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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퀴어이고 여기 있다. 익숙해져라”

2018 평창올림픽에서 프라이드하우스의 활동을 따라가며



설 연휴였던 2월 17일 토요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의 한 까페, 연휴인데도 이른 시간인 오전 11시부터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까페 안은 ‘프라이드하우스’라는 말과 함께 무지개 플래그로 꾸며져 있었다. 커다란 스크린에는 평창올림픽 남자 피겨스케이팅 싱글 경기가 중계 중이고, 그 옆 커다란 테이블 위에 맛있는 빵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커피를 내리는 바리스타의 손도 바빠지고 있었다.


▶ ‘프라이드하우스 평창’에서 준비한 프라이드 브런치 뷰잉 파티가 시작되기 전    © 일다(박주연 기자)


‘가족과 보내는 명절연휴’에 서로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이 모인 건, 평창올림픽에 참가한 성소수자 선수들을 응원하기 위함이었다. 이 날 열린 남자 피겨스케이팅 싱글 경기에는 성소수자라고 커밍아웃을 한 미국의 아담 리폰(Adam Rippon)과 벨기에의 요릭 헨드릭슨(Jorik Hendrickx) 선수가 출전했다.


스무 명 남짓 참여자들이 경기를 감상하기 시작했고, ‘피겨 덕후’라고 자칭한 한 남성이 마이크를 잡고 해설을 했다. 참여자들은 아담 리폰 선수가 등장했을 때는 무지개 깃발을 흔들었고, 점프를 하며 아름다운 라인을 뽐낼 때마다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해설에서는 ‘요즘 선수들이 높은 점수를 위해 기술 점수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는데 아담 리폰은 섬세한 연기를 펼친다’는 말이 나오고 있었다. 


이렇게 성소수자와 앨라이(ALLY, 협력자)가 함께 모여 성소수자 선수의 경기를 관람하는 뷰잉파티(Viewing Party)를 기획한 곳은 아시아 최초로 ‘프라이드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는 ‘프라이드하우스 평창’이다.


▶ 뷰잉 파티 현장에는 이번 올림픽에 캐나다 아이스하키 선수로 참여한 벤 스크리벤스가 프라이드하우스를 지지하는 뜻으로 기증한 하키스틱도 전시됐다.     © 일다(박주연 기자) 


아시아 최초로 프라이드하우스가 열리기까지


프라이드하우스(Pride House)는 LGBTIQ+(성소수자) 선수와 코치, 관람객과 참여자들이 올림픽을 비롯한 큰 국제경기 기간 동안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응원하는 공간이다. 2010년 벤쿠버+휘슬러 올림픽과 패럴림픽부터 시작되었다. (관련 기사: 성소수자들이 평창 동계올림픽을 즐기는 방법)


이후 프라이드하우스는 2012년 유로컵, 런던올림픽 그리고 2014년 소치올림픽, 2014년 FIFA 남자월드컵, 2015년 FIFA 여자월드컵, 2016년 리우올림픽 등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다. 특히 2014년 소치올림픽 때는 러시아의 동성애자 탄압 정책으로 인해 프라이드하우스를 운영할 수 없게 되자, 그에 대응하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원격 프라이드하우스’를 열었고 러시아의 반인권적인 규제를 규탄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프라이드하우스의 운동은 성정체성과 성적지향에 상관없이 모두가 스포츠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논의를 끌어냈다. 또한 선수들이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경기에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데도 일조했다. 그런 영향으로 2012년 런던올림픽에 참여한 선수 중 커밍아웃을 한 선수는 23명, 2016년 리우올림픽에선 56명, 동계올림픽으론 2014년 소치 올림픽에서 7명, 그리고 현재 평창올림픽에선 15명으로 그 숫자도 점점 증가하고 있다. 


‘프라이드하우스’ 운동을 이끌고 있는 ‘프라이드하우스 인터내셔널’(PHI)은 경기가 열리는 국가 및 지역의 성소수자 단체들과 협업하여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번 ‘프라이드하우스 평창’은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가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평창올림픽 시작 전까지 프라이드하우스 ‘공간’은 마련되지 못했다.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양은오 대표는 “역대 프라이드하우스를 보면 정부와 시민사회의 지원 등이 있었지만 한국에서는 인지도가 낮았고, 평창올림픽조직위원회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지원은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아무런 지원이 없기 때문에 올림픽 기간 동안 공간 대여의 비싼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 ‘프라이드하우스 평창’에서 발표한 성소수자 미디어 가이드 라인 중 일부

 

열악한 상황에서도 ‘프라이드하우스 평창’은 올림픽 기간 동안 ‘스포츠와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를 표면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스포츠 보도용 성소수자 미디어 가이드라인’을 발표해 언론에 배포한 것도 그중 하나다. 올림픽이 시작되던 9일(금), 프라이드하우스 평창과 정의당 성소수자위원회(위원장 권순부)는 강릉 아레나 주변에 ‘평창동계올림픽에 오신 성소수자 여러분을 환영합니다’(Welcome all LGBTQIA+ people who came to PyeongChang Winter Olympics) 문구를 담은 현수막을 걸기도 했다.


12일(월)에는 ‘프라이드하우스 인터내셔널’과 캐나다 올림픽위원회의 협조로, 저녁 7시 30분에 강릉에 위치한 캐나다 올림픽하우스에서 환영 리셉션도 열렸다. 17일(토)에는 앞서 소개한 뷰잉 파티가 열렸고, 21일(수)에는 강릉 캐나다 올림픽하우스에서 커밍아웃한 성소수자인 캐나다의 에릭 레드포드 선수와 미국의 거스 켄워디 선수와 만남의 자리도 마련됐다.


스포츠 선수들의 용기 있는 커밍아웃


<Outsports>의 보도(2018 Olympics will have a record 15 out LGBTQ athletes)에 따르면, 평창올림픽에 참가한 성소수자 선수는 15명으로 이중 여성이 11명, 남성이 4명이다. 2014년 소치올림픽 때는 7명의 선수 모두 여성이었다. 출신 국가는 북미권과 유럽이 대다수이고 종목은 아이스하키부터 피겨스케이팅까지 다양하다.


▶ 2018 평창올림픽에 참가한 성소수자 선수들 (Outsports가 보도한 명단)

 

평창올림픽에서 캐나다의 에릭 래드포드가 (커밍아웃한) 게이 선수 최초로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했고, 미국의 아담 리폰도 동메달을 땄다. 미국의 거스 켄워디 선수는 경기가 끝나고 파트너와 키스하는 장면이 미국 NBC 방송에 생중계되면서 전 세계의 관심을 받았다. 그는 이후에 SNS를 통해 ‘그 장면이 찍히고 있는지 몰랐지만 방송이 되어서 너무 기뻐요. 제가 어렸을 땐 올림픽 중계 중에 게이가 키스 하는 장면을 감히 볼 수 있을 거라는 상상도 못했었죠. 하지만 이제 아이들도 집에서 볼 수 있어요! 사랑은 사랑이에요’ 라고 의견을 밝혔다. 그는 또한 올림픽 개막식이 열리던 9일(금) SNS에 “우린 퀴어이고 여기 있다. 익숙해져라.” (We’re here, we’re queer. Get used to it)라는 메시지를 올리기도 했다.


주목해야 할 선수들은 이뿐만이 아니다. 네덜란드의 스피드 스케이트 선수인 이레인 뷔스트는 커밍아웃한 바이섹슈얼(양성애자)로, 이번 평창에서 1,500m 금메달, 3,000m 은메달을 획득했다. 그는 올림픽 역사상 네 번째로 올림픽 메달을 많이 획득한 선수로 현재 10개의 올림픽 메달을 가지고 있다. 네덜란드에서 가장 많은 올림픽 메달을 가지고 있으며, 세계 스피드 스케이팅 부분에서도 가장 많은 올림픽 메달을 가지고 있는 최고의 선수이다. 현재 스피드 스케이트 선수인 여성 파트너가 있는 걸로 알려져 있고, 그 사실에 대해 전혀 숨기지 않는다.


미국의 스피드 스케이트 선수인 브리트니 보는 정확한 성적지향을 언급한 적은 없지만, 소셜미디어나 인터뷰 등에서 여자친구와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 이번 평창에선 500m 5위, 1,000m 4위를 한 그는 작년 12월 일본의 고다이라 나오 선수가 기록을 깨기 전까지 1,000m 세계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다. 스피드 스케이팅 뿐만 아니라 인라인과 롤러 스케이팅으로도 월드챔피언쉽에서 메달을 다수 획득한, 타고난 운동선수다.


▶ 아담 리폰, 브리트니 보, 거스 켄워디 선수가 평창올림픽에서 함께 찍은 사진 (출처: 브리트니 보 인스타그램)

 

호주의 스노보드 선수인 벨 브록호프는 2013년 레즈비언이라고 커밍아웃했다. 그는 2014년 소치올림픽 개최 전, 러시아의 ‘동성애 선전 금지법’이 의회에서 통과되고 성소수자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자 이에 대응하는 운동이었던 ‘원칙 6조 캠페인’(Principle 6 Campaign, principle6.org)에 참여하여 지지 목소리를 낸 선수이기도 하다. 당시 러시아는 강경한 입장이었기 때문에 올림픽에 참가하는 선수들이 쉽게 의견을 낼 수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는 건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원칙 6조 캠페인: 올림픽 헌장 원칙 6조 내용을 토대로 올림픽에서 그 어떠한 차별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전함. “… 인종, 피부색, 성별, 성적지향, 언어, 종교, 정치 등의 견해 차이, 국적 또는 사회적 출신, 재산, 출생 등의 지위를 이유로 차별이 없어야 한다.”


스포츠 내 다양한 섹슈얼리티를 이야기하라


성소수자라는 정체성을 당당히 드러내고 활동하는 선수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지만, 국내에선 아직 커밍아웃한 성소수자 선수에 대한 소식을 들어본 적이 없다. 물론 그 존재가 정말 없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커밍아웃에 대해 에릭 래드포드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공식적으로 커밍아웃을 하는 보도자료를 뿌리던 날, 사실 정신이 없을 정도로 엄청 긴장했었어요. 이걸로 후원이 끊기면 어쩌나, 내가 나의 섹슈얼리티를 이야기함으로써 나한테 열렸던 문이 닫히면 어쩌나. 성공한 선수에게는 ‘마케팅’ 능력도 필요해요. 그게 사라질까봐 걱정했죠. 하지만 전 제 자신에 대해 자신이 있었고 절 지지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 때가 좋은 시기였던 것 같아요.” (21일, 강릉 캐나다 올림픽하우스에서 열린 ‘프라이드하우스’ 라운드테이블 라이브중계 중에서)


‘왜 당당하게 커밍아웃을 못하나?’라고 선수들에게 요구할 수 없는 이유는, 선수들이 용기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이 사회가 그것을 용기로 받아들여줄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교육방송 EBS가 보수기독교 세력의 반발에 못 이겨 성소수자 패널을 하차시키고, 도민들의 인권보호를 담은 충남인권조례 ‘폐지’가 가결되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말이다. 누군가에게 용기를 내라고 하기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커밍아웃이 선수들의 앞날에 문제가 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일이다.


근데 잠시만, 스포츠를 하는데 성정체성이나 성적지향이 무슨 상관이냐? 생각할 수도 있다. 운동만 하면 되는데 굳이 밝힐 필요가 없지 않냐고. 아담 리폰은 2014년 소치올림픽 땐 국가대표로 선발되지 못했다. 하지만 소치올림픽 때 러시아의 ‘동성애 선전 금지법’을 둘러싼 움직임을 지켜본 후, 공식적인 커밍아웃을 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2015년 <스케이팅 매거진>을 통해 커밍아웃을 한 후, 그는 트레이너를 바꾸고 스타일을 싹 바꿨다. 그동안 하지 못했지만 정말 자신이 하고 싶었던 방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몇 달 뒤인 2016년 미국 국가 챔피언 대회에서 그는 처음으로 우승했다. 이후 다른 대회에서도 메달을 획득했고 2018년 평창으로 가는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었다.(워싱턴포스트 2월 5일자 Figure skater Adam Rippon on coming out: ‘I felt myself owning who I was’ 기사 참조)


운동은 그냥 운동만이 아니라 선수들의 삶이고, 자신의 일부이며,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섹슈얼리티와 운동이 상관이 없다고 얘기하는 건 ‘스포츠 = 강한 남성’이라는 성역할 프레임을 고정시키고 다양성을 배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스포츠에는 국가를 초월한 아름다운 경쟁과 우정이 있고 성별과 장애에 구애받지 않는 뛰어난 능력이 있다. 그 자리에, 자신을 표현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다양한 섹슈얼리티가 포함되지 않는다면 중요한 한 부분을 억지로 지워버리는 게 된다. 


스포츠인과 체육인, 운동선수, 올림픽 선수, 메달리스트… 스포츠를 하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더 당당하게 표현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향상시키고 즐길 수 있도록,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스포츠를 즐길 수 있도록, 스포츠에서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대해 논의해보아야 할 때다. ‘프라이드하우스 평창’이 그 시작을 알렸다. (박주연)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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