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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이라는 ‘아픈 자리’를 탈출한 거리의 십대들

<영화로 읽는 페미니즘> 아메리칸 허니


※ 필자 소개: 지아(知我)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공연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영화칼럼을 비롯해 다양하고 새로운 실험으로 전방위적인 글쓰기를 하고 있습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 안드레아 아놀드 감독, 사샤 레인, 샤이아 라보프, 라일리 코프 주연 <아메리칸 허니>(2016, 영국 외)

 

“남자들 머리 위에서 노는 아이들이에요”

 

언젠가 택시에서 운전기사와 뜻하지 않은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그때 라디오에서는 성매매 10대 여성들에 관한 뉴스가 나왔고 택시기사는 혀를 차며 욕을 했다. 설전의 촉발점은 나의 질문이었다.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성매매를 한 성인 남자들이 잘못한 것 아닐까요?”

 

내 질문에 그는 급격히 흥분하며 손사래를 쳤다.

 

“아이고, 그 아이들이 얼마다 선수들인데, 남자들 머리 위에서 노는 아이들이에요.”

 

그는 미성년자 성매매의 잘못을 오로지 십대여성들에게 짐 지우고 싶어 했다. 그러니까 그의 표현에 의하면, 성매수를 한 남자들은 성에 일찍이 눈을 뜬-섹스를 워낙 좋아하거나 돈을 밝혀서 성매매까지 하는-십대여성들의 꼬임에 넘어간 것뿐이었다. 다분히 왜곡되고 뻔뻔한 논리였다.

 

십대여성들을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그의 태도가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여성만을 향해, 그것도 피해자인 여성에게 낙인찍기를 즐겨하는 이 사회에 대해 여성으로서 억눌린 분노가 일었다. 하지만 그 날 내가 강한 반격을 하지 못한 것은, 야심한 밤에 얼척없는 논리로 무장한 중년의 한국남자와 단둘이 소모적인 논쟁을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자신만의 비뚤어진 생각을 강하게 주장하는 남자는 밀폐된 택시라는 공간에서 위험한 존재로 비쳤던 까닭이다.

 

성매매를 하는 십대여성들을 비난하는 그의 눈빛은 여성에 대한 혐오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지금 만약 그 택시를 다시 탈 수 있다면 그 청소년들이 왜 가출을 해서 성매매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는지, 그 배경을 알고나 있냐고 반문하고 싶다.

 

▶ 안드레아 아놀드 감독, 사샤 레인, 샤이아 라보프, 라일리 코프 주연 <아메리칸 허니>(2016, 영국 외)

 

거칠 것 없어보이는, 그러나 자본에 예속된 자유

 

영화 <아메리칸 허니: 방황하는 별의 노래>(American Honey, 2016)의 주인공인 열여덟 살 스타도 가출을 한다. 엄마가 죽은 후 새아빠에게 성적 학대를 당하며 어린 두 이복동생들을 데리고 쓰레기통을 뒤져 먹을 것을 찾는 삶에서 탈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출의 기회를 그녀는 우연히 발견한다.

 

승합차로 미국 전역을 떠돌며 낮에는 잡지를 팔고 밤에는 광란의 파티를 벌이는 자기 또래의 젊은이들을 오클라호마의 마트 주차장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그 무리 중의 한 명인 제이크가 스타에게 자기 일행에 합류하라고 권하자, 그 다음 날 바로 일자리를 얻었다고 가족에게 말한 뒤 집을 나오는 스타. 그들의 삶은 비록 앵벌이와도 흡사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거칠 것 없는 자유로운 젊음으로만 보인다.

 

하지만 자존심까지 함께 패키지로 팔아야 하는 잡지 판매일은 결코 녹록지 않다. 술과 담배를 소모하며 밤마다 히피처럼 낭만적인 파티를 벌인다고는 하지만, 날마다 장시간 차로 이동하며 허름한 모텔에서 잠을 청해야 하는 생활은 부초처럼 떠다니는 떠돌이의 삶일 뿐. 잡지를 팔기 위해 낯선 집을 방문하는 일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 자신까지 팔아야 하는 일로 전락하고 만다.

 

더구나 스타는 고객에게 유사 성행위까지 하는 벼랑 끝 처지로 내몰린다. 사우스다코타의 황량한 유전 지역에 이르렀을 때 모임의 리더인 크리스털이 스타를 비롯한 여성 크루들에게만 얇은 원피스를 한 겹 입힌 채 승합차에서 내려주었을 때부터 어쩌면 예견되었던 일인지도. 한바탕 흥겨운 춤을 추며 영업 활동을 펼치는 그녀들을 바라보는 남자노동자들은 잡지보다는 그녀들의 몸에 더 관심이 많은 듯 보인다. 일이 끝나는 저녁에 만나면 잡지를 사주겠다는 한 남자 고객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러니까 스타에게는 그날 판매 할당량을 채우는 생존에 다름 아니었다.

 

우리 사회에서 십대여성들의 성매매가 확산되고 있는 주된 이유를 전문가들은 ‘사회 안전망의 부재’에서 찾고 있다. 해마다 가출하는 청소년이 대략 20만 명 정도, 그중 1/4이 성매매에 유입이 된다고 하니 심각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스타처럼 많은 경우 이들은 학대와 폭력이 일상으로 자행되는 가난한 집에서 탈출한 십대여성들이다. 당장 잘 곳조차 구할 수 없는 처지에서, 성병으로부터 안전하고 값이 싼 성매매를 원하는 남자 성구매자들이 제안하는 단 돈 몇 만 원을 받고 성매매를 시작한다는 사실이, 스타처럼 그녀들도 사회 구조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반증한다.

 

게다가 경찰 단속에 걸리면 성구매 남자들은 갈 곳 없는 가출 청소년들을 도와주었다는 파렴치한 변명을 하기 일쑤라고 한다. 미성년자 성매수 범죄를 엄중히 다루어야 할 경찰들, 대부분 남자경찰들은 십대 성매매 여성들을 피해자로 바라보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이기에 성구매 남자들이 강력하게 처벌되는 일도 드물다.

 

영화의 부제처럼 가출한 십대여성들은 ‘방황하는 별들’이다. 빛나지만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검은 하늘을 유영하는 별들처럼, 자유로움을 찾아 집을 나왔지만 세상은 안전하지도, 심지어 자유롭지도 않다. 하루치 판매량을 달성하지 못하면 한 달에 한 번 ‘루저의 밤’이란 파티에서 최하위 판매 실적을 지닌 두 사람끼리 피 터지게 싸워야 하는 자유는 철저히 자본에 예속된 그 날 그 날 소진되는 자유에 불과한 것이다.

 

잡지 판매 모임에 여성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저마다 집을 나온 사정은 다르겠지만, 스타가 속한 모임은 자유를 표방한 또 하나의 울타리가 아닌가. ‘소속감을 주지만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이율배반적인 말인가. 한없이 자유로운 젊음을 구가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실은 한없이 가난한 약자인 그들의 모습은 우리 사회에서 어떤 여성들이 자리한 좌표점과 너무도 유사해 보인다. 가정이라는 울타리, 가장 친밀한 부부, 연인 사이에서도 폭력을 당하는 여성들의 눈에 띄지 않는, 아픈 자리 말이다.

 

▶ 안드레아 아놀드 감독, 사샤 레인, 샤이아 라보프, 라일리 코프 주연 <아메리칸 허니>(2016, 영국 외)

 

여성에 대한 폭력과 살인이 일어나는 ‘집’

 

한국여성의전화는 언론에 보도된 살인 사건을 분석한 결과, 지난 한 해 동안 남편이나 애인 등과 같은 친밀한 관계에 있는 남성에게 살해된 여성이 최소 82명이고, 살인미수로 살아남은 여성 또한 최소 105명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피해여성의 부모, 자녀, 친구 등 주변사람들이 중상을 입거나 생명을 잃은 경우도 최소 51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가해 남자들 대부분은 피해여성들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여자가 밤늦게 돌아다녀서 홧김에 저질렀다’ 는 둥, 여성이 폭력을 일으킨 원인이라는 왜곡된 시선으로 자신을 변명하는 것이다. 폭력과 살인사건이 벌어지는 장소가 대부분 피해여성의 집이나 일하는 곳이라는 점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가장 안전하고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곳이 어떤 여성들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는 현실, 또한 폭력에 노출된 여성들을 보호하는 사회적 환경 또한 아주 열악하고 미비하다는 것은 안타깝고도 슬픈 일이다.

 

최근 이별에 앙심을 품은 전 남자친구의 협박에 두려움을 느낀 한 여성이 경찰서에 가서 보호를 요청하여 언제든 위험이 감지되면 경찰이 즉시 출동할 수 있는 비상벨을 자신이 일하는 가게에 설치했음에도 불구하고, 전 남자친구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녀가 일하는 가게 주위에 전 남자친구가 나타나서 바로 비상벨을 눌렀지만 경찰은 여성이 죽은 뒤에야 그곳에 왔다. 단 몇 분의 차이로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그 여성의 두려움을, 사실 이 땅을 살아가는 여성들은 하루하루 공유하고 있다. 비상벨이라는 sos 신호가 무색한 이 사회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이 집에서, 일터에서, 거리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 폭력이 잘 눈에 보이지 않다는 것도 여성들이 처한 끔찍한 현실이다.

 

오래전 교회에 다닐 때 만난 한 기혼여성은 남편에게 성폭행을 당했던 경험을 털어놓으며 울먹였었다. 그녀의 남편은 교회 안에서 한없이 자상하고 온유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지만, 집에서는 조금만 기분이 좀 나쁘다 싶으면 그녀에게 함부로 말을 하고 무시하는 언어폭력을 자행하는 위선적인 남자였다. 하루하루 질긴 고통 속에 살아가던 그녀가 이혼을 결심하고 일자리를 알아보며 새로운 삶을 꿈꾸던 그때, 그녀의 남편은 저항하는 그녀에게 강압적으로 성폭력을 자행했다. 그 사건 이후 둘째가 태어났고 그녀는 결국 이혼을 포기하고 말았는데, 사실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하다. 가정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잘 보이지 않을 뿐.

 

만약 당시 그녀가 이혼을 감행했다면, 그들 부부를 아는 주위 사람들은 속내도 알지 못한 채 그녀만을 비난했을 것이다. 아이가 둘이나 있고 남편은 저렇게 착한데, 사소한 성격 차이로 이혼을 하다니… 하며,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녀에게만 돌을 던졌을 것이다. 그 돌을 감당할 용기가 없었다고 그녀가 나중에 고백하기도 했으니.

 

가정에서 오히려 보호받지 못하는 삶. 이 땅의 여성들에게 그래서 가정은 이중의 의미다. 스타에게는 명목상 보호자가 있었지만 이들은 스타를 비롯한 아이들을 보살피지 않았고, 오히려 학대를 했다. 그녀가 어린 동생들과 함께 쓰레기통을 뒤져 먹을 것을 찾게 만드는, 무책임하고 더 나아가 성폭력까지 행사하는 보호자였던 것이다.

 

▶ 안드레아 아놀드 감독, 사샤 레인, 샤이아 라보프, 라일리 코프 주연 <아메리칸 허니>(2016, 영국 외)

 

‘나의 집’을 갖고 싶다는 스타의 꿈

 

아이러니하게도 스타의 꿈은 집을 갖는 것이다. 집을 나왔지만 그녀는 언젠가 ‘나의 집’을 갖고 싶다. 마당이 딸린 집도 좋고 트레일러도 좋으니 내 집에서 아이를 많이 낳고 싶다고 말하는 스타의 얼굴은 먼 곳을 향해 있다. 그녀 자체가 꿈이 된 것만 같은 표정이다. 어느 날 스타가 자신이 좋아하는 제이크에게 던지는 질문도 꿈에 관한 이야기다.

 

“꿈이 뭐야?”

스타가 묻자 제이크는 당황스러워하며 말한다.

“그런 질문은 처음 받아봐.”

 

하지만 그날 밤 제이크는 스타에게 가방에 숨겨둔 반짝이는 것들을 보여준다. 잡지를 팔기 위해 집을 방문할 때마다 몰래 훔친 돈과 금붙이의 빛. 그는 이것들이 언젠가는 꿈을 사 줄 수 있다고, 숲에 집을 지어줄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마치 노예의 퇴직금처럼 말이다.

 

그렇다. 스타와 제이크의 꿈은 같다. 그들은 집을 갖고 싶다. 지금은 비록 떠돌아다니며 아무도 사려고 하지 않는 잡지를 파는 가난한 크루에 불과하지만. 제이크가 스타에게 보여준 빛은, 둘이 처음으로 만난 마트 주차장에서 햇살에 부딪혀 눈부시게 빛나던 제이크의 핸드폰, 그 한 면을 가득 채운 반짝이, 판매기록을 적는 수첩을 받은 새로운 크루들에게 마치 환영 의례처럼 주어지는 반짝이는 스티커, 아니 그녀의 이름인 ‘스타’와 모두 닮았다. 또 밤이면 따스한 수프 냄새가 진동할 것만 같은, 스타가 꿈꾸는 ‘나의 집’ 창에서 새어 나오는 빛과도 닮아있다.

 

하지만 제이크가 자본이라는 현실에 예속된 채 꿈을 꾸지만 실은 꿈을 잃어버린 것에 반해, 스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꿈을 꾼다. 자존심을 기꺼이 돈과 맞바꾸며 잡지를 팔기 위해 매 순간 거짓말하는 제이크와는 달리 스타는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현실과 대면한다. 그런 그녀를 제이크는 ‘거친 아이’로 표현하며 길들이려 하지만 스타는 ‘나는 황소가 아니’라며 말한다.

 

“난 네가 필요 없어. 내가 할 수 있어!”

 

어쩌면 스타와 제이크, 이 둘이 꿈꾸는 집은 다른 곳인지도 모르겠다. 잡지를 팔아 돈을 모아 집을 갖는다는 것은 먼 미래, 어쩌면 이루어지지도 못할 환상 같기도 하다.

 

영화의 마지막,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어둠의 강변에서 열린 파티에서 제이크에게 선물 받은 새끼 거북이를 스타는 다시 강물로 돌려보낸다. 그리고 거북이가 집을 찾아 돌아갔듯 자신도 물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스스로를 물세례 하듯 강물 깊은 곳까지 들어갔다 다시 나온다.

 

그 순간, 스타는 그녀의 어머니가 이름 지어준 의미의 ‘죽음의 별’이 아닌 새롭게 부활하려는 별이 된다. 왜냐하면 강물 주위로 반딧불이 별처럼 날아올랐기 때문이다. 눈물로 흐려진 나의 눈에는 분명 들렸다. 폭력으로 여성을 길들이려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수많은 여성들의 목소리가.

 

‘죽지 마! 살아 나! 우리들이 돌아갈 집을 지어줘, 이제는.’

 

그녀들이 어둠 속에서 반딧불처럼 반짝이며 살아나 외치고 있었다. 눈물의 빛으로 살아나 스타에게 힘과 위로를 심어주고 있었다.

 

▶ 안드레아 아놀드 감독, 사샤 레인, 샤이아 라보프, 라일리 코프 주연 <아메리칸 허니>(2016, 영국 외)

 

[아메리칸 허니를 더 잘 읽기 위한 영화미학]

 

영화 제목인 아메리칸 허니(American honey)는 미국 남부 출신의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여성을 이르는 말로, 집을 나온 젊은이들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순수의 시간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특히 영화 후반부에 좁은 승합차 안에서 동명의 노래인 ‘아메리칸 허니’를 한 목소리로 부르는 10대 젊은이들의 얼굴은 마음을 더욱 서늘하게 저민다.

 

제이크에게 스타는 그가 오래전 잃어버린 순수다. 또 청교도의 청렴한 가치로 세워졌지만 현재는 부패한 미국이 잃어버린 순수이기도 하다. 스타가 모임에 합류한 뒤 처음으로 간 곳이 동화 <오즈의 마법사>의 도시 캔자스라는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알맹이보다 외양이 부풀려진 마법사 오즈처럼, 미국이란 나라가 실체가 없는 환상 같은 곳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캔자스에 이어 네브래스카의 부유한 마을, 사우스다코타의 유전 지역, 미네소타의 빈민촌 등을 로드무비로 따라가며 빈부 격차가 심한 미국의 이면을 보여주는 영화 아메리칸 허니. 위선적인 기독교인 고객들을 보여주면서 쇠락한 청교도 가치를 껍데기만 붙들고 있는 이중적인 미국의 실상을 보여주는 장면은 전혀 달콤하지 않고 풍자적이다. 이유 없이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성조기 이미지 역시, 불안하게 떠도는 젊은이들을 통해 미국이라는 나라를 풍자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반증일 터.

 

인공지능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적인 잡지를 파는 젊은 크루들의 모습이야말로, 쇠락해가는 미국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훌륭한 상징은 아닐까. 노래 American honey가 미국에서 백인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컨트리 송이라는 점도 눈여겨볼 만한 부분이다. 그 외에도 시종일관 흐르는 다양한 음악은 163분이라는 런닝타임을 지루하지 않게 족히 즐길 수 있게 해준다.

 

한편, 흔하지 않은 4:3이라는 좁은 화면 비율은 그나마 좁은 승합차 내부를 더 비좁게 보여주며, 열 명 남짓한 젊은이들이 마치 소모적인 도구처럼 서랍 속에 채워진 듯한 느낌마저 불러일으킨다. 초상화(portrait)에 가장 적합한 프레임이기 때문에 4:3이라는 화면 비율을 선택했다는 감독의 말처럼, 카메라는 10대 젊은이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직면해서 보여준다. 머무르지 않고 날마다 떠나지만 정작 삶의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 승합차는 마치 비상구가 부재한 작은 세상 같다. 매 순간 불안하게 소진되는 그들의 일상처럼 흔들리는 핸드헬드 카메라의 시선 또한 그런 불안함을 역동적으로 담아내기에 충분하다.

 

영화에서 자주 출몰하는 동물 이미지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주워온 다람쥐, 훔친 개 등 길들여진 동물만을 좋아하는 젊은이들. 하지만 어둔 들판에서 야생의 곰과 두려움 없이 만나는 스타의 실루엣. 그녀는 집 안에 갇힌 벌레를 다시 밖으로 날려 보내주고 수영장에 빠진 벌레를 물 밖으로 끄집어 구해준다. 닫힌 세상에서 끊임없이 자유를 향해 비상하려는 스타의 간절함이 전해지는 장면들이 아닐 수 없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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