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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숏 컷? 왜 했어!”

[Let's Talk about Sexuality] 탈코르셋 운동이 가져온 변화 (원은지)


※ <일다>는 여성들의 새로운 성담론을 구성하기 위하여, 몸과 성과 관계에 대한 다양한 가치관과 경험을 담은 “Let's Talk about Sexuality”를 연재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아 진행됩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내가 숏 컷을 하기로 결심한 이유


“이런 꼴로 취업은 어떻게 하려고?”


6월 초, 갑자기 숏 컷으로 나타난 나를 본 할머니가 걱정을 가득 담아 내뱉은 첫 마디다. 내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설명해야 하나 우물쭈물하는 사이, “그래도 은지는 예쁘니까 취업할 수 있을 거야. 괜찮아.” 라고 할머니는 말했다. 그 말에 나는 “취업 전에 언제 해봐요. 여름이라 더워서 잘랐어요.” 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우리 집에서 ‘예쁜 딸’인 내가 할법한 대답이었다.


여자는 예쁜 게 당연하며 권력이라고 생각하는 할머니. 할머니의 생각과 별반 다르지 않은 현실. 나는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알아서 내가 ‘숏 컷’을 결심한 이유를 잠시 지웠다.


숏 컷을 한 후, 조별 과제를 같이 하던 남선배는 “야, 머리 진짜 왜 잘랐냐? 남자 같아.” 라고 쏘아댔다. 대꾸하기 싫었던 나는 “그냥 더워서 잘랐어. 발표 대본이나 짜.” 라고 답했다. 고작 머리 길이로 여남을 구분한다고? 환멸이 느껴지는 그의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왜 머리 잘랐어?” 뒤에 오는 말이 “남자 같아”인 이 사회가 성별을 ‘머리 길이’로 구분하는 현실을 마주하게 됐다.


사실 나는 숏 컷으로 머리를 자른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탈코르셋 운동’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숏 컷한 이유를 제대로 답하지 못했던 날을 떠올릴 때마다 자괴감에 빠졌다. 한국 사회가 여성을 쉽게 대상화하듯 나도 스스로의 입장을 지워왔구나, 하는 마음에 나 자신에게 미안했다. 이제 나에게 진정한 자유와 용기를 찾아주고 싶었다. 타인의 시선에 의존하지 않는 내가 되기로 했다.


▶ 숏 컷으로 머리를 자른 후 내 몸과 마음은 보다 자유로워졌지만, 주변에서 왜 머리를 잘랐냐는 질문 세례를 받게 되었다. ⓒ원은지


외모를 꾸미지 않을 권리


탈코르셋은 몸매 보정 속옷을 뜻하는 ‘코르셋’을 벗어난다는 의미이다. 여성들이 남의 시선을 의식해 억지로 외모를 꾸미지 않을 것을 주장하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운동이다.


남자의 보호 본능을 자극한다고 광고하는 복숭아색 볼 터치, 붉은색 아이섀도 등 건강에도 해로운 색조 화장, 눈매를 또렷하고 부드럽게 보이기 위해 연장하는 속눈썹, 갸름한 얼굴형을 위한 턱 보톡스, 안면 윤곽주사 시술 등… 이른바 ‘예뻐지기 위한 노력’이 많은 시간과 돈을 낭비하는 일이자 끊임없는 강박이라는 것을 여성들은 잘 안다.


탈코르셋 운동을 통해 “여성은 아름다워야 한다”는 암묵적인 규범을 거부하고 있다. 가부장제에 세뇌된 미의 기준을 벗어나고, ‘여리여리하다’느니 ‘소녀 같다’느니 하는 말로 주입된 ‘여성성’을 부수고 싶다.


화장과 다이어트, 성형뿐 아니라 최근 유행하는 크롭티, 미니스커트, 오프숄더 등 신체를 부자유스럽게 하는 옷 대신 편한 복장을 하고 다님으로써 신체의 해방을 가져왔다. 


나는 탈코르셋이 시대의 흐름이라고 생각하는 페미니스트로서, 내 경험을 바탕으로 탈코르셋 운동이 내 삶에 가져온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 거울과 여자. 코르셋을 하나씩 벗어버리면서 이 진부한 도식을 깨고 싶다. 


예뻐야 하는 여자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은 


나는 계절에 상관없이 반바지와 테니스 스커트, 몸에 딱 붙는 상의를 즐겨 입었다. 버스를 탈 때, 지하철 에스컬레이터를 오를 때 누가 내 몸을 쳐다볼까 찝찝했다. 그럼에도 예뻐 보이고 싶어서 불편해도 꾸역꾸역 입었다. 하체가 통통한 것이 콤플렉스인 나에게 하체 비만인 여자는 짧은 하의를 입어야 예뻐 보인다고 미디어에서 알려줬다. 또 딱 붙는 티를 입으면 하체로 갈 시선이 상체로 오기 때문에 날씬해 보인다고 배웠다. 이 두 가지를 나의 옷 입는 스타일에 반영했다.


나는 내 다리를 몇 초간 뚫어지게 쳐다보는 남자들의 시선보다 그들이 내 몸매를 어떻게 평가할지 더 신경 써왔다. ‘내가 꾸미고 싶어서 꾸몄는데 뭐가 문제야?’라며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모순이다. 크롭티를 입고 외출하면 그날은 밥도 제대로 못 먹었다. 오프 숄더를 입고 외출하면 버스 손잡이도 제대로 못 잡았다. 구두를 신고 외출하면 돌아다니다가 발에 피가 났다. 그때의 나는 예쁜 게 최고라고 생각하며, 타인이 내 모습을 평가하는 것에 심하게 집착했던 것이다. 그래서 스트레스도 엄청 받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버스에 빈자리도 많은데 하필 내 옆에 어떤 아저씨가 와서 앉았다. 그는 내가 내릴 때까지 나의 허벅지와 가슴을 번갈아 가며 뚫어지게 쳐다봤다. 나는 두려움을 느꼈다. ‘금방이라도 만질 것 같은데’, ‘만지면 어떻게 해야 하나’ 안절부절못했다. 반면 그 아저씨는 웃으며 내 몸을 훑었다. ‘딱 붙는 흰색 반팔 티에 앞치마 같은 미니 원피스’를 입었던 내 모습, 수치심과 모멸감을 느낀 그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탈코르셋 이후, 이제 나는 더 이상 안절부절못하지 않는다. 그동안 나를 ‘시선강간’하던 남자들에게 당해왔던 대로, 나를 빤히 쳐다보는 사람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그러면 보통 내 눈을 3초 이상 못 마주치고 허공으로 시선을 돌린다. 짜릿하다. 그는 속으로 ‘뭐 저렇게 머리 짧은 여자가 있어?’ 라고 생각했겠지.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내가 성적으로 대상화되는 위축감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드디어 사람으로 대우받는 구나’ 싶었다.


탈코르셋 전에는 화장이 무너지거나 머리 스타일이 망가질까봐, 땀 흘리는 것과 비 오는 날이 혐오스러웠다. 지금은 정반대다. 탈코르셋을 통한 신체의 해방은 나에게 땀 흘리며 운동하는 즐거움을, 비 내리는 거리를 거니는 여유를 선물했다. 내가 계속 테니스 스커트에 크롭티만 입고 다녔다면, ‘따릉이’(서울시 공용자전거)를 타고 한강을 달리는 자유를 만끽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그동안 외모 망가질까봐 꺼리던 활동들을 하며 스트레스를 풀게 되다니, 이제야 제대로 사는 것 같다.


인턴생활, 회사에 출퇴근하며 탈코르셋을 전시하다


나에게 탈코르셋 운동은 ‘지름길’과도 같다. 여성 인권 신장의 지름길 말이다. 여성들이 코르셋을 벗으며 다른 여성들에게 ‘꾸미지 않아도 될 용기’를 주는 것 자체로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올 6월 말,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8주 동안 본가에서 1시간 정도 거리가 있는 회사에서 인턴을 했다. 이 얼마나 ‘탈코르셋 전시’에 적합한 환경인가! 나는 출퇴근하는 지하철에서, 그리고 회사에서 ‘여자가 꾸미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기로 했다. 동시에 내 존재 자체가 누군가에게 ‘용기’가 되길 바랐다. ‘긴 머리, 화장, 치마와 원피스, 딱 붙는 옷, 브래지어’를 차례차례 벗었고, 그 내용을 SNS에 전시했다.


인턴 생활 첫 주, 투명 메이크업을 했다. 한 달 뒤, 선크림과 눈썹만 덧바르고 다녔다. 출근 복장은 바지에 셔츠를 입었다. 답답한 브래지어 와이어에서 탈출하고자 러닝 브라 등을 했다. 인턴이 끝날 때쯤에는 다회용 니플 패치로 갈아탔다.


나는 이렇게 긴 머리를 자르는 것을 시작으로 탈코르셋 운동에 불을 지펴왔다. 가장 최근 벗은 게 숏 컷이다. 얼마 전, 내 머리는 숏 컷에서 ‘투블럭컷’으로 진화했다. 머리 옆과 뒤를 이발기로 민 ‘투블럭컷’은 내 머리카락에 해방을, 마음가짐에 혁명을 불러왔다. 앞으로 나는 절대 꾸밈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꾸미는 행위가 결코 나를 위함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에.


▶ 내가 투블럭컷으로 헤어스타일을 바꾼 건, 이 사회의 코르셋에서 해방되겠다는 의도적인 행위이자 운동이다. ⓒ원은지


“예쁜 게 여자의 능력?” 내 안의 여성혐오와 마주하다


수많은 드라마, 영화, 웹툰, 광고에서는 ‘여자는 다 필요 없고 예쁜 게 최고다’고 강요한다. ‘여자는 몸매가 좋아야 자기 관리하는 거다’, ‘여자는 남자의 말에 이기려 들지 말되, 스킨십은 적극적으로 리드해야 한다’ 등등. 말하자면 끝이 없는 ‘일부’ 남자들이 생각하는 ‘개념녀’(?) 프레임. 나는 이 프레임에 갇힌 피해자였다. 거울 속 ‘예쁜 나’만 찾던, 코르셋에 집착하던 시절을 떠올리면 밤마다 이불을 뻥뻥 찬다.


가슴 밑까지 오는 긴 머리 소유자였던 나는, 머리를 감고 말리는 데에만 30분 이상 걸렸다. 고개 숙여 음식 먹을 때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불편했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에는 머리카락이 시야를 다 가렸고, 입에도 왕창 들어왔다. 겨울에 눈이라도 맞으면 젖은 머리카락이 그대로 꽁꽁 얼었다. 몇 달 전에는 머리카락이 엘리베이터 문 사이에 낀 적도 있다. 그때 나는 내가 아니라 ‘머리 스타일’이 죽지 않았는지부터 살폈다.


그럼에도 나는 내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긴 머리’ 때문에 신체적 활동이 불편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머리를 쉽게 자르지 못했다. “얼굴형이 못 생겨서 머리 못 잘라” 등의 얘기들을 들으며, 과연 누가 사회적 미의 기준이 여성을 억압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을까? 게다가 긴 머리 관리는 ‘핑크 택스’(Pink Tax, 여성용 물건에 더 비싼 가격이 매겨지는 것)가 붙어 숏 컷 관리보다 비싸다.


중고등학교를 같이 다닌 동네 친구들과 만나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단골 주제도 ‘꾸밈노동’이었다. 바로 화장, 미용, 다이어트, 옷, 연애 등이다. 그중에서도 대화 몇 가지는 아직도 기억난다. “인생에서 한 번은 아이돌처럼 말라봐야지”, “오늘 눈 화장 잘 됐다?”, “너 팔뚝 좀 살쪘다”, “야, 남자들은 그런 성격 별로 안 좋아해”, “여자 연예인 누구, 너무 예뻐서 부러워.”


아무렇지 않게 해 온 이야기들은 사실 우리 안에 ‘여성혐오’가 자리 잡게 했다. 내 안의 여성혐오는 사회적으로 규정된 여성의 역할을 나 자신에게 강요했다. 또 나의 외모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다. 아주 자연스럽게 세포 단위로 외모를 품평하게 만들고, 하루에 한 끼만 먹는 가혹한 다이어트를 하게 만들었다.


여자가 머리 자르면 ‘무슨 일 있냐’고 묻는 사회에서


차근차근 탈코르셋을 실천하고 있는 지금, 이제는 욕심이 생긴다. 내가 탈코르셋을 통해 누린 자유를 더 많은 여성과 같이 느끼고 싶다.


며칠 전, 일명 ‘주체적 꾸밈노동’을 하던 시절의 나와 투블럭컷을 한 지금의 나를 비교한 사진과 내 달라진 마음가짐을 적은 글을 함께 올렸다. 몇 시간 뒤 고등학교 동창인 여자 친구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무슨 일이야? 글들이 심상치 않아. 머리도 자르고….”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난감했지만, 한편으로 이런 반응을 받는 것이 좋았다.


나는 “머리 자르는 게,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야. 여자가 머리를 잘라도 ‘무슨 일 있나?!’ 생각하지 않고 자연스러워질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 싶어. 여자인 내가 하면 숏 컷도 그저 ‘여자 머리’가 되는 게 당연한 사회 말이야!”라고 답했다. 모쪼록 내 대답이 그 친구에게 유의미한 울림을 줬으면 한다.


적어도 나를 만날 때는 화장을 간소하게 하고 오는 친구들과, 내 머리를 보고 숏 컷을 한 엄마 등 내 주위만 봐도 탈코르셋에 대해 관심을 갖는 여성들이 늘고 있다.


누군가가 나에게 “투블럭 왜 했어요?” 묻는다면 나는 “당신은 왜 머리카락을 기르나요?”라고 되묻겠다. 내 안의 여성혐오와 마주 보고 사회의 코르셋 강요에서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투블럭을 한 후, 맨 얼굴로 아르바이트도 구했고 학원도 잘 다니고 있다. 탈코르셋 한다고 하늘은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니 화장 안했다고 고개 숙이고, 마스크 끼고, 모자 눌러쓰고 다니는 여성들이 당당해졌으면. 그 과정이 낯설고 두렵고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내가 당신의 용기가 될 것이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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