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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여성’의 뿌리와 역사를 현재와 연결하는 래퍼

<페미니스트라면 이 뮤지션> 아쿠아 나루(Akua Naru)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과거에 비해 여성 래퍼는 상대적으로 많아졌지만, 어디까지나 과거에 비해 상대적일 뿐이다. 여전히 남성 래퍼의 수나 분포, 영향력에 비하면 여성 래퍼의 존재감은 크지 않다. 유명한 누군가가 이끌어준다거나 매체에 의해 발견되는 등 빠르게 조명을 받을 수 있는 기회나 가능성 또한 남성 래퍼에 비해 부족하다. 사실 여성 래퍼는 살아남기조차 쉽지 않다.


▶ 독일 아헨에서 아쿠아 나루 공연을 알리는 포스터 ⓒ출처: 아쿠아 나루 페이스북 페이지 facebook.com/akuanaru


이러한 상황은 대중이 비교적 접하기 쉬운 메인스트림뿐만 아니라 인디펜던트 음악 시장 내에서도 마찬가지다. 신예 래퍼 중에서는 최근 여성이 늘어나는 추세이기는 하지만, 자극적인 언행(정확하게 말하면, 별 것 아님에도 자극적인 언행이라면서 그 사람의 이미지를 만들어버리는 미디어) 때문에 유명해진 경우도 많다.


오랜 시간 지속해서 활동하는 이들 중에서, 의미 있는 스토리텔링을 꾸준히 해 온 여성 래퍼를 꼽으라면 랩소디(Rapsody)와 아쿠아 나루(Akua Naru)가 떠오른다.


랩소디, 여성 래퍼들은 경쟁의 대상이 아니다


랩소디(Rapsody, 1983년생)는 1980년대 엠씨 라이트(MC Lyte) 이후 꾸준히 이어졌던, 진지하고 깊이 있는 메시지를 던지는 미국 여성 래퍼의 계보를 이어가고 있다. 앞선 래퍼들보다 조금 더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기도 하다.


랩소디의 앨범 [Laila’s Wisdom]은 그래미 시상식에서 두 개 부문에 후보로 오르기도 했다. 물론 이 앨범은 미국 음악 시장의 큰 손 중 한 명인 제이지(JAY-Z)의 레이블과 함께 하게 된 뒤 발표한 것이다 보니 좀 더 주목을 받기 쉬웠던 측면도 있을 것이다. 랩소디는 자신의 할머니 이름(Laila)을 붙인 앨범을 발표하며 주체로서의 여성, 흑인 여성의 삶과 역사를 이야기했다.


▶ 랩소디(Rapsody)가 2017년 발표한 앨범 [Laila’s Wisdom] 자켓. 제목의 Laila는 할머니의 이름이다.


그는 미국의 공영 라디오 방송인 NPR과의 인터뷰에서 ‘여성 래퍼들을 비교 대상으로 붙이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각자의 영역, 개성, 매력이 다 다르며 좋은 위치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는 여성 래퍼가 많아질수록 좋은 것이다’라고 얘기했다.


또한 자신의 성별 때문에 음악에 대한 평가가 바뀌는 것, 흑인 여성이라는 이유로 작품 그 자체를 바라봐주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 점 등을 비판했다. ‘여성 래퍼가 던진 메시지와 작품은 중요한데 여성이어서 저평가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과, ‘여성의 이야기가 중요하다’는 주장은 양립 가능한 것이라고도 밝혔다. 여성의 이야기가 중요하며, 은연중에 평단에서도 여성이 차별을 받는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저평가가 이어지는 것이라고.


아쿠아 나루, 나는 목소리로 저항한다


여기에 랩소디처럼 멋진 이야기를 꾸준히 들려주고 있음에도 활동만큼의 평가를 받지 못하는 여성 래퍼가 있다. 바로 아쿠아 나루(Akua Naru)의 이야기다.


본명은 라타냐 올라툰지(LaTanya Olatunji)이며 정확한 신상이나 사적인 부분들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어릴 적에는 글을 읽고 쓰는 것을 사랑했으며, 흑인 커뮤니티 내에서 자랐고 가까운 사람들의 생애사에 관심이 컸다고 한다.


▶ 유럽 순회공연 중인 아쿠아 나루. ⓒ사진 출처: 아쿠아 나루 페이스북 페이지 facebook.com/akuanaru

 

아쿠아 나루는 여행을 통해 세계 곳곳을 다니며 경험하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고, 그것은 여행이라기보다는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운명을 믿는다고 얘기하는 그는 사람들의 여정과 자신의 여정을 자연스럽게 이어가며 시를 쓰고 랩을 하게 되었다.


아쿠아 나루는 자신이 랩을 하는 것은 누군가에게 들려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목소리가 있고 그 목소리로 싸우기 위해서라고 얘기한다. 흑인 여성으로서의 목소리를 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며, 그러한 역할에 관해 늘 고민한다. 그는 ‘나는 힙합 음악을 만들고 이 세계를 살아가며, 내가 일어나 눈을 뜨는 것만으로도 저항이다’라고 말한다.


2011년 발표한 앨범 [The Journey Aflame]에 수록된 “The World is Listening”에서는 여성 래퍼의 이름을 쭉 언급하며 그들의 메시지와 행보에 존경을 표했다. 그는 시처럼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한 줄 한 줄에 압축해 담아내기도 하지만, 직접적인 표현으로 듣는 이의 이해를 빠르게 돕기도 한다.


▶ 아쿠아 나루의 두 번째 정규 앨범 [The Miner’s Canary] 자켓. 이 앨범에서 아쿠아 나루는 흑인 여성 인권운동가, 흑인 여성 문학가 등 앞서 발자취를 남긴 흑인 여성들에게 존경을 표한다.


두 번째로 발표한 앨범 [The Miner’s Canary]에서는 전작보다 훨씬 많은 의미를 담아내었다. 여기서 음악 매체 <리드머>(rhythmer.net) 강일권 편집장의 앨범 리뷰 중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밝은 공간과 쾌적한 공기에서 사육되는 카나리아가 깊은 갱도 안에서 조금이라도 유독가스가 퍼지면, 부르던 노래를 멈추고 떨어지는 걸 보고 위험을 감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후, 보이지 않는 위험신호를 ‘광부의 카나리아(Miner's Canary)’라고 빗대어 표현해왔다. 아쿠아 나루는 이처럼 아름답지만, 비극적인 운명을 지닌, 더불어 자기희생적인 카나리아를 흑인 사회와 흑인 여성을 상징하는 메타포로 내세워 이와 얽힌 여러 쟁점과 생각할 거리를 굉장히 문학적으로 풀어낸다.


흑인들이 거쳐온 억압, 투쟁의 역사와 여전히 잔존하는 인종차별을 얘기하며, 미국 사회의 과거와 현재에 도사린 문제점을 냉철하게 꿰뚫고, 흑인들이 이룩한 업적과 흑인 여성의 강인함을 역설하며, 자긍심을 고취하는가 하면, 스스로 비하하거나 여자를 차별하는 흑인 사회의 치부를 드러내어 각성을 촉구하는 한편, 그 안에서 꽃피운 힙합을 향해 애정을 표하고 힙합이 가진 힘을 설파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눈에 띄는 건 앨범 내내 언제나 ‘흑인 여성’으로서 굳건히 서 있는 그녀의 태도다. 나루는 흑인사회에서조차 억압받았던 여성의 아픔을 호소하거나 여자와 남자가 동등한 위치임을 애써 강조하는 것에서 벗어나 여성 인권운동가인 다이앤 내쉬(Diane Nash)라든가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소설가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 같은 위대한 흑인 여성들의 이야기를 녹이고 경의를 표하며, 흑인 여성의 아름다움과 존재 가치를 부각한다.” (강일권, The Miner’s Canary 리뷰, 리드머 2015년 3월 22일자)


흑인 여성의 디아스포라, 그 목소리를 찾아서


이 앨범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간 작품이 바로 2018년 발표한 [The Blackest Joy]다. 이 작품에서 그는 흑인 여성의 디아스포라(이산, 이주)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간 아프리칸 디아스포라 논의는 남성 중심적으로 진행되었고, 또 해석되었다. 아쿠아 나루는 ‘흑인 여성은 늘 존재해왔고, 뿌리와 역사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항상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다. 다만 외부에서 우리를 침묵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었을 뿐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흑인 여성들의 과거를 끌어옴으로서 현재와 잇고, 그 과정에서 찾아낸 과거와 현재의 연결을 바라보며 자신들의 미래를 이해하고 또 전망하려고 한다.


▶ 아쿠아 나루가 2018년에 발표한 [The Blackest Joy] 앨범 자켓


그가 메시지에만 집중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발표한 세 장의 정규 앨범 모두 프로덕션을 비롯한 음악적 측면에서 매우 훌륭하다. 재즈와 힙합을 기반으로 하면서 아프리카의 리듬을 차용하는 곡, 랩과 스포큰 워드(시의 운율을 살려 낭독하는 방식)의 경계에서 자연스럽게 자신만의 속도와 박자감을 만들어가는 점, 무엇보다 모든 곡을 자신이 직접 쓰고 자신의 밴드를 통해 구현한다는 점은 음악적으로 면밀히 들여다보고 평가해야 할 부분이다.


아쿠아 나루가 들려주는 흑인 여성의 역사와 현재, 그리고 그 정체성을 지닌 사람으로서 내는 목소리는(아쿠아 나루 자신도 연구자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특히 문화연구를 하는 사람이라면 꼭 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흑인 여성으로서 현재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늘고 있지만, 이렇게 깊이 있게 과거와 현재를 잇고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지는 사람은 음악 쪽에서 흔치 않기 때문이다.


아쿠아 나루에 관해 좀 더 궁금한 사람은 직접 공개한 뮤직비디오를 감상해보자. 영상 수가 많지는 않지만, 음악적 역량과 메시지를 가장 빠르게 접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래도 뮤직비디오가 아닐까 싶다. 가장 추천하는 곡은 “My Mother’s Daughter”이며, 내한 공연을 통해 한국인에게도 익숙한 가수 에릭 베네(Eric Benet)가 피쳐링한 곡 “Made It” 역시 추천한다.  (블럭)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 AKUA NARU - My Mother's Daughter (Official Video) https://bit.ly/2CIP9E4

※ AKUA NARU feat Eric Benet - Made It (Official Video) https://bit.ly/2MxNeX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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