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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춤: Twilight of Life

<오지 않은 미래의 발견> 죽어가는 사람의 ‘존엄’


※ <노년은 아름다워: 새로운 미의 탄생>를 펴 낸 김영옥(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대표)님이 나이 듦에 관해 새로운 화두를 던지는 “오지 않은 미래의 발견” 칼럼을 연재합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1. ‘죽다’와 ‘죽어가다’의 사이 혹은 차이

 

‘죽어간다’라는 말이 가능한가. 죽음을 진행 과정으로 기술하는 말이 용인될 수 있는가. 오랜 시간 누군가의 병상을 지키며 생의 마지막 시간들을 동행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질문을 한번쯤은 해보았을 것이다. ‘죽다’와 ‘죽어간다’의 의미론적 차이를 정확하게 가려내기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카프카에게 죽어가는 것은 죽는 것이 불가능해진 사람이 처하게 된 영원한 비-구원의 상태를 의미했다. 죽을 수 있음과 제대로 살아있음을 동일한 것으로 보았던 그에게 날마다 조금씩 죽어간다는 것은 삶도 죽음도 무한정 유예된 운명을 가리켰다. 매순간이 메시야, 즉 구원이 들어설 수 있는 시간의 틈새임을 강조했던 유대교 신비주의와 맥이 닿는 관점이었다. 그러나 철저한 세속의 장면 안에서도 우리는 ‘죽다’와 ‘죽어간다’의 엄연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이 두 개의 단어는 필연적으로 삶과 죽음의 연관(가능)성을 질문하도록 촉구한다. 그리고 이 질문은 현실 속에서 무엇보다 구체적인 치료와 치유, 그리고 돌봄의 현장과 관련되어 있으며, 더 나아가 혹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영적이고 윤리 철학적이다.

 

당사자가 아니라 의료 전문가나 곁에서 돌보는 사람 혹은 제3자가 누군가를 두고 ‘죽어간다’는 말을 사용할 수 있는가. 이 말은 어떤 의미이며, 어떤 효과를 발생시키는가. 죽음의 순간이 정확히 언제일지 모른다 해도, 죽음이 이미 문지방을 넘어섰다고 짐작할 수 있을 때라면 ‘죽어간다’는 말을 입에 올려도 되는 것일까. 더 이상 무례가 아닐 수 있는가.

 

미미한 움직임조차 힘겨워진 상태에서 타인의 도움에 전적으로 의존한 채 하루하루 사위어 가는 환자/노년을 대할 때면, 나는 혹시라도 ‘죽어간다’는 동사가 떠오를까봐 긴장하곤 한다. 본능적으로 어떤 금기의 목소리를 듣는다. 죽음의 오고 감을 당사자 아닌 내가 판단의 눈으로 응시하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에서다. 초/고령 노년들의 여전한 ‘식욕’을 ‘걱정’하거나(“저렇게 음식을 좋아하시면 치우는 사람만 고생이지”라든가 “돌아가실 때 얼마나 고생하시려구…”) 노인요양원에서 드물지 않게 책임자로부터 “적당한 때 돌아가셔야 하는데… 올해도 넘기실 모양이네요… 보호자분들께 괜히 죄송한 마음이 들어서요”라는 애매모호한 말을 듣게 되면서 들기 시작한 이 경각심은 보다 복잡한 생각으로 이어지곤 했다.

 

▶ 94세 노모의 ‘마지막 날들’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Twilight of Life>(실뱅 비글라이즌, 벨기에 이스라엘, 2015)

 

94세 노모의 ‘마지막 날들’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Twilight of Life>(실뱅 비글라이즌 Sylvain Biegeleisen, 2015)를 보면서 나는 평소에 품고 있던 이런 질문 속의 ‘신비로운’ 부분들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우선 ‘죽다’와 ‘죽어간다’와 관련해 영화 속 노모의 단호한 견해를 들어보자.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고 의사가 말한 뒤로도 8개월이나 더 살고 계시다는 아들의 경탄에 노모는 “어떻게 감히 남의 날들을 셀 수 있는가”라고 응대한다. (다큐멘터리의 한국 제목을 <남아있는 나날>로 정한 건 따라서 그녀의 뜻에는 맞지 않는다. 그 특별한 삶의 시간은 영어제목인 Twilight of Life가 더 적합하게 포착하고 있다. 여기서 나는 Twilight를 어원에 입각해 두 개의 영역, 두 개의 세계를 동시에 품고 있는 빛, 즉 사이-빛tweenlight으로 이해한다.)

 

그녀의 이 말을 들으며 나는 한국의 어느 호스피스 병원과 그곳에 머무는 환자들을 기록하고 있는 다큐멘터리 <목숨>(이창재, 2014)을 보면서 내내 불편했던 마음을 떠올렸다. <목숨>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머물고 있는 사람을 기록하는 것의 어려움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영화였다. 나는 이 영화가 죽음을 앞둔 사람들에게, 또는 죽음을 앞둔 사람을 매개로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죽는 태도를(그와 더불어 건강할 때 제대로 사는 태도를) 가르치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호스피스 병원 원장이 그곳에 입원해있는 환자들을 대하는 태도에서거나 아니면 장면들을 하나의 텍스트로 구성한 감독의 입장에서 감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무리 다큐멘터리라고해도 텍스트는 구성-편집된 것이니까.

 

이것은 영화가 나쁘다거나 좋다거나 하는 이야기라기보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사람을 기록하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이야기다. 그러한 기록에는 죽음에 관한, 그리고 죽음과 삶의 관계에 관한 (감독과 편집자의) 어떤 관점이 이미 설정되어 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2. 죽음, 자아 그리고 타자

 

죽음이야말로 모든 사람을 예외 없이 평등하게 만드는 보편적 진실이다. 절대 돌이킬 수도 타협할 수도 없는, “당신 몸 내부의 섬유질까지 파고드는 죽어야 할 운명이라는 인식의 경험”(다나 J. 해러웨이 <한 장의 잎사귀처럼>, 민경숙 옮김, 43쪽)은 그만큼 가차 없는 단절과 절대적 낯섦의 직면이다. 그래서 사랑하던 사람의 죽음은 다나 해러웨이처럼 거의 40여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자기 것으로 ‘경험할’ 수 있는 상실이기도 하다. 오랜 시간 참을성 있게 가까운 이의 병상을 지키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 하나를 들라면 존재의 궁극적 비의를 향한 깨어있음이라고 말하고 싶다. 범속한 삶 속에서 어제에 이어 오늘과 내일의 안전과 안녕을 추구하는 것은 그 범속한 삶의 명백한 한계 내지는 경계를 직면하는 태도에 힘입어야 방향 감각을 잃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역사가들이나 죽음 연구가들은 현대인의 삶-의식 속에서 점점 더 빠르게 지워지는 죽음의 흔적을 지적한다. (자살이나 살인이 증가하는 현상은 이러한 사실의 반증이 아니라 또 다른 증거다.) 이것은 질병이나 장애를 극복의 대상이나 결핍, 실패, 불완전성 등으로 보는 근대식 의료체계의 왜곡된 시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소비문화의 유행 속에서 부정되는 지속성이나 영원성의 시간감각과도 맞물린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한가운데에는 불안하고 소외된 개인의 자아의식이 있다.

 

아날 학파의 역사학자 필립 아리에스에 따르면 죽음을 대하는 태도와 개인의 자아의식 사이에는 서로 상관관계가 있다. 자명해 보이는 이 사실을 역사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그는 문학, 종교적 전례, 유언장, 묘비명, 도상 등을 중심으로 거의 천 년에 가까운 광활한 세월을 탐색한다. 탐색의 결과는 길들여진 죽음, 자신의 죽음, 먼 죽음과 가까운 죽음, 타인의 죽음, 역전된 죽음 등 5가지 죽음모델이다.(필립 아리에스, <죽음의 역사>) 이 죽음 모델들은 자아의식, 야생적 자연에 대항하기 위한 사회적 방어 시스템, 내세에 대한 믿음, 그리고 악의 존재에 대한 믿음 등 4가지 요소의 변주에 따라 구성된다.

 

11세기에서 시작해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역사가 진행되면서 공동체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았던 개인은 자율적 개체로 독립해나간다. 이 분화과정의 핵심이 ‘자기’ 의식이고 이것은 물론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에도 반영된다. 구성원들이 의례를 통해 함께 자연의 폭력적 힘으로부터 죽음을 빼내 죽음을 길들이고 죽음과 친해짐으로써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길들여진 죽음’이 있는가 하면, 단독자로서의 자기의식에 기반을 두는 ‘자신의 죽음’이 있다. 감수성의 변화와 함께 적나라한 죽음의 목격이 불러일으키는 감정도 변한다. 두려움의 대상이 된 죽음은 점점 더 먼 야생 쪽으로 밀려나게 되고 그럼으로써 동시에 매혹의 대상이 된다. ‘먼 죽음과 가까운 죽음’의 공존이 가능한 이유다.

 

보다 심미적인, 비장함을 포함한 여러 감정이 풍요롭게 표현되는 죽음 의례가 형성된 것은 자기의식이 ‘특별한 타자’를 발견하면서부터다. 19세기에 낭만주의와 함께 출현한 ‘사생활’은 특별한 타자와의 의미심장한 관계 속에서 온전한 자기가 되는 개인을 찬양했다. 이러한 관계에서 죽음의 순간은 특별한 타자와의 육체적 이별을 의미했으나, 남아있는 사람이 느끼는 비통함은 죽음 자체가 비장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변용하는 과정의 일부로 통합되었다. 천상의 세계는 지상의 감정들이 완벽하게 정제된 상태로 복원되어 영원성을 확보하는 곳, 그 복원된 감정으로 특별한 타자와 재회하는 곳이라고 상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현대로 오면서 사랑과 연애가 정체성과 자아감의 핵심이 되면 될수록, 자본주의 시장사회에서 사랑과 연애는 철저하게 계급과 연동된 상품소비문화에 포섭된다. ‘특별한 타자’와의 관계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기든스는 (열정적 사랑도 아니고 낭만적 사랑도 아닌) 서로 상대방에게 자신을 열어 보임으로써 유대관계를 조형하는 합류적 사랑을 언급했지만, 사랑과 연애의 상업화는 이마저도 원천봉쇄하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서로 특별한 타자가 되어주는 관계는 점점 더 어렵고 힘든 과제가 되고 있다.(에바 일루즈, <사랑은 왜 아픈가>)

 

여기에다 죽음 또한 질병의 비정상적 추함과 함께 더 이상 친숙함도 매혹도 없는 채 두려움과 수치심의 대상이 되면서(김열규, <메멘토 모리>) 특별한 타자와의 육체적 이별의 의미라든가, 그 이별의 장면을 고양시키는 내밀함이나 친밀함, 비장감 등의 정동도 같이 사라지고 있다. 이것을 아리에스는 ‘역전된 죽음’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죽음은 더 이상 죽어가는 사람의 것이 아니다. 신이나 산 사람들과의 마지막 교류가 죽어가는 사람의 가장 큰 특권이었던 시기는 지나갔다.

 

다른 이의 죽음에 연루되었다고 느꼈던 그래서 애도 행위를 존중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여겼던 예전의 공동체와 달리, 이제 죽음 앞에서 수치심을 갖게 된 사회는 죽음과 애도행위를 금기시하고 마치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듯이 행동한다. 질병이나 통증, 이별의 고통은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에 실패했을 경우 막지 못한 추문으로 전락한다.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들이나 미수습자들의 유가족과 친지에게 향해지던 ‘이제 그만하라’는 은근한 압박은 많은 이들을 분노케 했지만, 더 많은 이들에게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현대 사회는 분명 아리에스가 명명한 ‘역전된 죽음’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죽음을 은폐시키거나 인간화하는 데 반대하고, 절대적 낯섦 자체로서 직면하고 보존하려는 작은 움직임도 일고 있다. 이제 더 많은 사람들이 각종 보조 장치에 의한 생명연장을 거부하거나, 치료의 전망이 없는 상태에서 고통스런 의료적 시도를 계속하기보다는 호스피스병원에 머물면서 살아온 삶과 화해하고 다가올 죽음과도 평온하게 만나겠다는 의지를 밝힌다. ‘좋은 죽음’에 대한 소망과 함께 죽음을 삶에, 혹은 삶을 죽음에 통합시키려는 이론적·실천적 노력들도 점차 확산되는 추세다.

 

의료기술 ‘덕분에’ 이제 대략 십여 년 정도는 질병과 기능저하 또는 장애, 고통을 견디며 살아야 하는 또 다른 운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늘어난 생존 시간 속에서 가까웠던 동년배 친구들이 하나 둘 사라지는 슬픔도 감내해야 한다. 또한 삶의 환경이 척박해지면서 혈연 혹은 유사 가족과의 관계가 서서히 끊어지는 일도 이젠 드물지 않다. 인생의 마지막 시간들을 홀로 살다가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 일은 본래도 그러하지만 지금은 더더군다나 사적 불행으로 간주될 수 없는 공적 의제가 되고 있다.

 

길이 꺾이는 지점/시점인데 이 길이 어느 방향으로 꺾일지 알 수 없다. 죽음, 자아, 타자가 어떤 방식으로 만나게 될지, 이제 과연 누가 ‘특별한 타자’일 것인지, 특별한 타자와의 관계성은 어떤 모습일지, 삶과 죽음의 시간성에 관해서 목하 생성 중인 사유와 감각이 있는지, 있다면 어떤 건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말할 수 있는 것은, ‘특별한 타자’가 흔히 일상어에서 사용되듯이 성적 긴장을 품고 있는 ‘연인’을 넘어서 다양한 동반자나 반려로 확장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반려동물은 특별한 타자다.

 

새로 생성 중인 변화의 단초들 속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지대에 있는 사람들을 기록하는 작업이 늘고 있다. ‘죽어가는’ 사람들의 말, 느낌, 행동, 표정에 관심을 기울이고 표현하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다. 고독한 죽음 이전에 고독한 삶이 있다는 사실을(우에노 치즈코, <누구나 혼자인 시대의 죽음>) 정치경제적으로, 사회문화적으로 올바르게 환기시키기보다는 비윤리적인 관음증으로 미끄러질 수 있고, 그로써 산 사람들의 무례한 침범이나 오만한 자기위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와 같은 기록들은 삶과 죽음, 그리고 죽어감에 대한 지각과 성찰을 회복시키고, ‘잘 늙어가기’의 길라잡이가 되어주기도 한다. 특별한 타자에서 ‘특별함’이란 무엇일까에 대한 질문 또한 다른 각도에서 하라고 촉구하기도 한다.

 

3. 그러나 죽음과 ‘죽어가는’ 사람이 소외된다면

 

<목숨>은 호스피스에 머무는 말기 암환자들의 마지막 날들을 기록하고 있다. 호스피스에 들어왔다고 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삶에 대한 안타까움을 다 내려놓을 수는 없다. ‘바깥 병원’에서 기계적으로 알려준, 선택할 수 있는 몇몇 치료들이 계속해서 환자의 뇌리 속을 맴돈다. 산업이 되어버린 의료 체계는 진단 후 있을 수 있는 모든 상황을 일종의 자율적 선택지인 것처럼 (거의 상품 수준으로) 제공한다. ‘치료’라는 이름으로 제공된 정보는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 환자들에게 계속 달라붙는다. 특히 사십대 가장 박수명의 경우처럼 가족이 이별을 못 견뎌할 때, ‘식물인간으로라도 좋으니 살아만 있어 달라, 하루라도 좋으니 더 곁에 있어 달라’고 눈물로 호소할 때, 그 눈물에서 새로 싹트는 어떤 사랑의 진정성을 보게 될 때, 환자는 죽음의 수용 단계로 ‘나아가기’ 힘들다. 이런 ‘지체’를 환자에게 일깨우는 것은 과연 바람직한가? 바람직하다면 과연 어떤 방식으로 일깨워야 할 것인가?

 

▶ 호스피스 병원과 환자들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목숨>(이창재, 2014) 중 한 장면

 

“걸어 다녀야 살아있는 거지”라고 말하며, 걷기 힘든 몸으로 굳이 바깥에 나가 ‘짜장면’을 사먹는 박진우 할아버지의 ‘일탈’과 그로 인해 얼굴에 남은 상처는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선처럼 느껴진다. 이제 ‘방에 머물며’ 살아온 삶을 정리해야 할 시간 아니겠냐는 호스피스병원 원장의 말은 그래서 더욱 수행적 힘을 발휘한다. 호스피스병원에서도 여전히 수학 선생님 이력을 자랑하던 장난기 많고 유쾌한 환자였던 박진우 할아버지는, 긴 시간 방에서 나오지 않고 자신과 씨름하다가 결국 ‘죽음을 수용’하는 환자가 된다. 그의 죽음의 침상에서 죽음의 실체를 목도하고 두려움에 흔들리는 남은 환자들이 있다. (다큐멘터리를 보는 관객인 나는,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이 ‘남은’ 환자들을 ‘아직 죽지 않은’ 환자들로 지각하게 된다. 2시간짜리 다큐멘터리는 등장인물, 즉 환자들 모두가 죽음으로써 끝나기 때문이다.)

 

장난기 많은 유쾌한 환자에서 명백히 ‘죽어가는’ 환자로 넘어가는 경계선에 짜장면을 향한 욕망이 있다. ‘안전한’ 삶의 지대에 있는 관객은 ‘짜장면’ 너머의 시공간으로 그와 함께 가지 못한다. 그곳은 그 혼자만이 가야하는 곳이다. 영화는 이 사실을 무겁게 각인시킨다. 물론 모든 사람은 혼자서 죽는다. 누구도 죽음에 동행할 수는 없다. 그러나 죽음은 누군가의 곁에서의 죽음이기도 하다. 지금은 이것 역시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없는 특별한 ‘행운’이 되어가고 있지만, ‘누군가의 곁’에서 죽는다는 것은 현실에서의 가능성 여부를 떠나 ‘혼자 죽음’을 이해하기 위한 의미론적·실존적 대상이 되어야 한다. 죽는 순간 혼자였어도 마찬가지며, 그 누군가가 누구인가 또한 부차적이다.

 

“사는 게 좋은 걸 잊은 당신에게 권합니다.” 영화 홍보가 암시하듯이, 영화는 죽음이 당신을 찾기 전에 살아있음이 줄 수 있는 기쁨과 행복을 충분히 누리라는 교훈으로 마무리된다. 죽음을 삶의 결여로 보는 이러한 시각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사람의 그 마지막 시간을 기록하는 행위의 타당성을 질문하게 만든다. 이러한 기록이 치료에 관한 의료과학의 집착과 권위 곁에서, ‘살고 있는 사람’ 뿐 아니라 ‘죽어가는’ 사람 모두를 일종의 ‘계몽’이 필요한 미완의 존재로 보이게 한다면 한숨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의료인도, 돌보는 사람도, 멀리서 바라보는 수많은 제3자들도, ‘몸으로 살다 몸으로 죽는다’는 사실을 물리적으로 지각하고, 다면적으로 성찰·각성하기를 원했을 영화는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 모든 이들에게 ‘연결된 연루자’의 자리를 마련해주지는 못했다. <목숨>에서 이제까지 살아온 삶을 고요하고 평화롭게 ‘정리’하는 초탈한 환자의 모습은 드물다. 같이 막걸리를 마시며 웃고, 마술쇼를 하며 박수를 치던, 과자를 나눠 먹고 복도를 거닐었던 환자가 죽었을 때, 아직 삶에 머물고 있는 환자가 그에게 하는 작별인사는 평온하기 힘들다. 이것이 문제인가, 그렇다면 누구에게 문제인가. 또는 ‘어떤’ 문제인가.

 

영화가 끝날 때쯤이면 이런저런 모습으로 관객들에게도 익숙해진 얼굴들이 (한 사람만 빼고) 모두 ‘죽은 이들’이 된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자면 영화를 보고 난 후의 내 느낌은 ‘이런저런 모습으로 관객들에게도 익숙해진 얼굴들이 (한 사람만 빼고) 모두 죽은 이들이 되자 영화가 끝났다’는 것이었다. 마치 무대 위에서 모든 사람이 사라지고 나면 커튼이 내려지고 불이 꺼지는 것처럼. 앞에서도 말했듯이 95분이라는 제한된 시간 안에 등장인물 모두의 죽음을 담는 방식으로 편집·구성된 이 다큐멘터리의 재현이 나는 불편했다. ‘죽어가며 살았던, 살면서 죽어갔던’ 삶의 시간, 그 시간의 물질성이 사려 깊게 존중되지 못했고, 그로써 그들의 (그리고 이 다큐를 보는 ‘우리’의) 삶-죽음의 존엄도 훼손되었다고 느꼈다. 삶과 죽음의 서로 소외와 서로 대상화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느낌이었다.

 

“어떻게 감히 남의 날들을 셀 수 있는가.” 나의 느낌은 위에서 소개한 <Twilight of Life>의 노모가 한 이 질문과 같은 윤리적 태도에 뿌리내리고 있다. 죽음을 향한 ‘나’의 기다림은 ‘내’ 살아온 생의 리듬 안에 포함되어 있지만, ‘당신네들’이 내 남은 날들을 셀 때 그것은 내 생의 리듬이 ‘이미 멈추었다’고 선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셈법의 어긋남은 우리가 살게 된 소위 100세 시대에 죽음이 처한 곤경의 한 모습이기도 하다.

 

4. 선물: ‘불확실하고 신비로운’ 시간이 주는 지혜


▶ 다큐멘터리 <Twilight of Life>(실뱅 비글라이즌, 2015) 포스터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고 의사가 말한다. 감독은 이 마지막 시간을 노모와 함께 하기로 결심한다. ‘불확실하고 신비로운’ 이 시간을 카메라로 동행하겠다는 아들에게 그녀는 거의 호탕하게 말한다. “나는 미래를 구상하고 있지,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아들은 묻는다. “죽음에 관해서요?” 그녀는 대답한다. “죽음이 아니라 삶에 관해서. 죽음이라면 TV에서 보지 않니.”

 

시작부터 영화 <Twilight of Life>는 의미심장하고 유머러스하다. ‘삶’의 마지막 시간과 임박한 ‘죽음’의 상관/갈등/관계를 무대 앞에 내세운다. 자신의 ‘마지막’ 날들을 기록하겠다는 아들에게 94세 노모가 쐐기를 박듯이 강조한 저 말을 좀 더 분명하게 표현하면 이런 것이리라. ‘그렇다면 그건 죽음이 아니라 삶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저 돼먹지 않은 TV들이 뻔뻔하게 찍어대고 전시하는 죽음이 아니라!’ 그녀의 말에서 나는 이중의 메시지를 듣는다. 죽음은 현실에서 내쫓겨 겨우 TV에서나 센세이셔널하게, 혹은 낭만화된 방식으로, 혹은 불편한 죄책감을 강요하면서 전시된다. ‘타인의 고통’을 승리감에 찬 태도로 이미지화하는 것에 대한 수잔 손탁의 경고는 죽음의 이미지화에도 해당된다. 재현 불가능성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재현(re-present) 불가능성에 응답하는 방식으로 죽음을 현현케(present) 하는 고뇌어린 시도를 만나기란 그러나 쉽지 않다.

 

다큐의 노모는 죽음의 현현과 멀어진 현대인의 삶의 습관과, 고뇌가 삭제된 죽음 전시 모두에 간단명료하게 ‘아니’라고 말한다. 그녀가 말하는 ‘과거 아닌 미래’라는 것은 살아낸 삶의 부정이나 죽음의 (정신분석이 말하는 ‘~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받아들일 수 없다’는 식의) 부인이 아니다. ‘나의 죽음’은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지금 여기에서 숨 쉬고 느끼고 행위하고 반응하는 ‘나의 삶’이라는 것이다. 다큐 내내 그녀는 유머와 에로스 에너지를 잃지 않는다. 정신이 혼미해질 때조차도 삶을 추동시키는 에로스 에너지의 반등은 멈추지 않는다.

 

<Twilight of life>에는 삶의 화두로 삼기에 딱 맞춤인 지혜가 풍부하다. 거의 모든 문장에 밑줄을 긋는 책과 같다. 장면은 장면대로 다 멈추게 하고 싶고, 어머니와 아들이 주고받는 말들은 말들대로 다 받아 적고 싶다. 편집을 통해 한편의 드라마로 탄생했으니 감독이 부르곤 하는 ‘마 셰리’(어머니)가 일관되게 이런 언어와 태도로 죽음의 문지방을 건넜으리라 짐작하긴 어렵겠지만, 장면 하나하나가 파편이 아니라 온전한 하나, 즉 일종의 단자(monade)로 존재한다. 이 단자들은 긴 시간 삶을 살아낸 ‘늙은이’의, 그것도 죽음과 대면한 채 하루하루를 사는 늙은이의 유현한 지혜의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그 세계에서는 시간의 주름들 사이사이로 경구가 된 지혜들이 조개 속 진주처럼 은은히 빛난다. 진주 몇 개만 꺼내보자.

 

-Twilight of life 속 진주 하나

 

영화 속 주인공은 두 사람이다. 사랑하는 어머니 ‘마 셰리’를 떠나보내야 하는 아들과, 아들을/이곳을 떠나야 하는 어머니. 두 사람은 아리에스가 ‘길들어진 죽음’에서 설명한 바대로, 떠나는/죽는 사람과 떠나보내는/남는 사람으로서 각자의 역할을 잘 수행하고 싶다. 적어도 아들의 경우는 확실히 그렇다. 그러나 ‘역전된 죽음’의 시대를 살고 있는 아들에게 ‘나의 사랑’을 떠나보내는 일은 이제껏 배워본 적이 없는 일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법을 배우지 못해서 알지 못하니 답답하다”고 아들은 근심어린 얼굴로 어머니에게 털어놓는다.

 

그런데 이에 대한 어머니의 반응은 “평생 배우며 사는데, 살아왔는데… 알 것 같으면 이미 알았어야지… 뭘 새삼스럽게 새로 배우나”이다. 잘 헤어지는 ‘법’은 평생 살면서 누군가와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설렘과 웃음, 고통과 눈물 속에서 겪어낸 경험들의 총합으로 우리 몸 속 혈관을 돌고 있다고, 그러니 그냥 맞닥뜨리면 되는 거라고, 노모는 말하는 것 같다. ‘~하는 법 ~가지’ 식의 자기계발서가 끝도 없이 필요한 이 시대 자기계발 주체들의 시지포스 노력에 관한 명료한 코멘트가 아닐 수 없다. 노모가 아들에게 건네는 저 말은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그녀 자신에게도 해당된다. 그녀는 지금 이 날에 이르기까지 (담배를) 피우고 (감자를) 먹고 (언론기사를) 읽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포도주를) 마시며, 그리고 싸우며(!) 살아온 대로, 멈춤 없이 계속해서 그리하면서, 자신의 삶을 채웠던 사물들이 있는 집에서 죽음을 기다린다. 죽음을 앞두고 있으니, 라며 무언의 목소리들이 집단적으로 조언하는 화해나 내려놓음, 무심 등과는 무관한 명랑함과 놀라움, 추구와 질문이 있다.

 

▶ i24news에 보도된 다큐멘터리 <Twilight of Life>의 한 장면.  ⓒ i24news.tv

 

죽는 과정은 삶의 마지막 ‘사건’이다. 그녀/그가 살아온 삶과 그녀/그의 마지막 모습이 서로 ‘어울려야’ 한다는 것이야말로 죽음의 존엄성을 구성하는 기본개념이다.(페터 비에리, <삶의 격>) 삶이 그렇듯 죽음 또한 ‘개별적이고 유일한 개인’의 정체성 관점에서 배려되고 존중되어야 한다. 어떤 목적에 자신의 삶을 정향시켰는지, 자신이 정의한 자아이미지는 어떠한지는 죽는 과정을 선택하는데 있어 핵심 기준이 되어야 한다.(폴 칼라니티, <숨결이 바람될 때>) (인지 장애가 심해져 본인이 스스로 선택하기 어려운 경우라면 정체성에 따른 존엄의 존중은 돌보는 사람들의 몫이다.)

 

평소에 당신이 살아내는 일상에 죽음을 기다리고 맞이하는 당신의 모습이 깃들어 자리잡는다’고 다큐 속 그녀가 넌지시 전한다. 꼭 준비된 죽음이나 자연사가 아니라도 죽음은 그 죽음의 시점까지 살아온 삶 안에 이미 또렷한 형상으로 깃들어 있다. 어쩌면 당연하게 들리는 이 말은 그러나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와 카르페 디엠(현재를 즐겨라)의 동시적 사유와 지각이 없이는, 지혜연할 뿐 정작 지혜와는 거리가 먼 빈정거림이나 빈말에 지나지 않는다.

 

-Twilight of life 속 진주 둘

 

94세 이 여성은 앞에 있는 아들을 비껴가는 시선으로, 마치 무대 위에서 관객들을 향해 방백을 하듯이, “나는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는데 무엇을 기다리는지 모르겠다…. 왜 우리는 평생 무언가를 기다리며 사는 것일까. (…) 고도를 기다린다고 했지…”라고 중얼거린다. 이 질문은 ‘생 전체’라 할 수 있는 무엇을 끌어당겨 하나의 점으로 응축시킨다. 그녀의 생 뿐 아니라, 그녀의 마지막 시간을 동반하는 아들의 생과, 다큐를 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생을 불러 세우는 두 가지 질문.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왜 평생 기다리는가. 이 질문은 그녀 내면의 독백이면서 관객을 향한 전언이다. 생은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림이라는 질문으로 구성된다는 전언. 철학은 끊임없이 새롭게 열리는 질문으로 구성된다는 하이데거의 말에, ‘질문은 그런데 기다림이지’라고 늙은 노파의 지혜가 응수한다. 그녀의 질문 속에서 메멘토 모리와 카르페 디엠이 만나 하나의 변증법적 이미지로 멈춰 선다. 바로 이 질문을 하는 그녀의 얼굴 말이다.

 

영화에서 94세의 여성이 기다리는 어떤 ‘최종적인 것 the terminal’, 미지의 것, 불확실한 것은 생 전체를 관통하는 기다림의 핵심이면서 삶-죽음/죽음-삶의 은유이고 또 실제다. 어쩌면 이미 곁에 와 있지만, 아직 완전히 자기주장을 하지 않는, 그러니까 여전히 ‘도래할 것’이라고 불러야 할 ‘그 시간’을 기다리기. ‘그 시간’은 의사가 확인하고 선언할 죽음의 순간인가, 종교들이 말하는 구원이나 해탈의 순간인가, 인민들과 역사적 유물론이 목적하는 해방의 순간인가. 아니면 범속한 일상에서 맞이할 의미 충만한 행복의 순간인가. 어떤 것이든 이 ‘질문으로서의 기다림’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또한 이것을 지탱하고 있는 힘은 타나토스가 아니라 에로스다. 적어도 다큐가 증명하는 그녀의 경우는 그렇다. 그녀는 ‘고도’를 언급하고 있지만,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와는 달리 그녀의 기다림 무대에서는 누군가가 목매다는 일은 없을 것 같다.

 

5. 죽음을 앞둔 그녀/그들의 에로스

 

프로이트는 생명체의 통일성과 관련해 에로스와 타나토스라는 두 개의 에너지 욕동(Trieb)을 공식화했다. 그에 따르면 타나토스는 덜 분화되고 덜 조직화된 이전 상태로 회귀하려는, 최후에는 에너지의 수준 차이가 없는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욕동으로서 열반(nirvana)의 원칙이기도 하다. 우리는 잠을 자고 싶고 (그래서 자고), 때론 잠에서 영원히 깨어나고 싶지 않으며, 혹은 긴장이 완전히 평정의 상태(열반)에 들고 싶다. 마지막으로 언급한 것의 실천은 자살일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근본적으로 통일성의 파괴나 해체를 향하는 타나토스의 욕동이다.

 

반면에 에로스는 존재하는 생명체의 통일성을 유지하고, 더 나아가 보다 포괄적인 통일성을 구성하려 한다. 자기보존 욕동이나 자기애적 리비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적 욕동과 연관되는 에로스는 보다 분화되고 보다 조직화된 형태, 보다 큰 통일을 이루어 존재를 유지하려 한다. 그는 에로스의 모든 에너지를 리비도로 부를 것을 제안한다.(프로이트, <정신분석학 개요>)

 

▶ 다큐멘터리 <아흔 살 소녀 블랑슈>(발레리아 브루니 테데스키, 얀 코리디안, 프랑스, 2016)의 한 장면.

 

우리는 매우 늙은 사람, 거동이 거의 불가능한 사람, 크고 작은 질병으로 아픈 몸을 살고 있는 사람, 특히 명백히 죽음을 앞두고 있는 사람에게서 에로스보다 타나토스의 욕동을 더 빈번히 보곤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분법적으로 이미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는 상투적 이미지에 따른 결과일 확률이 높다. 통증이 심한 사람이나 ‘죽을 날을 받아 놓은 사람’에게 에로스란 가능하지도 어울리지도 않는다고, 깊게 생각하거나 관찰할 필요도 없다고 간주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Twilight of Life>나 또 다른 다큐 <아흔 살 소녀 블랑슈>(A Young Girl in Her Nineties, 발레리아 브뤼니 테데스키 & 얀 코리디앙, 2016)의 주인공들은 죽을 날을 받아 놓았어도, 아흔 살에 인지장애가 있어도 높은 에로스 지수를 유지할 수 있음을 또렷이 보여준다. 이 ‘할매들’은 감성적으로 지각하며 적극적으로 표현하고(Twilight of Life), 또한 새로 다가온 관계에 몰입하며 사랑에 빠진다(아흔 살 소녀 블랑슈). 두 영화 모두 에로스는 리듬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아니 리듬임을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리듬의 두 요소, 즉 노래와 춤이야말로 부분과 부분을, 사람과 사람을, 사람과 사물을 연결시키는 활기임을 노년은 그 어떤 다른 연령대보다 더 분명하게 확인시킨다.

 

무기력이나 전면적인 비활성의 상태에 빠진 인지장애 노년조차도 노래의 리듬에 힘입어, 리듬을 타고 생기와 활기를, 더 나아가 사라진 기억을 되찾을 때(<그 노래를 기억하세요?> Alive Inside, 마이클 로사토-베넷, 2014) 우리의 인간 이해는 서너 뼘 확장된다. 인지증이 심해져 깊고 어두운 침묵에, 우물 같고 갱 같은, 미로가 아닌 미궁에 갇혀 있는 사람의 세포에도 여전히 리듬이 ‘기다리고’ 있다. 리듬은 에로스의 중추다. 리듬에 따라 분절되어 파편으로 흩어져 있던 삶의 각 요소들이 ‘하나의 기억’으로 모아지고(마치 뼈들이 서로를 찾아 다시 하나의 형체로 맞춰지는 것처럼) 비인격, 탈정체성의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이던 그녀/그는 삶의 주인공으로 돌아온다.

 

이러한 사실은 노년을 직접 대하거나 상상할 때 노년을 이러저러하게 이해/오해하는 비-노년들에게 중요한 각성의 계기를 마련한다. 또한 제도 차원에서 (인지장애)노년들에게 어떤 의료 환경을 제공해야 하는가와 관련해 근본적인 인식의 전환을 촉구한다.

 

▶ 다큐멘터리 <그 노래를 기억하세요?>(Alive Inside, 2014, 마이클 로사토-베넷, 미국, 2014)의 한 장면.

 

이제 나의 각성을 말해보자.

 

<Twilight of Life>에서 아들은 음악을 틀어놓고 침대 위 어머니와 춤을 춘다. 어떻게? 손과 손으로. 손과 손의 듀엣. 허공에서 만나 기뻐하고 미소 지으며 품어주고 사랑한다 고맙다 전하는 두 손. 손과 손이 어우러져 추는 이 우아하고 아름다운 춤은, ‘춤이란 리듬에 따라 몸이 움직이는 것’이라는 춤의 정의를 모자람 없이 충만하게 구현할 뿐 아니라, 손과 손의 접촉 자체가 이미 춤임을, 즉 마음과 마음의 접속을 ‘따라하는’ 미메시스임을 증명한다. ‘손은 센슈얼sensual하다’는 그녀의 말에 나의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나는 허공에서 부드럽게 유영하는 노모와 아들의 손과 손에서 에로스가 생성하는 몽환적 세계를 느낀다. ‘죽음’이 아니라 ‘미래’를 구상하고 있다던, 대항해 싸우는 일을 멈추지 않을 거라던 그녀의 말은 모두 에로스 에너지를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거동이 불가능한 채 침대에 누워있던 엄마의 손을 잡고 쓰다듬고 기껏해야 내 뺨에 갖다 대곤 했을 뿐인 나는 이 손과 손의 듀엣 장면에서 크게 놀랐다. 각성의 순간이었다. 사랑은 매번 재발명이어야 한다는 랭보의 말을, 94세 죽음을 앞둔 어머니와 그녀를 어떻게 떠나보내야 할지 모르겠는 아들이 리듬에 따라 맞대고 떼며 유희하는 손과 손의 ‘감각sense’이 확인하고 있었다. 새로 태어나는 사랑의 삶 곁에서 죽음이 온유한 얼굴로 어깨를 내주고 있었다. 카르페 디엠과 메멘토 모리의 평화로운 공존이었다.

 

6. 시간의 춤은 윤무다

 

죽음은 인간이 유한한 시간을 사는 단독자임을 가장 투명하면서도 가장 날카롭게 증명하는 사건이다. 삶은 그 첫 순간부터 죽음을 품고 펼쳐지며, 죽음은 삶의 필연적 귀결이다. 그러나 삶이 누군가들과 더불어 할 수 있는 여행이라면 죽음은 홀로 감당해야 하는 사건이다. 죽음의 침상을 지켜주는 사람이 있다면, 더구나 그녀/그가 삶의 여정에서 서로 곁이 되어주며 이런저런 경험과 친밀함을 나누던 사람이라면 이 마지막 사건의 진행도 의미도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Twilight of Life>에서 우리는 노모와 아들 사이의 유대감과 친밀감, 애정의 감각이 어떻게 이 사건을 격이 있는 삶의 마지막으로 만드는지 본다. 그러나 이것이 점점 더 희귀한 은총이 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의료기술이 확장시킨 기대수명은 만성질환을 견디며 사는 시간도 그만큼 늘려놓았고, 이 시간 속에서 배우자나 가까웠던 동년배 친구들이 하나 둘 사라지는 것도 감내해야 한다. 삶의 환경이 척박해지면서 혈연 혹은 유사 가족과의 관계가 서서히 끊어지는 일도 이젠 드물지 않다. ‘누구나 혼자 살고 혼자 죽는 시대에 병원이나 요양원이 아닌 집에서 죽기’가(우에노 치즈코, <누구나 혼자인 시대의 죽음>) 생애 후반부 프로젝트가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혼자 죽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나쁜 것은 아니다. 혼자 죽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경험의 주체로서 자율과 소멸의 만남을 스스로에게 이해시킨 상태라면 혼자서라도 큰 충격 없이 죽을 수 있을 것이다. 기능저하와 고통이 견딤의 수위를 넘었다면 혼자든 누구와 함께든 원하던 종결을 환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니, 그렇기 때문에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홀로 살다가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 일은 (본래도 그러하거니와) 지금은 더더군다나 사적 행·불행으로 간주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삶과 죽음은 똑같이 안전과 존엄을 누려야하고, 그 보편성에서 ‘모두’의 일이며 정치적인 사안이다. 혼자 사는 빈곤 노년들이 ‘대학병원 시신 기증’을 선택하는 이유 중 하나가 자신이 죽은 후 발견되지 않은 채 오랜 시간 방치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라는(최현숙, “사적이고 정치적인 늙어죽음”) 사실을 단지 사적 개인의 불행한, 그래서 공적으로 사소한 일로 여기면 안 된다. 죽음 자체가 단독자의 사건이라고 해도, 지금 현실이 허용하는 죽음이 점차 홀로의 죽음 쪽으로 기운다고 해도 누군가의 진솔하고 따뜻한 배웅을 받으며 죽는 죽음의 가치나 의미까지 다 부정하거나 포기할 수는 없다. 현실과 상상의 세계 모두에서 가능의 폭을 넓히는 쪽으로 방향 조정을 하자고 제안한다.

 

▶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Antonia's Line, 마를렌 고리스, 1995)은 안토니아의 죽음에서 시작된다.

 

삶과 죽음, 생성과 소멸은 자연사와 역사에 동시적으로 귀속된다. 긴 연쇄로 이어지는 삶과 죽음, 생성과 소멸은 자연사와 역사 모두에서 시간의 춤이다. 그리고 이 춤은 단독자의 춤이 아니라 여럿이 어울려 추는 윤무다! 이 윤무가 구체적으로 어떤 리듬으로, 어떤 형상으로, 어떤 결단과 사랑과 상처와 비탄과 돌봄과 허무와 자유와 욕망을 품고 이어지는지 알고 싶은 사람은 <안토니아스 라인>을 보라고 권하고 싶다.

 

<안토니아스 라인>이 설득력 있게, 유머러스하고 당당하게, 거침도 타협도 없이 그려내고 있는 포스트가부장제, 포스트자본주의 공동체 삶에서, 자연스럽게 그리고 사회문화적으로, 탄생은 죽음을 배웅하고, 죽음은 탄생을 축복한다. 무언가를 남기지 않는 죽음은 없고, 죽음이 남긴 그 무언가를 기억하지 않는 탄생은 없다. 이 유토피아에서 시간의 윤무는 당연하게도(!) 첫 가모장 안토니아의 죽음 침상에서 시작된다. 안토니아는 그녀의 침상에 둘러선 4대 식구들 한 명 한 명에게 눈으로 작별인사를 한다. 이제 날개가 안에서부터 계속 펼쳐져 나오듯, 4대의 삶-죽음 이야기가 펼쳐진다. 역사가, 씨 뿌리고 수확하는 자연사가, 윤무의 이야기가.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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