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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 정신성

<여자가 쓰는 집과 밥 이야기> 공간의 발견④


※ <학교종이 땡땡땡>, <남자의 결혼 여자의 이혼>을 집필한 김혜련 작가의 새 연재가 시작됩니다. 여자가 쓰는 일상의 이야기, 삶의 근원적 의미를 찾는 여정과 깨달음, 즐거움에 대한 칼럼입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두 평 남짓, 작지만 자기 위엄을 지닌 공간

 

“영혼의 샤워를 한 것 같아요.”

“다른 세계로 들어갔다 나온 느낌이야!”

“고요히 자신과 대면하는 공간입니다.”

 

새 집에서 잠시 머물거나 하룻밤을 지낸 친구나 지인들의 말이다.

 

▶ 방. 작지만 자기 위엄을 지닌 견고한 공간.  ⓒ김혜련

 

2013년 8월 1일에 상량식을 올렸던 집이 2년 반쯤에 걸쳐서 완성되었다. 전체 7평이 채 안 되는 작은 공간이다. 화장실과 다락, 그 사이에 놓인 마루 공간과 밖에 놓인 누마루를 빼면 2평이 조금 넘는 방이다. 그런데, 이 작은 공간이 주는 느낌은 예사롭지 않다.

 

이 작은 집은 일상적인 느낌을 주지 않는다. 안채가 생활공간으로서의 편안함과 소박함을 지니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지인들의 느낌이 말해주듯 이 공간은 종교적 공간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들어서면 신성성, 내재적 초월성을 느끼게 한다.

 

이런 느낌은 일상의 공간에서는 느끼기 어렵다. 신전이나 종교적 공간에 들어갔을 때의 느낌이다. 거대한 나무 밑에 갔을 때도 비슷한 느낌이 든다. 자신이 낯설어지는 느낌. 익숙한 자기로부터 자기가 낯설어질 때 존재의 신성성은 드러난다. 자기의 몸에서 나오는 새로운 느낌을 느낀다. 일상, 외부와 단절이 느껴질 때, 즉 공간 자체의 내면성이 드러날 때 이런 느낌이 온다. 그래서 성당 같은 공간은 동굴처럼 만든다.

 

도시아이들이 ‘꿈꾸었던 집’

 

사실 이 집은 그런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지어진 집이다. 요즘 우리들이 살아가는 익숙한 공간과 다른 이질(異質)성이야말로 이 공간의 특징이다. 골조와 비례미, 쓰인 재료들 모두 집의 성격을 드러내는데 기여한다.

 

이를테면 한지는 빛을 은은하게 흡수해서 머금고 있는 느낌을 준다. 빛을 반사하는 것과 머금는 것, 그 둘의 차이는 크다. 실크 벽지는 빛을 반사한다. 그때 우리는 그저 매끄러운 느낌을 가질 뿐이지만, 빛을 머금고 있을 땐 뭔가 신성하고 따뜻한 것에 자신이 담겨있는 느낌을 받는다.

 

이 집에 다양하게 구성된 비례미도 그렇다. 특히 동쪽 창의 비례미가 돋보이는데, 창문의 폭이나 크기에 따라 공간의 느낌은 많이 달라진다. 지금보다 조금 작아지면 답답해지고, 커지면 벽면의 분할 자체가 이상해진다. 창의 높이 또한 창 밖 풍경을 어느 정도 들어오게 할 건지 고민해서 결정된 위치다.

 

▶ 마루의 복도로 작은 공간에 깊이감이 생긴다.  ⓒ김혜련

 

이 집의 독특한 구성 중 하나는 마루를 복도처럼 놓은 것인데, 전통 형식인 마루를 방으로 끌어들여 와 본 것이다. 복도로 인해 한 공간이 두 개의 공간으로 선명하게 분리되고 공간에 깊이감이 생긴다. 마루의 폭은 맞은 편 문의 창을 통해 방안에서 창밖의 풍경을 끌어오는데 적합한 폭으로 맞추기 위해 고민을 많이 한 것이다. 서울서 온 한 손님은 이 마루가 무척 마음에 들었던지 이런 편지를 보냈다.

 

“화장실 앞 작은 마루의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이 참 좋았습니다.”

 

이 공간에서 사람들의 사랑을 가장 받는 곳은 다락이다. 다락을 계단처럼 이층으로 만들어 공간의 차별성이 생겨나, 작은 두 공간의 느낌이 각각 다르다. 다락의 창들은 그 위치와 크기, 높이가 여러 모로 배려된 것이다. 크기는 다락의 크기와 비례가 맞아야 하고, 위치나 높이는 바깥 풍경을 어느 곳에서 가장 잘 끌어들일 수 있을지 고민된 것이다. 한 여름에 자귀나무의 분홍빛 꽃이 이 창을 가득 채우면 다락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몸을 떨게 되는 공간이 된다. 어른이든 아이든 동굴 같은 이 공간을 좋아한다.

 

“와아, 이 집은 꿈의 집이에요. 꼭 이런 집을 짓고 싶어요!~”

 

대안 초등학교 교사인 아들이 아이들과 ‘들살이’를 왔다. 도시에서만 자란 아이들이 이 공간을 자신이 꿈꾸었던 공간이라고 말했을 때, 놀라웠다. 처음 보는 집의 형태고 불편한 구조일 수도 있는데, 아이들은 집에서 자유롭고 생기발랄했다. 인간의 유전자 속에 이런 원초적 공간의 원형이 각인되어 있는 건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외에도 감실처럼 처리한 싱크대나 책꽂이는 좁은 공간을 최대한 활용한 지혜다. 그 공간들이 그냥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면 방의 크기는 지금보다 훨씬 협소해지고, 느낌 또한 지금과 달리 산만해졌을 게다.

 

작은 공간이 스스로의 위엄과 깊이를 드러내는 것은 이런 장치들이 고려된 결과다. 덧붙이고 싶고 장식하고 싶은 것을 계속 덜어낸, 극도로 절제된 공간이다. 절제된 단순함, 거기에서 어떤 신성함이 드러난다.

 

아무도 없는데도 아무렇게나 행동하게 되지 않고, 아무것이나 들여놓게 되지 않는다. 함부로 늘어놓게 되지도 않는다. 이 공간에서 나는 고요해지고, 산만하지 않고 차분해진다. 공간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 집의 동굴 다락   ⓒ김혜련

 

예쁘고 편리한 집에 살아도 곧 권태로워진다

 

“어떻게 하면 멋진 집을 지을 수 있을까?”

“내가 원하는 집이 어떤 집인지 잘 모르겠어요. 평생 본 게 아파트니 집에 대한 상상력이 아예 없는 것 같아요.”

 

요즘 들어 지인들에게서 부쩍 많이 듣게 되는 말이다. 집에 대한 갈망이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풀어야할 지 잘 모르겠다는 말이다. 여기저기서 마음에 맞는 사람들이 어울려 집을 짓는다는 이야기들도 간간이 듣는다.

 

그런데 그 지향이 ‘편리’나 ‘효율성’, ‘아기자기’나 ‘예쁜’, ‘세련된’ 수준을 넘지 못한다면 얼마 가지 않아 권태롭고 지루해질 것이다. 일상의 휴식과 안락뿐 아니라 ‘정신성의 추구’라는 집의 개념이 생겨나야 하지 않을까? 내가 사는 공간이 들어올 때마다 신성성을 느끼게 한다면 늘 새로워질 수 있다. 일상 속에서 바(非)일상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내가 문득 낯설어지는 삶의 단절이 생겨난다. 그것이 안 되면 삶은 쉽게 지루한 일상으로 떨어지고 만다. 시간의 풍화를 견디지 못하고 무화(無化)되어간다. 아무리 장식을 해도 나른한 나태, ‘아무 것도 아님’으로 간다. 

▶ 밖이면서 안인 공간 누마루   ⓒ김혜련

 

‘삶의 경건함’을 느끼게 해주는 공간의 힘

 

“다녀오겠습니다.”

 

깊은 산에 들어갈 때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가슴에 손을 모아 허리를 숙이듯, 집에게 합장하고 허리를 숙인다.

 

“참 이상해요. 이 공간은 사진을 찍게 되지 않네요. 법당에서 카메라를 들이대지 않는 것처럼 말이에요.”

 

민감한 후배의 감각대로 집은 평화와 안온의 공간일 뿐 아니라 ‘자기 예배의 공간’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 할머니가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놓고 하루를 신성한 의식으로 시작했듯, 일상의 나날이 자기를 내적으로 초월해가는 형형(炯炯)한 날이 될 수 있다. 먼지처럼 하찮아지는 내 존재가 문득 ‘삶의 경건함’이라는 낯선 감각을 맞이하게 된다. 관념의 세계 속에서 그토록 찾아 헤맸지만 좀처럼 찾을 수 없어 허무하기만 했던 그 감각 말이다.

 

방에 홀로 고요히 앉아있을 때, 깊은 밤 감나무 그림자가 달빛을 타고 흘러들어올 때, 새벽의 여명이 한지 창으로 어슴푸레 밝아올 때, 삶이 경건하다는 묵직하고도 감동스런 느낌에 젖는다. 풀풀 날아다니는 먼지 같은 생이 아니라 투명하게 살아있는 생생한 삶의 감각이다.

 

두 평밖에 안 되는, 작지만 자기 위엄을 지닌 공간의 놀라운 힘이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전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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