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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여성할례’ 악습이 전부 폐지되는 날까지
<우리 자신의 언어로-독일 난민 여성들의 말하기> 빈투 보장②
독일에서 살고 있는 난민여성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베를린의 정치그룹 국제여성공간(IWSPACE, International Women Space)에서 제작한 <우리 자신의 언어로-독일 난민 여성들의 이야기>에 수록된 내용으로, 이주여성과 난민여성으로 구성된 팀이 다른 난민여성들을 인터뷰하여 1인칭 에세이로 재구성한 것이며 하리타님이 번역, 해제를 달아 소개합니다. “나는 여성성기훼손 피해자다”(I am a victim of Female Genital Mutilation) 편의 주인공은 아프리카 감비아에서 독일로 망명한 20대 초반의 여성입니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보도합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강제 결혼, 면도날로 내 성기의 봉인을 푼 날
내가 할례를 당하고 나서 5년 뒤에 사람들은 결혼을 강요했다. 5년 뒤니까 나는 16살이었다. 상대 남자가 몇 살인지는 몰랐다. 내가 유일하게 아는 것은 그 사람의 성이 나와 같았기 때문에 아버지의 형제든가 친척으로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사람 역시 성이 ‘보장’(Bojang)이었다. 나는 그 남자를 우리 마을과 가족의 어른으로 알고 있었고, 아버지를 부르듯이 ‘바’(Ba)라고 불렀다. 몇 살인지는 몰랐지만 아버지보다 더 나이 들어 보였다. 그 사람은 부인이 이미 셋 있고, 내가 네 번째가 될 참이었다.
사람들이 나에게 오늘 결혼식을 한다고 했을 때 믿을 수가 없었다. 라마단 기간 금요일이었다. 지금도 그날을 잊을 수 없다. 모스크에 갔다가 돌아오니, 집에 사람들이 있었다. 아주 많았던 것은 아니고 내가 이모라고 부르는 여자들과 더 나이든 여자가 있었다. 아버지가 나를 부르더니 그 여자들을 따라가라고 했다.
나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아버지의 부인들 중 하나가 천을 가져왔다. 여자가 결혼할 때 입는 특별한 천이었다. 남편 집에 가는 첫날에 사람들이 신부에게 그 천을 주는데, 그러면 무늬 없이 새하얀 천과 함께 그걸 둘러 입는다. 그 흰 천이 처녀 피가 닿아야 할 곳이다. 그게 모든 사람들에게 신부가 처녀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어떤 남자도 이 여자를 건드리지 않았다는 것. 남편이 그 여자를 아는 첫 남자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천을 보여주는 그날 밤, 여자들은 자신이 결혼한다는 것을 곧바로 알게 된다.
사람들이 그걸 가져왔을 때 나는 “누구한테요?”라고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답은 않고 자기들과 같이 가자고 했다. 나는 “남편 이름을 모르고서는 어디로 갈지 몰라요”라고 하면서 울었다. “안 갈래요.” 아버지는 말했다. “아니, 너는 저 사람들을 따라가는 거다. 그게 네가 원한 바니까.”
아버지 말은 결혼이 내가 할례의 비밀을 공개적으로 발설해서 일으킨 문제를 책임지는 벌이라는 의미였다. 나는 당시 선생님에게 다 털어놨고, 선생님은 나보고 TV에 나가서도 말할 수 있겠냐고 했다. 선생님은 글로도 쓸 수 있겠냐고 물었다. “네, 쓸 수 있어요.” “비디오 인터뷰를 할 수 있겠니?” 선생님들은 나를 방송국으로 데려갔고 나는 모든 걸 말했다. 사람들을 내 증언을 녹화해서 방송으로 내보냈고 우리 가족에겐 끔찍한 일이 되었다. 우리 아버지가 그런 일에 대처하는 마을 대표였다. 대처해야할 일이 다른 가족이 아니라 바로 우리 가족에게 생긴 것이었다. 사람들은 아버지를 찾았고 긴급 회의를 열었다.
사람들은 나를 나이 많은 여자에게 데려갔다. 아프리카에선 화장실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지? 화장실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깥에 있다. 사람들은 나를 변소가 있는 공터 오렌지 나무에 묶었다. 날이 밝을 때까지 나를 거기 두고 본다고 했다. 나는 다행히도 잠이 들었다. 사람들은 나를 때리기도 하고 여러 가지를 했다. 그러다가 이제 나를 결혼시키기로 결정한 것이다.
아버지의 비밀 대책이 바로 그거였다. 아버지는 생각했겠지. “그 애가 결혼하면 학교를 관두게 될 거야. 서구교육 때문이야. 그래서 내 딸애가 겁이 없는 거야.” 고향 사람들은 내가 서구식 교육을 받아서 전통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나를 최대한 빨리 결혼시켜서 다 잊어버리게 하려고 했다. 학교를 관두고 전통을 따르도록 말이다. 그렇게 된 거였다.
사람들은 나를 그 남자의 집에 데려가서 처녀성을 풀었다. 그 남자는 다른 여자들 앞에서 나와 자야했다. 내가 완강하게 저항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남자와 안 잘 거라고 했다. 나는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말했다. “술레만, 당신은 사악해! 당신 정말 나빠. 꺼져버려. 천둥이 내려버려라.” 나는 그 사람을 모욕하고 저주하며 말했다. “신이 당신을 벌할 거야. 정말 나빠! 나 말고 당신 딸이랑 결혼하지 그래?”
내가 저항하는 와중에 일어난 일은, 면도날 아시는지? 사람들은 면도날을 가져와 두개로 쪼개서 내 거기에다 대고 봉인을 풀었다. 그러고 5초 내에 남자가 여자와 자야지, 아니면 다시 닫혀버린다. 아, 자매들, 정말 쉽지 않았다. 겪어보지 않고는 아무도 이해 못할 것이다.
여기 독일에서도 나와 같은 문화와 전통에서 온 여성들을 많이 만났지만, 이야기하기 쉽지가 않다. 그들은 나와 같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내가 단합해서 이런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자고 하면 날더러 미쳤다고 할 것이다. 몇몇은 심지어 나와 연락을 끊기도 할 것이다. 전화하면 안 받고 번호를 차단할 것이다. 오늘날에도 그 사람들을 나를 급진적으로 본다. 유럽까지 왔으면서도 그들의 눈은 아직 닫혀있다. 이 문제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하지 않고, 아직도 말을 꺼냈다가는 죽을 것이라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 그래서 내게 이 야만적 행위를 같이 멈출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 98%에 달하는 15-49세 여성들이 성기훼손수술을 받는 소말리아에서는 2016년부터 정부가 나서 전면 금지 법안을 추진 중이다. ‘할례’를 받아야 좋은 조건으로 결혼할 수 있고, 불결한 여자라는 낙인에서 면한다는 가부장적 문화 때문에 당사자 여성들 중에서도 1/3정도만 할례 폐지에 찬성한다는 여론 조사 결과는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보여준다. 글로벌 온라인캠페인 단체인 ‘아바즈?행동하는 세계 (AVAAZ)’에서 소말리아 여성성기훼손 폐지를 위한 150만 명 청원이 진행 중이다. (한국어 링크: https://secure.avaaz.org/campaign/kr/fgm_somalia_ban_loc)
독일에서 체류권을 받았지만,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
독일에서 인도적 이유로 체류 허가를 받기까지 3년이 걸렸다. 사람들은 내 망명신청을 거부 했었다. 내가 TV에 나간 적 있다고 했는데, 그 증거가 되는 녹화테이프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담임선생님이 나를 방송국에 데려가서 할례에 대해 증언하게 했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들은 왜 녹화테이프가 없냐고 했다. 내 망명신청을 거부한 담당자는 여성이었다. 이 여자를 다시 마주칠 기회는 없겠지만, 사실 그 사람에게 묻고 싶었던 것 한 가지는 ‘당신은 다른 여성들의 안녕에 관심이 있는가’ 라는 것이다. 어떻게 나 같은 16살짜리 여자아이가, 간신히 도망쳐온 아이가 방송국에 가서 녹화테이프를 달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독일로 오게 될 지도 몰랐다. 단지 안전한 곳을 찾았을 뿐이다. 사람들은 어느 나라로 가고 싶냐고 묻지도 않았다. 교회에서 돈을 받고 내 피난을 도와준 사람들이 있다. 목사님은 나한테 그랬다. “네가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곳으로 가게 돕는 중이다. 그런데 어디로 가게 될지는 우리도 모르겠구나. 아프리카 말고 유럽의 어느 국가였으면 좋겠다. 아프리카 국가라면 사람들이 너를 쫒을 수 있거든.” 우리 마을 사람들은 나를 정말로 죽이고 싶어 했다. 그런 일을 저지르고 수 년이 지나도록 내가 멀쩡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른 사촌들이 나를 보고 비밀을 폭로하는 본보기로 삼지 않기를 원했다. 우리의 문화와 전통에 죄를 불러들이기 전에 나를 없애버리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이제 체류권은 있지만 나는 아주 아주 큰 어려움을 마주하고 있다. 내 생각에, 내 처지는 인도적 이유로 체류권을 얻기 전이 나았던 것 같다. 사람들은 법 25조 3항에 근거해 내게 체류 허가를 주었는데, 교육 과정에 있는 사람으로 분류되어 이 체류권으로는 실업급여를 받을 수가 없다. 학교에 다니면 학생 대출만 받을 수 있다. 학생 대출을 신청했지만 거절당했다. 나는 여기에 온 지 3년이 되었는데, 독일에 체류한 기간이 4년 9개월 이상 된 사람들에게만 돈을 빌려준다고 했다.
이제 사회복지국에서는 더 이상 나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한다. 고용청에서도 해당 사항이 없다고 했다. 나는 중간에서 오도 가도 못 하게 되어, 집세는 어떻게 내고 아이와 나 둘을 어떻게 먹여 살릴 지 모르겠다. 외국인청에서는 아이 몫으로는 보조금을 주기로 했다. 사회복지국과 연계해서 아이는 아직 자기들 책임 범위에 있다면서 매달 249유로를 지급한다고 했다. 아이에게 그만큼이 나오고 추가로 집세의 절반도 내준다. 나머지 절반의 집세와 식비는 내가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나는 담당자 여성에게 내가 어떻게 돈을 마련해서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냐고 물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구직을 하세요.” 나는 또 물었다. “제가 거리로 나가서 몸을 팔길 원하세요? 제 학력으로 어떤 일을 구할 수 있나요? 집세 내고 옷가지에 음식 살 돈을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요?” 나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
내 생각에 독일은 선진국이고, 민주주의 국가다. 그런 면에서 아주 큰 나라이다. 전 세계에서 많은 눈들이 독일을 지켜보고 있다. 이 나라에 발을 들여놓은 나는 임신 막달에도 앞날의 성취를 생각하면서 학교에 의무적으로 나갔다. 독일에서 나는 삶의 희망을 품게 되었는데, 지금 사람들은 나를 아무 희망이 없게 만들고 있다. 나는 억압과 차별을 받는다고 느낀다. 교육받을 권리도 박탈당했다. 나는 지금 의료보험도 없다. 내 아이도 마찬가지다.
보험사에 편지도 보내 보았지만 거기서는 고용청에서도 사회복지국에서도 내 몫으로 보험료를 내지 않기 때문에 나를 받아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니 누구도 내가 어디 있는지, 어디에 서 있는지 알지 못한다. 내 상황은 매우 끔찍하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으려 한다. 빛이 있는 한 희망도 있다. 변호사와 상담해보니 그 분은 아이는 앞으로도 괜찮을 거라고 했다. 나는 아이 여권도 신청했다. 시간이 지나면 아이는 영주권을 받을 것 같다. 지금 당장에도 아이는 체류권을 가지고 있다.
세상의 모든 딸들이 내가 겪은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나는 여성성기훼손에 맞서 싸워야 한다. 인권단체들이 와서 이 싸움을 도왔으면 좋겠다. 나는 두 가지 슬로건을 생각해냈다. “우리 여자아이들에게 그만 칼질해라(Stop cutting our girls)”, “한번 상처 입은 소녀는 영원히 상처 입은 채 살 것이다.(A wounded girl will be wounded forever)” 사람들이 나에게 상처를 냈고, 이 상처를, 나는 화장실에 갈 때마다 본다. 지금도 상처로 보인다. 나는 섹스를 결코 즐기지 못했고 지금도 아프기만 하다. 항상 고통스럽다. 다른 여자들이 섹스에 대해 얘기하거나 영상 속의 섹스 하는 여자들이 내겐 놀랍다. 어떻게 저런 감각을 느끼지? 무슨 약이라도 한 것 아닌가? 사람들은 이런 내 말을 듣고 웃어 버린다. “그런 거 아니야.”
※FGM으로 인한 피해자의 고통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다양하며 일생에 걸쳐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성적 만족이나 희열 대신 통증을 느끼고 배뇨과 월경, 임신과 출산 시에도 고통과 염증을 빈번히 겪는다. 우울증과 트라우마 증세를 보이는 경우도 흔하다. 첨단 재생 수술을 통해 클리토리스를 복원하고 훼손된 조직과 감각을 바로잡는 것이 가능해졌지만, 대다수 피해 여성에게는 접근이 어려운 선택지이다.
솔직히 나는 남자에 대한 성욕을 느껴본 적이 없다. 안다, 이게 끔찍한 일이라는 것을. 정말 끔찍하다. 그래서 나는 국제기구에게 우리가 단체를 만들고 운동을 시작할 수 있게 도와 달라 요청한다. 아직도 할례를 행하는 아프리카 여자들에게 가서 얘기할 수 있도록. 우리에겐 힘이 필요하다. 그냥 무작정 뛰어가서 ‘여성 할례’라는 오랜 전통을 중단시킬 수는 없다. 사람들의 인식을 일깨우고 싶다.
내 말은, 나한테 전화기가 한 대 있으면 할례 전통이 없는 국가에 우선 사무실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우리 활동가들은 여기 저기 파견을 다닐 것이다. 너무 위험하고 어렵기 때문에 활동가들이 할례를 시행하는 국가들에 머물러선 안 된다. 하지만 나는 준비가 되어있다. 내 몸의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다가오는 세대가 여성성기훼손에서 자유롭게 되는데 쓸 준비가 되어있다.
▶ 한국인 여성감독 김효정이 아프리카 현지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소녀와 여자>(Where am I: Beyond Girl and Woman, 2015) 포스터. 할례를 거쳐 공동체에서 성인 여성으로 인정받았지만 평생 수술 후유증을 안고 살아야 하는 여성들과, 할례를 거부하고 사회적 낙인과 차별에 시달리는 여성을 대비시키며 여성성기훼손 이슈를 조명한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많은 여성들이 페미니스트 선언을 하고 수많은 캠페인이 쏟아져 나오던 2016년 여름 개봉했다.
UN을 비롯한 인권단체들이 감비아에 가서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캠페인을 하면 사람들은 당시에는 “알겠다, 그만두겠다”고 하지만, 단체들이 떠나고 나면 원상 복귀할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아기들에게도 그런 짓을 한다. 예전에는 좀 자랄 때까지 기다렸다면, 지금은 출생 즉시 여아의 성기를 절제하기도 한다. 누구도 아기들의 성기를 확인해 보자고 하지는 않으니 상황을 제대로 밝혀내기가 어렵다. 여자들도 남자들도 각성해야 한다.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는 남자들은 무지하기 짝이 없다.
나는 아버지를 비롯해 가족과 그동안 전혀 연락하지 않았다. 그럴 마음이 안 든다. 나는 그저 나 자신의 배움과 성장에 집중해야 한다. 다음 세대를 위한 싸움을 준비하기 위해서. 이건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하다. 독일에서 매일 매일, 새로 날이 밝아 올 때마다 나는 싸움이 시작되는 것을 본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계속 생각한다. 사람들을 이런 문화에서 구해내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때로는 울음이 북받친다.
독일에 처음 올 때부터 나는 머릿속에서 할례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뒤셀도르프에 있는 정신과로 보내져서 지금도 받고 있는 심리치료를 그 때 시작했다. 나의 치료사 로디카 아누타(Rodika Anuta)는 나의 절친이기도 하고 무척 좋은 사람이다. 나는 우울해질 때마다 전화를 걸고, 그러면 그녀가 우리 집으로 와준다. 난민 숙소에 있을 때에는 자살 충동을 느끼곤 해서 사람들이 나를 치료사에게 데려가곤 했다.
독일에 처음 왔을 때, 여기서는 모든 게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이 잘 풀리기도 하고 안 풀리기도 하는 기복을 못 견디고, 살 가치가 없으니 자살하는 게 낫겠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린 아들이 내 곁에 있다. 모든 아이에게는 보호자가 필요하다. 어린 세대에게 내가 필요하다. 그들이 내가 겪은 고통을 당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어떤 여자도, 어떤 아이도 그런 위험을 감수하게 할 수 없다. 여성성기훼손 문화를 뿌리 뽑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다양한 지원이다. 사람들로부터 지원이 필요하다.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앞으로 나서서 함께하자고, 함께 손을 잡고 이 뿌리 깊은 전통에 맞서 싸우자고 청한다.
▶ 나는 전통이라는 이름의 여성성기훼손에 맞서 싸우자고 세상에 청한다. ⓒ일다 (일러스트: 두나)
<번역자 노트> 여성할례 대신 안전하고 포용적인 통과의례를…
이집트 카이로에서 성장한 친구 A에게 대화를 청했다. 연락하기까지 한참을 망설였다. 이집트의 여성성기훼손 피해자 비율이 높아서 ‘혹시 이 친구도?’ 싶어서였다. 글 쓴다는 명분으로 친구의 상처를 들쑤시는 일이 될까 두려웠다.
이집트에서 ‘여성할례’는 도대체 얼마나 흔한가. A가 체감하는 현실이 궁금해서 지난 20여년 전부터 현재까지의 시점에서 물었다. 그 친구는 기억을 더듬더니, 10여 년 전인 2007년 대통령 영부인을 비롯한 고위 정치인들의 적극적인 캠페인으로 법적 금지가 달성된 것이 기억난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도 시골마을에서 아직도 널리 행해진다는 게 상식이라고.
A는 사실 자신도 잘 모르겠다고 털어놓았다. 후발 산업국가들에서는 도시-시골의 격차나 경제적 계층 차가 상대적으로 훨씬 커서, 저소득층의 교육수준 낮은 시골민들은 주류 정치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있고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엄마가 선진국 독일에서 온 백인여성이라서 자기 가족은 자동적으로 상류층에 속했고, 교육수준이 높으며 보다 서구화된 생활을 하는 이들-자신의 부모 세대는 딸들에게 할례를 더 이상 안 시켰다는 것이었다. 이제 질문은 이전 세대가 들려주는 구술사에 대한 것으로 바뀌었다. A가 아는 한, 자신의 고모 2명은 확실한 피해자였다.
“고모 중 한 명은 할례 철폐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액티비스트가 됐어. 고모는 굉장히 강인하고 당당한 여성이야. 본인 말로도, 내가 받은 인상으로도 할례 당한 경험이 고모 인생의 가장 큰 변화 계기였대. 트라우마 이후의 성장(post-traumatic growth) 사례라고 할 만하지. 고모는 할례의식 때의 가장 큰 충격으로, 아픈 감각 말고도 배신감을 느꼈다고 했어. 믿었던 어른들, 가족, 마을 공동체에 대한 배신감, 모두가 자기를 버렸다는 느낌.”
배신감. 어쩌면 이것이 할례 의식의 본질 중 하나인지도 모른다. 개인의 안녕보다 집단의 질서 유지가 더 중요하다는 교훈을 주는 것. ‘홀로 선 개인은 더없이 나약하고 집단적 힘은 거대하니, 집단에 순응하라.’ 화자 빈투의 글에도 나타나 있다. 집단의 폭압과 길들이기를 거부한 그녀의 트라우마 역시 배신감과 깊이 관련되어 보인다. 배신 사건은 상습적 불신과 거리두기로 이어졌다. 빈투는 거듭 대상을 특정하지 않고 ‘그들’(they, them)이라고 칭했다. 자신을 덤불 속으로 끌고 들어간 우악스런 손들의 주인인 마을 여자들도, 비밀을 폭로한 부족의 배신자 아이를 나무에 묶어놓고 매질한 마을의 아버지들도 ‘그들’이다. 원가족과 친척, 늙은 남편, 학교 선생님들이 개별적으로 호명될 때도 있었지만 더 많은 경우 그냥 ‘그들’이었다. 마치 구별이 그닥 의미 없다는 듯이.
해결되지 못한 트라우마는 현재에도 계속 그늘을 드리운다. 비디오테이프를 요구하며 망명신청을 거부한 난민청 직원들도, 보험료를 내주지 않는 복지국과 이민청도 다 ‘그들’이다. 독일에 와서도 빈투는 좀처럼 신뢰할 수 없고 환대도 베풀지 않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고 느낀다. 온 세상과 반목하는 지독히 외로운 한 여자의 초상이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빈투는 여성 할례 철폐를 위해 싸우는 액티비스트로 자기 정체화하면서 ‘우리’라는 대명사를 쓰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들’과 아직은 같이 쓰인다. 아마도 그녀의 사무실, 여성할례 폐지를 위해 싸우는 그 단체가 문을 여는 날에야 ‘우리’의 시간이 시작될 모양이다. 꼭 그러길 바란다.
한편, 친구 A는 여성 할례 철폐를 외치는 주류 캠페인들에 대체로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외의 발언도 했다. 여성 할례가 잔인한 행위인 것은 맞지만, 동시에 아주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풍습인데, 서구 사회가 주도하는 대부분의 반대 운동이 문화적 맥락에 너무 무관심하고 몰이해하다는 것이다. 아직 할례 전통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들 성품이 극악무도해서가 아니라, ‘희생을 감수하며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것’ ‘희생이 뒤따르기 때문에 더 가치 있는 의식’이라고 믿는다고 했다. 자기들이 어릴 때 직접 겪고 본 일인데 아픈 줄 모르겠는가? 알면서도 이를 악물고 칼을 들고, 눈물을 흘리며 자리를 지킨다. 그런 사람들과 대화할 때 서구의 인권 개념을 들며 가타부타하는 것은 사실상 효과가 없다는 게 A의 분명한 입장이었다.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오늘날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인권 개념은 유럽에서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때 걸음마를 뗀 상대적으로 젊은 ‘전통’이며, 특권적 위치에 있던 남성 엘리트들의 사고실험에서 발전해온 대단히 서구-남성중심적 개념이다. 인권은 이미 구조화된 지식이며, 따라서 권력이기도 하다. 이 지식을 발명했고 여전히 전유하고 있는 서구 사회에서, 그리고 서구 사회가 개입하는 비서구 사회에서도 ‘인권’이라는 지식과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자는 심판자의 위치에서 때로 처벌까지 내린다. 게다가 19세기만 해도 여성, 유색인종, 노동자, 장애인, 동성애자, 노예 신분은 ‘열등한 인간’ 집단으로서 인권의 수혜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지금도 인권이 모두에게 두루 보장된 사회는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A가 가진 답은, 반대론자들도 여성 할례가 행해지는 문화적 맥락 속으로 들어와서 이를 대체할 만한 다른 통과의례를 함께 논의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통과의례는 어느 사회에나 있다. 기독교 문화의 세례와 첫 영성체, 산업화 사회의 졸업 시험, 운전면허. 초경과 피임약 복용 시작. 콘돔을 지갑에 휴대하기 시작하는 날. 이집트 시골 마을 공동체도 의식을 필요로 한다. 여성이 공동체의 어엿한 구성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거치는 안전하고 포용적인, 대안 의식 있어야 한다.
이집트에서 몇 년 전에 할례 철폐를 위한 TV공익광고가 방영된 적 있다. 아버지들이 나와서 여성 할례에 반대하며, 자신들 딸에게는 시키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이 줄거리였다. A는 지상파 채널에 나온 이 영상이 자신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려주는 A의 두 눈이 따뜻한 기억을 회상할 때처럼 부드러워졌다.
여성 할례는 여성 자신들에 의해 행해지고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풍습이었다. 하지만 남성들도 엄연한 책임자였다. 손에 직접 ‘피를 묻히지’는 않았지만 여성의 성과 생활을 통제하는 가부장제에서 자유와 권력을 누린 집단이기 때문이다. 또한 할례로 인한 아내, 어머니, 딸, 조카, 동생, 누나의 고통을 묵인해왔다. 그랬던 남성들이 일부라도 목소리를 낸 것은 할례 철폐 운동에 박차를 가했고, 치유의 시공간을 만들었을 것이다. 힘 있는 변화는 이처럼 안에서 온다. 그리고 언제나 사람을 통해 온다. 긴 잠에서 깨어나 싱싱한 얼굴로 새 세상을 말하는 사람들을 통해.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필자 소개] 하리타(정세연)- 독일살이 4년차. 온갖 차이와 차별에 대한 감각이 여전히 곤두서있다. 일다에 <29살, 섹슈얼리티 중간정산> 칼럼을 연재했고, 이를 바탕으로 <오늘부터 내 몸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어-더 자유로운 페미니즘을 위하여>(2017, 동녁)를 썼다.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환경사회학 석사과정을 마쳤고, 앞으로 젠더, 이주, 섹슈얼리티, 지속가능성을 주제로 계속 글쓰고 행동해나가려 한다. 하리타는 산스크리트어로 ‘초록’이다. facebook.com/haritamoonri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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