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엄마와의 통화
[머리 짧은 여자 조재] 이해할 수 있을까, 이해해야 할까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딸. 뭐하고 계시나.
그냥 집에 있죠 뭐.
어째 전화를 한 통 안 하시나?
내가 전화가 끊겨서 전화를 못했네.
아이고. 그래서 못하셨어요?
네…. 근데 엄마 목소리가 술 마신 목소린데.
엄마 술 안 마셨어요~
거짓말. 엄마 목소리만 들어도 다 알아요.
아빠 목소리 들리네. 아빠 집에 있어?
네.
기침을 왜 이렇게 해.
사레 들렸나보지 뭐.
감기 걸린 건 아니고? 요즘 독감이 유행인데.
아니에요.
조재야. 네가 여자니까 아빠한테 잘 해. 네 아빠만큼 좋은 사람 없어.
예예. 나만큼 잘 하는 사람이 또 어디 있나.
알았어요. 딸. 근데 조재야. 엄마가 딸 그림을 찬이랑 연이한테 보여주니까 너무 잘 그렸다고 그러는 거야. 웹, 뭐? 뭐를 하라고 그러던데.
웹툰? 그건 아무나 하나. 난 못해요.
왜 못해. 한 번 해보는 거지! 요즘도 그림 학원 다니시나?
네. 계속 배우고 있지.
딸. 엄마가 돈이 없어서. 딸내미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고 싶어 하는 거 알았는데. 엄마랑 아빠가 돈이 없어서. 못해줘서 미안해.
아이고. 됐어요. 무슨…. 내가 벌어서 내가 배워도 충분해요. 뭘.
우리 딸이 어렸을 때부터 배웠으면 좋았을 텐데. 엄마는 그게 미안해.
됐거든요.
그래도 딸이 지금 하고 싶은 거 하니까. 엄마는 그것도 대단하다고 생각해.
맨날 대학 나와서 제대로 된 일 안 한다고 구박하더니 웬일이래.
그치. 너는 다른 사람들 신경 안 쓰고 너밖에 모르지. 엄마는 평생 남들만 신경 쓰다가 하고 싶은 걸 못하고 살았어. 그래서 딸이 부럽고 그래.
뭐야. 화법이 왜 이래. 칭찬이여, 욕이여. 엄마가 하고 싶은 건 뭐였는데요?
엄마는~ 운동이 하고 싶었지. 엄마가 중학생 때 정구 선수였는데. 알다시피 그때 삼촌이랑 할머니는 맨날 술만 마시고,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고. 그래서 엄마가 운동을 계속 하고 싶었는데. 고등학교를 못 갔어. 처음 듣는 얘기지?
……
그래서 딸이 엄마 닮아서 운동도 잘 하고, 아빠 닮아서 그림도 잘 그리는 거야. 아무튼, 엄마는 우리 조재 보면서 대리만족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어. 그니까 딸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아.
내 걱정은 마시고. 그래서 요즘 운동도 다니고, 그림도 배우잖어.
그래. 연락 좀 자주하고. 람이(동생)는 오늘도 연락해서 엄마 어떻게 지내냐고 안부 묻던데. 너는 엄마 걱정도 안 되냐. 엄마는 세상에서 람이가 제일 좋아. 두 번째는~ 우리 딸.
언제는 내가 첫 번째라더니.
너는 엄마 생각 하나도 안 하잖아. 엄마는 늘 우리 아들이 최고야.
굳이 그 말을 왜 나한테 하실까.
엄마 생각 좀 많이 하라고.
알겠어요. 몸도 안 좋다면서 얼른 쉬세요.
그래 조재야. 엄마 이야기를 써.
엄마 욕 써야겠다!
가시내가! 알았어. 딸 잘 자요.
네. 엄마도요. 푹 쉬세요.
▶ 이해할 수 있을까, 이해해야 할까. ⓒ일다 (머리 짧은 여자, 조재)
엄마와 나, 서로 애증의 관계다. 한때는 밤늦게 걸려오는 전화는 절대 받지 않았다. 분명 술에 이만큼 취해 울고불고 할게 뻔하다. 십년 넘게 겪은 일이라 핸드폰에 ‘엄마’ 두 글자만 떠도 스트레스를 받았다. 내 생애 최우선 과제는 엄마와의 분리라고 생각했다.
그랬던 엄마는 최근 한동안 술을 마시지 않았고, 마음에 여유가 생긴 것 같았다. 엄마가 변했기 때문인지, 내가 변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도 모르겠지만. 요즘은 엄마라는 사람을 조금씩 들여다 볼 수 있게 됐다. 여전히 나는 엄마에게 퉁명스럽기만 하고 친절한 딸이 아니지만. 그래도 앞으로 남은 평생, 지난날보다 조금씩 더 엄마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문화감성 충전 > 조재의 머리 짧은 여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떤 공동체 (0) | 2018.04.03 |
---|---|
미투(MeToo) 위드유(WithYou) (0) | 2018.03.22 |
젠더가 어쨌다고? (0) | 2018.02.22 |
고작 밥 짓기, 무려 밥 짓기 (0) | 2018.01.23 |
‘완성형’이 아닌 ‘과정형’으로 살아갈 뿐 (0) | 2018.01.10 |
애인을 애인이라 부르지 못하고… (0) | 2017.12.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