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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평등’을 반대하는 사람들

<시녀이야기>의 디스토피아가 남의 일이 아닌 이유



성평등이 아닌 양성평등을 외치는 사람들


여성가족부가 향후 5년간 성평등 정책의 근간이 될 ‘제2차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을 수립하면서 사용해 왔던 ‘성평등’ 용어를, 일부 보수개신교의 반발에 못 이겨 ‘양성평등’으로 사용하기로 했다는 내용이 지난 15일(금) 연합뉴스를 통해 보도되었다. 18일(월) 여성가족부 여성정책과 담당자와의 통화에 따르면, 기존에 사용했던 것처럼 ‘성평등’과 ‘양성평등’을 혼용하는 형태가 될 것이며, ‘제2차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 내에서 ‘성평등’ 용어가 어떻게 될 지는 아직 정확치 않다고 밝혔다. 용어 혼용이 혼란을 불러오지 않겠느냐는 물음에, ‘성평등’과 ‘양성평등’의 용어에 별 차이가 없다고 답했다.


과연 그런 것일까. 차이가 없다는데, 일부 보수적인 개신교 단체는 ‘성평등’이라는 말에 놀라울 정도로 과격하게 반대를 해오고 있다. ‘동성애 동성혼 개헌반대 교수연합’은 지난 14일(목) “여성가족부 성평등 정책 적법한가?”라는 포럼을 국회에서 개최했고, 13(수)에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여성가족부가 현재 수립하고 있는 ‘제2차 양성평등 정책 기본 계획’에 반대한다는 성명서를 냈다. 그 내용은, 여성가족부가 성평등과 양성평등을 같다고 주장하는 것은 국민을 기만하고 있는 것이며 ‘성평등’을 기반하고 있는 내용을 ‘양성평등’ 기반으로 당장 수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양성평등과 성평등의 차이를 ‘양성평등은 남성과 여성 간의 평등이지만, 성 평등은 동성애를 포함하여 다양한 성 정체성 간의 평등을 의미합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성명서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또 다른 중요한 요구 사항은 ‘출산이 급감하여 인구 절벽으로 인해 국가는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데, 여성가족부가 사회적 갈등을 조장하는 일에 앞장서지 말기를 요구합니다’ 라는 부분이다.


▶ 12월 13일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측의 성명서 중에서 요구안 부분


‘시녀이야기’가 보여주는 세상


출산과 인구 위기를 언급하며 ‘성평등’을 반대하는 종교단체들의 모습과 그것에 공공기관이 굴복하는 상황을 보고 있자니 <시녀이야기>(The handmaid's tale)가 생각날 수밖에 없다. ‘시녀이야기’는 이 시대 대표적인 페미니즘 작가로 불리는 마가렛 엣우드(Margaret Atwood)의 작품 중 하나다. 1985년 책으로 출간되었고, 1990년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으며, 올해 4월에는 디지털 플랫폼 중 하나인 ‘훌루’(Hulu)를 통해 10부작 드라마로도 공개된 유명한 작품이다.


가까운 미래가 배경인 이 이야기는, 환경오염 등으로 불임이 급격하게 늘어난 시대에 강한 ‘종교적 신념’을 가진 자들이 정권을 차지하게 된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모습을 그린다.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그 정권이 불임치료 연구에 모든 힘을 쏟을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은 하지 않더라도, 저출산 사회를 벗어나기 위해 지금보다도 더 많이 여성들에게 재생산을 압박할 것이라는 정도는 상상된다. ‘낙태죄 폐지’ 같은 건 말도 못 꺼낼 정도로.


▶‘이 미래는 끔찍한 악몽이다’ 문구가 적힌 드라마 <시녀이야기> 여성은 같은 옷을 입으며 지위에 따라 색깔이 다르다. 시녀는  혼자 외출할 수 없으며 앞이 아닌 주변을 볼 수 없는 하얀 모자를 써야 한다. ⒸHulu


하지만 그 사회는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다. 재생산 압박 정도가 아니라 여성은 모든 권리를 뺏기고 도구화된다. 그 사회에서 여성은 돈을 가질 수 없다. 모든 경제권은 남성에게만 주어진다. 공부를 하고 배울 수도 없다. 책들은 불태워지고 많은 학자들이 사형 당한다. 모든 여성들은 출산을 할 수 있는가, 없는가라는 한 가지 기준으로 구분된다.


출산을 할 수 있는 여성들은 ‘시녀’(Handmaid), 출산을 할 수 없는 낮은 계급의 여성들은 ‘마사’(Martha), 출산을 할 수 없는 높은 계급의 여성들은 ‘부인’(Wife). 부인은 집에서 남편을 보좌하는 임무를 수행하며, 마사는 집안일 등의 노동을 하고, 시녀는 집안일을 도우며 임신하고 출산을 해야 한다. 배란일이 되면 시녀는 무조건 그 집의 남편과 강제적 관계를 맺어야 하며 임신 후 출산을 하면 그 집 부부에게 아이를 넘겨야 한다. 그리고 다른 집에 배정이 되어 시녀 생활을 이어간다. 그 과정의 반복이다. 시녀는 아이를 낳는 몸뚱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길리어드’(Gilead)라는 그 끔찍한 사회는, ‘전통적 가치’(Traditional values)를 최우선으로 여기며 어떤 신을 믿는 집단이 국회를 테러하고 정권을 장악한 후 만들어졌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인공인 시녀 오프레드(Offred)가 배정된 사령관의 부인으로 나오는 세레나 조이(Serena Joy)는 길리어드를 구상한 설립자 중 한 명이다. 그녀는 여성이 있어야 할 진정한 공간은 가정이라고 설파하는 책 <여성의 장소>(A woman’s place)를 쓴 학자이자 활동가로 나온다. 그녀의 대사 중에 이런 말이 있다. “가정을 버리는 여성들이 있었고 우리는 변화가 필요했어요.”(드라마 ‘시녀이야기’ 6화 중)


자신이 믿었던 신념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그 누구보다 과격한 활동함으로써 감옥에 잡혀가기도 했던 세레나는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길리어드가 실현되려고 할 때 배제된다. 이유는 물론 그가 여성이기 때문이다. 부인의 역할 외에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리고 그가 쓴 책, <여성의 장소>는 불태워졌고 읽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이처럼 길리어드에서는 여성의 신념, 종교, 직업, 능력 그리고 성정체성, 성적 지향 따윈 아무 상관 없다. 참고로, 예상되겠지만 길리어드에서는 출산을 할 수 있는 이성애자가 아니면 죄가 된다. 여성들은 그냥 ‘여성’으로만 존재해야만 한다. ‘전통적 가치’ 아래 여성의 역할을 수행하는 ‘여성’ 말이다.


바로 이것이 지금 어떤 이들이 ‘성평등’이 아니라 ‘양성평등’을 강력히 주장하는 이유일 것이다. 세상에 남성과 여성만이 존재하며, 양성 간에는 서로 다른 각자의 역할이 있고, 그 구분이 명확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성평등’이 더욱 더 필요하다


‘양성평등’, 진정한 남녀평등이라는 말 뒤의 의도를 읽어야 한다. 정말 여성과 남성의 ‘평등’을 이루겠다는 게 아니라, 진정한 ‘여성’과 ‘남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 아닌가에 대해서 말이다. 그 진정한 여성과 남성이 무엇인지, 그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특히 이 주장을 외치는 이들이 낙태죄 폐지 반대 또한 주장하고 있다면 말이다.


‘양성평등’이나 ‘성평등’이나 어쨌든 평등한 사회로 만들어 주겠지, 라고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이것은 단어 하나의 차이가 아니다. 여전히 ‘여성’과 ‘남성’을 강조하며 이야기하는 사회에서 ‘여자는 이래야…’라는 말을 뛰어넘고 성차별을 없앨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면 꽤나 순진한 생각이 아닐까?


양성평등과 성평등 사이에는 크나큰 차이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차이는 우리가 디스토피아로 갈지 유토피아로 갈지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그 길목 앞에서, 제대로 ‘성평등’을 외칠 더 많은 목소리가 지금 절실히 필요하다. (박주연)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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