 기원을 하고 있을 정도였다.


“페미니즘을 접하기 전까진 관심 있는 이야기가 없었다”


글 쓰는 일과 시각적인 작업을 좋아하던 강물결 감독은 미술을 배웠다고 했다. 하지만 미술을 계속하려고 보니 “재능이 없더라” 고백하며 웃었다. 결국 그의 관심은 시나리오 쓰는 일로 향했고, 연출로 이어졌다. 연출을 하다가 재미를 발견한 그는 연출 전공으로 학교를 졸업했다. <털보>는 강물결 감독의 두 번째 연출작으로, 이전에 만든 작품은 초등학교 여학생이 이빨을 뽑는 이야기를 담은 단편 <발치>가 있다.


강물결 감독에게 ‘레즈비언 영화의 클리셰를 다 깨려고 했냐?’고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강감독은 웃으며 “그럴 의도는 아니었다”고 답했다.


“원래 그런 클리셰를 좋아하지도 않지만,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와 달라서 자연스럽게 클리셰를 피하게 된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털보>를 만들면서 저한테 중요했던 건 두 가지에요. 하나는 주인공인 자영(김푸름 역)과 시원(김혜린 역)은 확실히 서로 사랑하고 있는 사이라는 점. ‘내가 얘를 좋아해도 되나?’ 같은 혼란이 없길 바랐어요. 전 ‘여자가 여자를 좋아해도 되냐?’는 질문 자체가 이젠 질문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우리 사회에 그것보다 더 필요한 이야기는, 자영과 시원이 자기 친구들에게 커밍아웃을 하고나서도 지금까지 이어지던 관계와 일상이 지속되고 함께 잘 사는 모습을 보여 주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또 다른 하나는 여성에게 주어지는 성역할, 흔히 말하는 ‘정상적인 여성상’이라고 불리는 사회적 여성 이미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태어날 때부터 그런 여성상이 요구되긴 하지만 본격적으로 심해지는 건, 여자들이 월경을 시작하고 몸의 변화가 일어나는 사춘기 때잖아요.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고등학생이 아닌 중학생을 선택하게 되었어요. 또 교복이 페티쉬화 되지 않도록, 여성 관객들이 보기에 편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들이 이전의 그런 클리셰를 피해갈 수 있게 만든 것 같아요.”


▲ 단편영화 <털보> 한 장면. ©출처: 강물결 감독


“털에 대한 콤플렉스가 많아서 언젠가 한 번 이야기를 해 보고 싶었다”는 강감독은 “사실 페미니즘의 거센 물결을 맞기 전까진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없었다”고 털어놨다.


“<발치>를 찍을 때까지만 해도 ‘장르영화’에 꽂혀있었어요. 어린 여자아이가 치과에 가서 이를 뽑는 이야기를 무섭게, 장르적으로 표현해 보려고 했죠. 이야기보다 그런 표현에 기대서 가려고 했던 거죠. 그런데 페미니즘을 알고 나서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은 거예요. ‘털 관련 이야기를 어떤 방향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그제서야 들더라고요. 조용한 극장의 큰 스크린에서 여성의 겨드랑이털이 희화화되지 않고, 어떤 발견의 순간으로 그려지는 걸 보고 싶다는 욕망이 되게 컸어요.”


그런데 그 털 이야기를 왜 레즈비언 관계 속에서 풀어내고 싶었을까? “(주변에서) ‘남자친구 있는 여자가 나오면, 남자는 털이 있는데 여자는 없어야 한다는 게 대비되니까 더 재미있지 않냐?’는 등의 이야기를 좀 들었어요. 하지만 전 여성의 털 이야기를 하는데 굳이 남자를 경유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가부장제 사회의 문화가 여성과 여성, 여성들 사이에 미친 영향이었죠.”라고 설명하는 강감독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 왼쪽부터 배우 김푸름(자영 역), 강물결 감독, 배우 김혜린(시원 역) ©출처: 강물결 감독


‘탈코르셋 운동’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콤플렉스이기도 했던 털, 그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쓰기로 결정한 후 강감독은 자기탐구와 더불어 과거 탐험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중학교 시절 활동하던 당시의 소위 ‘여초카페’(주로 뷰티 관련 정보를 공유)에 자신이 쓴 글들을 발견했다. 상상 그 이상의 충격이었다.


“너무 깜짝 놀랐어요.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때 제가 정말 병적으로 다이어트와 미모에 집착하고 있었더라고요. 고작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1학년 때인데 그때부터 살 빼기 위해서 별의별 짓을 다 하고, 그때 쓴 글도 굉장히 자기혐오적이었고요. ‘왜 그랬지?’ 싶은데 더 충격인 건 다른 여성들도 당연하다는 듯이 정보를 공유하고 있고, 그게 하나의 문화처럼 형성되어 있었다는 점이에요.”


그런 충격적인 자기발견을 거치며 시나리오를 쓰고 촬영을 한 건 2018년. 마침 한국 사회의 많은 여성들이 주도하고 참여하는 탈코르셋 운동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강감독 또한 “2018년은, 색조화장품을 쓰지 않기로 결심한 해”라고 설명했다. 자신 또한 한 명의 여성으로서, 여성의 몸을 바라보는 일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고 있었다.


“많은 여성들이 내 몸이 내가 원하는 몸이 아닌 것 같은 거부감이나 혐오를 흔히 겪는다고 생각해요. 저는 개인적으로 아직 제 몸을 백퍼센트 편안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어서 내 몸이 정말 편해지는 게 어떤 기분일지 너무 궁금해요. 그래서 사회에서 요구하는 ‘정상적 여성성’을 벗어나는 일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강물결 감독은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한국 여성들이 정말 대단하다는 걸 경험한” 일화도 알려줬다.


“영화 마지막에 ‘the armpit song’이라는 노래가 나와요. 이 노래는 책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에서 알게 되었는데, ‘정상적 여성’이 되려고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가사거든요. 탈코르셋 노래인 거죠.(웃음) 영국 웨일스에 사는 Siwan Clarke이라는 페미니스트 가수가 만든 노래인데, 영화에 쓰고 싶어서 이메일로 연락을 드렸더니 ‘한국 탈코르셋 운동 기사를 계속 보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한국의 탈코르셋 운동이 해외에도 알려지고 있다는 점에 놀랐어요.”


▲ 사춘기 여성이 몸을 바라보는 시선을 담은 단편영화 <털보>의 한 장면. ©출처: 강물결 감독


예상치 못한 ‘겨털’의 벽에 부딪힌 캐스팅


탈코르셋 운동 덕분에 해외에 사는 가수의 노래를 사용 허가받는 일은 어렵지 않았지만, 배우 캐스팅 과정은 험난했다.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들도 중학생이어야 했기에 ‘퀴어영화’에 대한 반감으로 거부하는 일은 있을 거라 예상했었다. 실제로 “3대가 기독교인 집안이라 안 된다.”는 등의 황당한 회신도 받았다.


“우리 학교는 한국 사회의 다른 집단들보다는 조금 더 소수자들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어서 몰랐는데, 이렇게 캐스팅을 통해 차별을 직접 겪으니까 이게 진짜 힘든 거구나 싶었죠.” 하지만 예상치 못한 벽이 하나 더 있었다.


“주인공 역의 배우는 그래도 쉽게 캐스팅한 편이었고 친구들 역할을 할 배우를 찾으려고 아역 에이전시에 시나리오를 다 돌렸는데 연락이 안 오는 거예요.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 물어보면 ‘죄송하다, 좀 힘들 것 같다’ 해요. 퀴어영화라서 그런 반응이 오는 건 예상을 좀 했는데, 놀랐단 건 ‘겨드랑이 털’ 부분이죠. 이거에 대해서 절대 안 된다고 하는 에이전시가 많았어요. 막 엄청 노출되는 것도 아니고 희화화되어서 나오는 것도 아닌데, 겨드랑이 털(노출)에 대한 반감이 생각보다 크더라고요.”


힘들게 캐스팅을 마무리하긴 했지만 중학생인 배우들과의 대화에서 한번 더 ‘겨털’에 대한 반감을 확인했다. “아직 자기 몸에 대한 것, 털에 대한 것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것 같더라고요. 심지어 여/여 동성 커플에 대해선 전혀 반감이 없는 친구도 겨털은 질색을 하는 거예요. 좀 놀랐어요.”


▲ 단편영화 <털보>(강물결 감독, 김푸름 김혜린 출연) 한 장면.  ©출처: 강물결 감독


행복한 퀴어, 가부장제 없는 여성의 삶을 꿈꾸다


벽을 부수는 캐스팅 과정은 감독에게 “아직 사회가 성소수자를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래서 “흔들리기도 했다”고 한다.


“불행한 퀴어 이야기를 담은 영화가 이 사회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이 친구들이랑 주인공이 잘 지내는 건 좋은데 가짜 같다, 이게 한국에서 이게 말이 되냐, 진짜 중학생들이 저러냐?’라는 의견을 받기도 했거든요. 앞서 말했듯이 주인공과 친구들이 잘 지내는 이야기가 제가 영화를 통해 하고 싶은 거긴 했지만, 또 한편으로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내가 미화하는 건가?’”


스스로도 “이게 정말 가짜 같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얘기하는 강감독은 그럼에도 자신의 의견을 지켜냈다. 바꾸지 않고, 잘라내지 않고 지켜낸 마지막 장면이 좋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감독의 당당한 모습을 보니, 그제서야 영화 엔딩크레딧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 엔딩이 보여주는 건, 누군가가 꿈꿨던 일이 이젠 현실이 되고 있다는 반증이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본 관객들이 “잘 봤다, 너무 공감되었다”고 말하는 걸 들으면 좋으면서도 한편으론 ‘이런 경험을 많은 여성들이 겪었구나’ 싶어 슬퍼지기도 한다는 강감독은 “가부장제가 없는 여성의 삶이 어떨지 종종 생각하며 그걸 꿈꾼다”고 했다.


이번 영화 스텝의 대부분이었던 여성들이 둥글게 모여 앉아 ‘몸’과 ‘겨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던 게 자신에게도 좋은 영향을 줬다고 말하는 강물결 감독의 앞으로의 행보가 궁금했다.


지금은 다른 감독의 독립영화 연출부를 하면서 자신의 장편 시나리오도 구상 중이라는 강감독은 “학창시절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몇 년을 걸쳐 관계를 쌓아온 두 여성의 이야기, 사회에서 쉽게 무시되거나 지워지는 여성의 찐한 우정에 대해 다루고 싶다”고 귀띔해줬다. 뿐만 아니라 <발치>에도 거울이 등장하고 <털보>에도 등장한다며 이왕 이렇게 된 거 ‘거울 3부작’을 완성해 보고 싶다고도 했다.


<털보>는 앞으로 몇 개의 영화제에서 상영 예정되어 있으며, 배급사(센트럴파크: centralpark.co@gmail.com)로 문의하면 공동체 상영도 가능하다.


인터뷰가 끝난 후,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했더니 자연스럽게 클리셰를 벗어났다’는 강물결 감독의 말이 귓가에 남았다. 가부장제 없는 여성의 삶을 꿈꾸고 거기에 다가가기 위해, 꺾이지 않고 침묵하지 않고 이야기를 만드는 창작자를 이렇게 또 한 명 만났다.  (박주연 감독)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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