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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장 밖으로

[머리 짧은 여자 조재] 어떤 공동체


운동 시작 전. 사람들은 수다가 한창이다. 나를 빼곤 전부 중고등학생이다. 익숙한 풍경이다. 크게 둘로 갈라져 여자들은 여자들대로, 남자들은 남자들대로 수다 삼매경에 빠져있다.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혼자 스트레칭을 한다. 한 여자아이가 학교를 공학으로 갔어야 했다며, 아쉽다고 말을 꺼냈다. 그래도 체육관에 와서 남자아이들과 교류할 수 있다고 좋아했다. 다른 아이는 그럼에도 여긴 아니라고 툴툴거렸다. 여전히 익숙한 풍경이다.


여중, 여고를 나왔다. 학창 시절 친구들은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극에 달해 있었다. 학원에서 만난 남자애 이야기, 아는 오빠 이야기, 누구랑 누가 사귄다는 이야기를 하느라 쉬는 시간이 모자랐다. 딱히 이성에 관심이 없던 나는 말이 없었다. 가끔 누가 직접적으로 이상형을 물어오면, 쥐어짜낸 이상형을 대답하는 정도가 전부였다.


자주 소외감을 느꼈지만, 무리에 속하자고 관심도 없는 남자 얘기를 열성적으로 늘어놓을 정도의 의지도 없었다. 자연스럽게 이성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는 친구들끼리 더 친해졌다. 물론 그럼에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대학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봄이면 벚꽃엔딩이 흘러나오고 너도 나도 연애하는 분위기였다. 중고등학교 시절과 다르게 왜 연애를 하지 않느냐는 질문이 따라왔다. 눈 높은 척을 했다. 벽장 밖으로 나갈 생각도 없었으니 연애는 나와 너무 먼 세상 이야기였다. 커뮤니티 활동도 하지 않았고, SNS도 하지 않았다. 당연히 퀴어 친구가 없었다. 세상에 그렇게 퀴어가 많다는데 나 혼자 퀴어로 살아가는 것 같았다.


그러다 어떤 계기로 벽장에서 나오게 되면서 가입한 성소수자 동아리는 내게 숨 쉴 구멍이 되어줬다. 나를 숨기지 않아도 되고, 내 경험에 크게 공감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너무나 다양한 성지향성, 성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누구도 누구를 온전히 안다고 말할 순 없어도 그 다양성이 허용되는 공간이었다.


▶ 어떤 공동체  ⓒ일다 (머리 짧은 여자, 조재)


나는 겁이 많아 숨어 살았는데, 누구는 학창 시절부터 거리낌 없이 자기를 숨기지 않았다. 또 누구는 학창 시절까지 자신의 성지향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성인이 되고 깨달은 경우도 있었다. 살아있는 경험을 들을 때마다 내 경험을 복기하고 재해석하는 시간을 가졌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 자체가 배움이었다.


서로를, 또 자신을 더 알아가기 위해 스터디와 영화제, 소모임 등이 이어졌다. 연애에 대한 이야기도 빠질 수 없었다. 어느 집단에서도 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즐겁게 해본 적이 없는데,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연애 이야기를 듣는 건 생각보다 훨씬 즐거운 일이었다. (물론 로맨틱한 끌림을 전혀 느끼지 않거나 거의 느끼지 않는 에이로맨틱에 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나는 내가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지 않고, 공동체 생활이 잘 맞지 않는 사람이라 여기며 살았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별로 궁금하지 않았고, 사람을 최대한 만나지 않는 직종에서 일하고 싶었다. 요즘 느끼는 것은 내가 원래 속해 있던 공동체가 내게 맞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여전히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진 않지만, 이 공동체에 속해있는 것 자체는 내게 안정감을 줄 때가 많다. 자발적으로 독서 소모임도 만들고, 보고 싶은 사람들을 자주 만나고 있다. 요즘은 그것만으로도 그저 좋다.


※ 머리 짧은 여자 연재를 마칩니다. 작가 조재님과 이 연재를 사랑해주신 독자들에게 감사드리며, 4월에는 새로운 그림 연재로 찾아뵙겠습니다. [편집자 주]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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