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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제에 희생된 천재 여성조각가의 고통

<영화로 읽는 페미니즘> 까미유 끌로델


※ 필자 소개: 지아(知我)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공연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영화칼럼을 비롯해 다양하고 새로운 실험으로 전방위적인 글쓰기를 하고 있습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 브루노 뒤몽 감독, 줄리엣 비노쉬 주연의 영화 <까미유 끌로델> 2013

 

지난여름 불특정 여성들을 대상으로 캡사이신 물총을 쏘고 달아난 남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오토바이를 타고, 거리를 지나가는 여성들에게 캡사이신을 넣은 소주를 물총으로 쏘고 날달걀을 던졌다. 얼마 전에는 스타킹을 신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먹물 테러’도 있었다. 스타킹을 신은 여성들만을 상대로, 한 남자가 검은색 잉크를 뿌리고 도망갔다. 놀랍게도 그들이 밝힌 범행 동기는 여성들이 놀라고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는 그저 ‘재미’였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여혐 범죄 뉴스를 자주 접하고 있다. 사실 이런 범죄가 최근 들어 갑자기 일어난 것도 아니다. 이탈리아의 여성운동가이자 철학자인 실비아 페데리치는 책 <캘리번과 마녀>에서 오래전 유럽에서 일어난 여성혐오 범죄의 잔인한 실상을 드러냈다.

 

농노제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하는 과도기에, 토지를 잃고 공장에서 일하게 된 남성노동자들이 여성을 집단강간하는 일이 빈번했다. 경제적인 조건 때문에 결혼을 미루게 된 남자들이 부자 자본가에게 느끼는 분노와 적의가 고스란히 여성들에게 향한 결과였다. 당시 권력을 지닌 사회 기득권 세력은 노동자들이 들고일어날 봉기가 두려웠다. 그래서 여성들에 대한 그들의 집단강간을 묵인했다. 피해자가 하층민 여성의 경우에는 강간이 사실상 범죄가 아닌 것으로,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버렸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여성혐오 범죄의 이면에도 경제불황 속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하는 것에 대한 남자들의 불안감이 잠재해 있다. 여기에 피해자인 여성을 오히려 가해자로 둔갑시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부장제 사회가 양육한 여성혐오 범죄자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오히려 여성에게 투사하는 방법을 사용해오고 있는 것이다.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들을 ‘꽃뱀’으로 만들어 오히려 왕따 시키고 궁지로 모는 것이 바로 대표적인 실례일 터.

 

▶ 브루노 뒤몽 감독, 줄리엣 비노쉬 주연 <까미유 끌로델> 


브루노 뒤몽 감독, 줄리엣 비노쉬 주연의 영화 <까미유 끌로델>(2013년)에서도 가부장제 사회에서 희생양이 된 한 여성을 만난다. 현대 조각의 아버지라 불리는 로댕의 제자이자 연인으로 더 잘 알려진 프랑스의 천재 조각가 까미유 끌로델. 그녀는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음에도 로댕의 그늘에 가려진 채 예술가로서 만개하지 못한 채 정신병원에서 고통스럽게 긴 여생을 보냈다.

 

영화의 배경은 1915년 프랑스 아비뇽 근처에 있는 몽드베르그 정신병원. 까미유의 뒷모습으로 시작하는 첫 장면은, 은둔을 강요당한 비운의 예술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 인상적이다. 목욕을 하기 위해 벌거벗고 욕조에 들어가는 까미유에게 간호사들이 평범한 일상처럼 늘어놓는 대사들은 또 어떤가?

 

“더러워서 씻어야 해요.”

“항상 더럽잖아요, 그럼 씻어야지요.” 

“얼마나 더러운지 손 좀 보세요!”

 

기이하게도 니의 눈에는 관처럼 보였던 일인용 작은 욕조. 그 둥근 물속에 누운 까미유의 얼굴은 울음을 마음속으로 앙다문 것처럼 먹먹하다. 친어머니에게 심한 냉대를 받으며 성장한 까미유에게 유일한 위로는 숲에 가서 흙을 가지고 노는 것이었다. 그런데 숲에서 놀다 집에 돌아가면 어린 그녀가 어머니에게 어김없이 들었던 말이 바로 간호사들의 말과 겹쳐졌던 것이다.

 

“넌 여자아이가 되어서 왜 손이 늘 흙투성이냐?”

“네가 얼마나 지저분한 지 좀 봐라!”

 

작은 두 손으로 오물조물 빚어낸 흙 조각이 아무런 예술교육도 받지 않은 어린 소녀가 만들어냈다고는 믿기 힘들 만큼 정교하고 완성도 있는 것은 눈여겨보지 않은 채, 까미유의 어머니는 딸을 미워했다. 까미유 바로 위에 아들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서 죽었다는 이유로. 거기다 그녀가 아들이 아닌 딸이라는 이유로. 아들의 죽음을 무의식적으로 딸과 연관 지어 생각했던 어머니는 까미유가 결국 정신병원에서 죽을 때까지, 그녀가 안정이 되어 병원을 나가도 좋다는 병원장의 허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30년 넘게 병원에 방치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나 역시 아들이 아니란 이유로 가족의 적지 않은 실망을 한 몸에 받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경험이 있다. 언니 위로 여러 명의 아들과 딸을 유산한 엄마는 내가 뱃속에 있을 때 딸답지 않은 힘찬 태동이 느껴졌기에 당연히 아들이라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태몽 역시 전형적인 아들 낳는 꿈이었다는 이야기도 늘 덧붙이셨다.

 

까미유처럼 미움을 받고 자라지는 않았지만, 단지 성별이 딸이라는 이유로 태어날 때 환대받지 못한 출생의 이력을 지닌 여성들은 커서도 자신의 존재에 의문과 질문을 던지게 되기 쉽다. 어쩌면 그것은 세상에 첫 발을 내딛을 때부터 무의식적인 여성혐오를 스스로 덧입고 나올 수밖에 없는 배경이 되었던 것은 아닐는지.

 

▶ 브루노 뒤몽 감독, 줄리엣 비노쉬, 장-뤼크 뱅상, 로베르 르로이 주연의 영화 <까미유 끌로델> 2013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대를 이을 아들에 의해 결정이 된다. 일본의 사회학자 우에노 지즈코는 어머니의 딸에 대한 기대가 아들과는 달리 양의성을 갖고 있다고 분석했다. 즉 어머니는 딸에게 ‘아들로서 성공하라’와 ‘ 딸(여자)로서 성공하라’는 두 가지 메시지를 딸에게 보낸다는 것이다. 두 메시지 모두 여성의 지위가 대를 이을 아들에 의해 결정되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엄마처럼 되지 말아 달라’는 자기희생의 메시지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나를 이렇게 힘들게 만든 것은 바로 너’라는, 딸을 향한 질책의 메시지도 함의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메시지를 받은 딸들은 과연 어떻게 자라날까? 하나도 버거운데, 어머니가 무의식적으로 압박하며 송달하는 메시지가 두 개나 되니, 목표에 도달하기도 전에 여성은 자책감을 가질 수밖에 없을 터. 남성중심적이며 여성혐오 문화가 팽배한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은 태어날 때부터 스스로 자기혐오를 할 수밖에 없는 여성혐오의 딜레마에 봉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남성의 여성혐오와 달리 여성들의 여성혐오는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가 아닌가?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그래서 여성혐오와의 갈등을 의미한다고, 우에노 지즈코가 주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목욕을 마치고 일어서는 까미유에게 간호사가 입혀준 하얀 옷이 마치 가부장제 사회가 수혜해준 또 다른 여성혐오의 옷처럼 보였던 것도, 그리 무리는 아니다. 여성 조각가가 전무했던 시절, 어린 시절부터 어른이 되기까지 ‘조각가는 여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까미유 끌로델은 여성이기에 변변한 예술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가 놀랍게도 천재적인 능력을 보여주자, 이번에 세상은 그녀에게 또 다른 돌을 던진다.

 

그녀의 작품을 작품 자체로 바라보고 평가하지 않고, 로댕의 연인 까미유의 작품으로만 바라보고 로댕이 조각 작업을 할 때 분명히 도와주었을 거라는 헛소문을 퍼뜨린 것이다. 실제로는 오히려 까미유 끌로델이 로뎅에게 수많은 영감을 주었고, 로댕이 그녀의 작품을 모방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요즘에도 이런 일은 얼마나 비일비재한가? 성공한 여성을 그 능력 자체로 바라보지 않는 시선 말이다. 성공한 여성 이면에 남성의 도움이 있거나, 자신의 여성성을 무기로 성공을 했을 거라는 왜곡된 시선 말이다.

 

▶ 브루노 뒤몽 감독, 줄리엣 비노쉬, 장-뤼크 뱅상, 로베르 르로이 주연의 영화 <까미유 끌로델> 2013

 

영화에서 까미유가 자신이 먹는 음식에 누군가 독약을 탔을 거라는 피해의식에 내내 시달리는 모습이 가슴 아프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었던 것은, 남성중심적인 가부장제 사회에서 삶을 착취당한 여성이 자기보호를 할 수밖에 없는 모습처럼 다가왔기 때문일 터. 그녀가 정신병원 원장과 상담하며 울분에 차서 토해내는 말들도 가부장제 사회를 향한 비명처럼 들린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기에 여기에 가두어 둔 거죠?

혼자 살아서? 고양이랑 살아서?”

“저들이 보기에 난 자기들의 죄가 낳은 눈엣가시 같은 귀신이겠죠.

평생 가둬놓아야 안심이 되는!”

 

작업실에서 강제로 끌려 나와 정신병원에 수감된 뒤 편지도, 조각도 허락되지 않았던 그녀에게 남동생 폴이 찾아왔을 때 하소연하는 까미유의 말들 역시 그러하다.

 

“로댕은 그저 내 것을 훔칠 생각만 했었어.

내가 자신보다 잘 될까 봐 나를 조종하려고 했지.”

 

로댕이 자신에게 한 행동이 한 여성 조각가의 천재성을 망쳐버린 짓이었다고, 또한 여성에 대한 착취에 다름 아니라고 까미유가 동생 폴에게 외치고 방을 나가는 장면은, 그러나 아름다웠다. 가부장제 사회가 자신에게 퍼부었던 여성혐오의 시선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소리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로 눈물이 났다. 아플 때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용기가 아닌가!

 

그녀의 외침에 세상은 눈을 감고 그녀를 여성혐오의 범주에 묶어둔 채 살아있는 미라로 만들려고 했지만, 까미유 끌로델의 외침은 세대를 거슬러, 지금 우리들에게 결국 깊은 울림을 전해주고 있지 않은가?

 

영화의 마지막, 병원 마당의 돌의자에 앉은 까미유 끌로델의 얼굴에는 빛과 그림자가 어우러진 채 드리워 있다. 쏟아지는 햇살을 음미하며 설핏 고개를 숙여 어눌하게 미소를 짓는데, 마치 모든 상처를 내려놓고 마치 자연 속 하나의 나무나 돌이 된 것만 같은, 그런 미소였다. 아프지만 자신의 상처를 직면한 사람의 얼굴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 브루노 뒤몽 감독, 줄리엣 비노쉬, 장-뤼크 뱅상, 로베르 르로이 주연의 영화 <까미유 끌로델> 2013

 

[까미유 끌로델을 더 잘 읽기 위한 영화미학]

 

영화 <까미유 끌로델>은 프랑스의 천재 조각가 까미유 끌로델이 작업실에서 강제로 끌려 나와 정신병원에 강제로 수감되어 보냈던 시절을, 3일이라는 짧은 시간 속에 담아내고 있다. 자신을 보러 병원으로 오고 있는 남동생 폴을 기다리며 정신병원을 나갈 수도 있으리라는 희망에 부풀어 올랐다가, 금세 감옥 같은 병원에 갇혀 있는 자신의 신세를 비관하는 까미유의 요동치는 감정 기복은 영화를 이끄는 동인. 병원 주위의 황량하고 고요한 자연 풍경은 까미유의 내면을 반영하고 있다. 또 병원 환자들의 절규 역시, 그녀의 마음속 절망과 고통을 대변해주고 있다.

 

특히 손은 영화 내내 등장하는 중요한 이미지다. 간호사와 함께 밖에서 산책하던 여성 환자가 ‘방에 들어가자’는 간호사의 말에 ‘싫다’고 절규를 하는데,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까미유의 눈이 머문 것은 바로 그녀의 자유롭지 못한 손이다. 양 손에 수갑을 찬 채 절규하는 한 여성 환자의 모습은 병원에서 조각 작업을 할 수 없었던 까미유의 고통스러운 내면을 그대로 투사하고 있는 것이다. 까미유가 산책하면서 손으로 흙을 찰지게 만지는 장면 또한, 작품을 만들고 싶은 갈망을 허기처럼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을 터.

 

여러 명의 여성 환자들과 여성 간호사들이 병원을 나와 산으로 산책을 가는 장면은 하나의 거대한 상징처럼 다가온다. 상복처럼 검은 옷을 입은 그녀들이 오르는 하얀 암석산의 눈부신 빛이 마치 어둠에서 빛을 찾아가는 거대한 여정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상처받고 이지러진 여성들의 연대와도 같았던 이 장면에서도 손은 중요한 이미지로 등장한다. 처음에는 별로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따라나선 까미유가 그들 중 한 여성 환자의 손을 잡게 된 것이다. ‘손잡고 갈래요?’ 라는 산책 제의에.

 

여자라는 이유로 예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을 거부당한 까미유 끌로델은 그녀의 천부적인 재능을 알아본 로댕의 제안으로 그의 조수로서 일을 하게 된다. 까미유 끌로델이 불과 열아홉 살 때의 일이다. 무려 나이 차가 20년이 넘는 로댕과 함께 작업을 하며 깊은 정신적인 교감으로 연인이 된 까미유는 로댕이 옛 연인 로즈에게 돌아가자 깊은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이후 로댕의 방해로 작품 활동을 계속할 수 없었다.

 

작품 “사쿤탈라”로 ‘프랑스 예술가 살롱전’에서 최고상을 수상하는 등 조각가로서 인정을 받았지만 여성이라는 편견과 제약, 로댕의 훼방으로 곤궁한 생활을 하며 작업실에 은둔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는 가족들에 의해 파리 근교 정신병원에 수감되었다. 1차 세계대전 후 아비뇽 근처 정신병원에 갇혀 30여 년 동안 고독한 나날을 보내다 생을 마감한다.

 

그녀가 정신병원에 들어가 죽기까지의 여정을 3일이라는 시간에 축약해 담아낸 영화는 그녀가 이 어둠의 시절에 겪었던 거센 파도와도 같았을, 감정의 파고 역시 압축된 밀도로 전해주고 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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