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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책임회피하는 사회는 성폭력도 면죄부
군대와 젠더 연구자 나카무라 에리에게 듣다
올해 6월, 일본에서는 110년 만에 정기 국회에서 성범죄에 관한 형법이 개정되었다. 성범죄를 강력하게 처벌하는 방향으로 개정된 것이지만, 여전히 강간죄가 성립하는 데에 ‘폭행, 협박’ 요건을 남기고 있어 한계가 크다.
형법 개정이 논의되던 즈음, 20대의 한 여성 아나운서가 친정권 성향으로 알려진 50대 남성 언론인에 의해 취중 성폭행을 당했다고 밝혔다. 이 사건에서 성폭력을 고발한 당사자는 경찰 조사에서 인권 침해적인 질문을 받았고 용의자는 체포되지도 않는 등 공권력의 비상식적인 대응으로 인해 많은 논란이 일었다.
이러한 가운데 성범죄의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는 일본 사회의 모습을 역사적 관점에서 비판하는 목소리가 제기돼 주목할 만하다. 히토츠바시대학 특임강사 나카무라 에리 씨는 일본 사회가 성범죄를 대하는 시각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책임을 회피해온 역사와 관련이 있다고 진단한다.
나카무라 에리 씨(1982년생)는 근대 일본 군사 정신의료와 군대와 젠더를 연구해왔으며, 올해 말에 <전쟁과 트라우마-비가시화된 일본군 병사의 전쟁신경증>(가제)이라는 책을 출간할 예정에 있다. 다음은 “성폭력 피해자의 목소리를 묵살해온 전후 일본사회”를 분석한 나카무라 에리 씨의 글이다. [편집자 주]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12.28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의 여파
성폭력 피해자의 목소리가 묵살되고 가해자 다수가 면책되는 현대사회의 구조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가해국으로서 제대로 책임을 지고 있지 않은 전후 일본 사회의 모습과 근저에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1991년 한국인 前 ‘위안부’ 김학순 할머니가 스스로 목소리를 낸 이후, 시민운동과 역사연구가 생존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밝혀낸 피해 실태는, 이를 부정하는 쪽의 공격으로 역사교과서에서 삭제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대다수 학생은 대학 입학 전에는 이에 대해 전혀 배우지 못하거나, 인터넷 등에 범람하는 잘못된 정보를 접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일본 정부는 일본군의 개입과 법적 책임을 명확하게 인정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역사교육을 통해 국민이 실태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야 할 책무를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해결’을 선언한 2015년 12월 28일의 한일 양국 정부간 ‘합의’는 전혀 반대의 방향성을 갖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일본군 ‘위안부’ 연구의 1인자라 할 수 있는 요시미 요시아키 씨는 이번 ‘한일합의’는 여전히 ‘위안부’ 문제의 책임 주체가 모호하고, 재발 방지 조치에 대해서 어떤 언급도 없었다는 점에서 역사교육의 역할을 명시한 고노 담화(1993년)보다도 후퇴했다고 평합니다. (위안부 연구 ‘일 최고 권위자’ “한·일 12·28합의 백지화해야”, 한겨레 2016년 1월 8일자) 일본 정치가들의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망언’의 횟수와 피해 당사자에 대한 공격은 최근 20년 동안 점점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보면서, 저는 전시 성폭력 문제를 전후 사회의 젠더 질서와 연속선상에 놓고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통감합니다. 여기에서는 아시아·태평양 전쟁에서의 패전과 그에 이어진 미군 점령 등, 일본 남성들의 ‘남성다움’이 위기에 내몰렸던 시대에 목격된 ‘전쟁과 남성의 섹슈얼리티’에 관한 논의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상세한 내용은 역사평론 796호에 실린 필자의 원고 「전쟁과 ‘남성다움’의 위기-전쟁과 성의 도덕적·과학적 언설과 남성성의 재편성」, 2016년 8월, 31-46쪽을 참조)
일본의 패전과 남성성의 재편성
일본 패전 직후에 형성된 ‘에로틱-그로테스크 문화’(에로그로)와 ‘쭉쭉빵빵’한 여성들의 등장을 ‘도덕적 무질서’ 상태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이성애 결혼에 근거하는 부부 간의 ‘건전한’ 성을 규범화했습니다. 이 시기에 이미 전쟁 중 일본 군인에 의한 강간이나 ‘위안소’에 대해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때 문제시된 ‘성적 무질서’는 군대 경험이 있는 성인남성이 아니라 여성과 소년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도덕적 성에 대한 논의를 주도한 사람들의 다수는 심리학자나 정신의학자였는데, 시키바 류자부로도 그 중 한 명이었습니다. 시키바는 전쟁은 문명을 ‘야만적 상태’로까지 되돌리며, 인간은 목숨에 위험을 느끼면 본능적으로 쾌락을 추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 논리는 ‘본능’이라는 미명하에 많은 일본군이 저지른 전쟁범죄를 ‘어쩔 수 없었던 일’로 정당화하는 논리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심지어 시키바는 여성들에게 가해진 ‘야만’적인 남성들의 전쟁 범죄를 추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성에게 ‘상처 입은 남성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역할을 맡도록 요구합니다. 그는 군대나 전쟁터라는 ‘나쁜 성의 학교’에서 ‘교양 없고 성을 밝히는 남자들’과 ‘성병을 퍼트리는 매춘부’로부터 나쁜 영향을 받은 ‘순수하고 교양 있는 남자들’을 보호하는데 관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즉, 전쟁터의 ‘야만적인 성’이라는 낙인을 전시 성폭력의 피해자나 일부 남성에게만 국한시킴으로써, 전시와 전후 일본인 남성의 섹슈얼리티를 ‘분리’하여 남성성을 재편하려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강간, “전쟁터에서는 평범한 일”
한편 아시아·태평양 전쟁 말기부터 패전 직후에 걸쳐 도쿄에서 연속 강간살인을 저지른 고다이라 요시오 사건(1945-1946년 사이 10명의 여성을 강간, 살해한 사건)은 당시 일본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 사건은 전시와 전후의 연속성을 상징하는 사건입니다. 고다이라는 전쟁 중 군인과 군무원 신분으로 중국과 사이판에 있었는데, 그때부터 이미 강간 행위나 ‘위안소’ 출입이 일상이었습니다.
고다이라의 정신감정서에는 “원래부터 성격이 급했는데, 해군에서 돌아온 다음부터 여자 문제로 더 상태가 나빠졌다”는 친구와 친척의 증언이 있습니다. 고다이라는 일본인 여성을 상대로 한 10건의 강간살인으로 기소되었고, 그 중 7건이 유죄 판결을 받아 1949년에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 고다이라 요시오(위) 전쟁 후 장을 보러 가는 여성들(아래) 요미우리신문 1946년 9월 5일자 고다이라 사건을 언급한 사설. ‘젊은 아가씨들의 허술한 마음가짐’과 딸 교육을 제대로 못한 어머니의 ‘잘못’을 꾸짖는 논조다. ⓒ페민 제공
고다이라의 정신을 감정한 정신과 의사인 우치무라 유시는 고다이라 사건을 ‘흔치 않은 능욕 살인사건’이라고 평하고, 고다이라는 강한 ‘성 충동’을 가진 ‘성격이상자’라고 지적했습니다. 하지만 고다이라 스스로가 진술했듯, 전쟁터에서 강간살인은 절대 ‘흔치 않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고다이라가 ‘성격이상’으로 여겨져 법적 제재를 받은 것은, 전쟁터였다면 ‘정상’이고 대부분 처벌 받지 않던 행위를 전쟁 중이 아닌 시기에, 심지어 ‘위안부’나 ‘업소여성’이 아닌 일본인 여성에게 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실제로 전쟁 중 필리핀에 출정했던 작가 에사키 마사노리는 “전쟁터에서 일본군이 수도 없이 고다이라와 비슷한 행위를 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지 않을 수 없다. 고다이라 같은 요소를 가진 인간이 우리 중에 얼마든지 있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습니다.
‘남자끼리의 비밀’, 군사화된 사회를 경계하라
전시 중 강간 경험은 전후에도 오랫동안 ‘남자끼리의 비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비밀’을 폭로해버릴지도 모르는 고다이라 사건은 특수한 ‘성격이상자’에 의한 사건이 되어 사회로부터 분리되었습니다.
강간은 ‘성욕’에 기인하는 것이며 가해남성을 ‘정신이상자’라 보는 ‘신화’는 아직도 뿌리가 깊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이 지배의 주체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강간이나 남자들의 집단적인 ‘성매매 업소 출입’은 현대의 호모소셜한 관계성에서도 여전히 ‘평범한’ 광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쟁은 이러한 지배관계를 더 단단하게 만들 우려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일본의 군사화 추진이 젠더평등을 위해 정말로 좋은 선택인지를 역사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나카무라 에리)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 <일다>와 제휴 관계를 맺고 있는 일본의 여성주의 언론 <페민>에서 제공한 기사입니다. 고주영님이 번역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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