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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가부장제를 하나씩 보이콧할 거야

<아주 작은 차이 그 엄청난 결과> 릴레이 서평③ Y에게


※ 알리스 슈바르처의 저서 <아주 작은 차이 그 엄청난 결과> 출간 기념으로,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관한 릴레이 서평을 연재합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여자는 무엇이고 남자는 무엇이야?

 

“어머, 너 멀리서는 못 알아보겠다. 남자 같아. 진짜 남자 같아.”

 

Y야. 얼마 전 너를 만났을 때 들었던 말이야. 아마 네가 ‘진짜 남자같다’고 말한 것은 최근 짧게 다듬은 내 머리, 화장하지 않은 얼굴, 카키색 티셔츠, 운동화, 청바지, 배낭. 이런 것이겠지. 나는 생물학적으로 여성이고 스스로도 여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15년 지기인 네가 그걸 모르지도 않으면서 나에게 남자 같다며 새삼스레 놀라워한 것은, 여성과 남성에게 정해진 옷차림과 외모 규범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고, 내가 그것을 따르지 않는다는 우회적인 표현이었겠지. 그날 너에게 별다른 대답을 하지 못하고 그냥 넘어갔지만, 사실 내 가슴에서 한숨이 스며 나왔어.

 

아니, 새로울 것도 없어. 공중 화장실을 쓸 때면 청소하시는 노동자가 여기는 여자화장실이라고 확인해주는가 하면, 버스 정류장에서 내 성별이 뭔지 단번에 알아차리지 못해 언짢아하는 노년 남성들의 시선을 받기도 하고, 아이들 손을 잡고 골목을 걸어가다가 동네 아주머니들이 던지는 ‘삼촌이야 이모야?’ 하는 복잡 미묘한 발언을 듣기도 하니까. 얼마 전에는 애들이 다니는 초등학교 앞에서 한 남자아이가 나를 보고 “아줌마 목소리 이상하다. 남자야 여자야?”라고 묻더라고.

 

하지만 도리어 내가 묻고 싶어. Y 네가 생각하는 여자는 무엇이고 남자는 무엇이야?

 

어떤 이는 결혼은 구시대 제도라고 생각하는 한편 땀 흘리는 더운 여름을 좋아하고, 누군가는 도시의 사무실에서 첨단 통신기술로 전 세계의 동료들과 일하기를 즐기지만 운동은 끔찍이 싫어하지. 다른 이는 아이들 손을 잡고 숲길을 걸을 때 행복해하고 꽃밭이 보이는 시골집에서 혼자 책을 읽기 좋아하고, 또 누구는 바느질로 조각보를 곧잘 만들다가도 매일 아침 신나게 축구공을 차며 땀을 흘려. 그런데도 하나같이 다른 점투성이인 우리 사이의 차이와 색깔은 ‘여자 아니면 남자’라는 단 한 가지 기준의 이분법으로 지워지고 그 경계를 넘으면 비정상이거나 질병이거나 장애라고 낙인 찍어버리지. 안타까워.

 

그야, 네가 한 말은 단순히 관심과 호기심에서 나온 말이었을 거야. 하지만 나는 하의를 벗어야만 확인할 수 있는 성기 모양 때문에 내가 어떻게 입고 움직이고 말해야 하는지 지적받는 것보다는, 요즘 어떤 그림을 좋아하고 무슨 책을 읽었으며 연인과 어떤 일 때문에 다퉜는지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

 

어느 때부터인가 이 세상이 이토록 다양한데 사람들을 딱 두 가지로 갈라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 구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낯설어지기 시작했어. 둘 중 하나만 택하라는(사실 선택이 있기나 한지는 모르겠지만) 압박들. 그리고 그것에 합당한 옷차림, 머리길이, 목소리, 단어, 눈짓에 따르지 않으면 경멸어린 시선을 받거나 잔소리를 듣거나 심할 경우 공격을 당하기도 해.

 

다행히 나는 이런 답답한 규범과 단속이 사실은 내 삶을 건강하게 하지 못하는 건 물론이고 사회를 평등하고 정의롭게 만드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됐어. 페미니즘 덕분이야. 여자다움과 남자다움에 대한 고정관념이 인간의 삶을 얼마나 제한하고 관계를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틀에 밀어넣는지 알게 된 것도 이 학문을 알게 된 뒤야.

 

▶ 알리스 슈바르처 <아주 작은 차이 그 엄청난 결과> (전 유럽을 뒤흔든 여자들의 섹스 이야기) 2017

 

‘여자노릇’이 그녀들을 어떻게 만들었나 봐

 

며칠 전 너에게 들은 말을 곰곰 떠올리다가, Y 너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 떠올랐어. <아주 작은 차이 그 엄청난 결과>라는 책이야. 이 책을 쓴 이는 독일 여성운동의 아이콘 알리스 슈바르처야.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집착하는 ‘암수’의 작은 차이가 어떤 사회를 만들었고, 우리를 어떻게 길들이고 삶을 재단했는지, 어떻게 여자들이 자신감을 잃고 남자들은 억압의 철퇴를 휘두르게 됐는지 보여줘. 그 방법은 의외로 단순해. 그저 열일곱 명의 여성들에게 자신이 살아온 삶과 성에 대한 경험과 기억을 말해달라고 청하고 그것에 귀 기울인 것뿐이야.

 

이 책에 등장하는 여성들 중 일부는, 기계적인 ‘여자노릇’을 강요당하지만 자신들이 어떤 억압에 노출되어 있는지 채 인식할 기회를 얻지 못해. 결국 억지스럽게 여성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폭력성을 못 이겨 그만 정신과 몸이 망가지기도 해. 유명 저술가 남편의 비서 노릇만 하다가 그와 결별하고 심한 우울증을 앓게 된 리타가 대표적인 예야.

 

<…새침을 떨거나 화장을 하면 ‘여성스러운 행동’을 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회복의 표시로 평가한다는 것이다. “너무 많이 웃지 마세요. 남편이 또 이리로 보낼 수 있으니까요.” 정신질환에 대한 기준도 대단히 성차별적이라는 얘기다.>(80쪽)

 

리타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우리가 한때 천재였던 여자들은 다 왜 정신병 판단을 받거나 행려병자가 되느냐며 의아해했던 것이 떠올랐어. 최승자 시인, 나혜석, 버지니아 울프, 까미유 끌로델… 우리가 모르는 이름은 더 있겠지.

 

그리고 다른 친구들과 함께 우리 갱년기를 걱정하며 나눈 얘기도 기억났어. 점점 복잡하고 강도 높은 의무에 시달리는 현대 기혼여성들이 어떻게 갱년기에 오는 우울증을 겪지 않을 수 있느냐고. 이삼십 년 동안 내 욕구는 뒤로 한 채 돌봄과 희생만이 존재 이유인 양 살았는데 갑자기 닥쳐온 신체 변화를 감당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고 말이야. 이 책에도 갱년기에 여성들이 유독 우울증을 겪는 이유를 이렇게 말하더라고.

 

<아이들이 다 자라서 집을 떠나고, 남자들 눈에 자신이 성적인 대상으로 보이지 않을 나이가 되었다고 더 이상 자신의 삶이 의미가 없어 보이게 된 것은, 그런 식으로 길들여져 있기 때문인 것이다.>(81쪽)

 

그도 그럴 것이, 나부터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욕망, 내가 되고 싶은 것을 온전히 내 입장에서 바라본 적이 별로 없었어. 항상 여자친구, 엄마, 아내로서의 내 모습이 어때야 할지 지적받고 남성의 눈에 비친 내 욕망을 거꾸로 추측하느라 골머리를 앓았어. 무려 42년 전에 쓰인 이 책에도 그런 이야기가 나와. 지식을 상품으로 생산하는 출판사에 다니는 알렉산드라의 사연이야. 그녀는 남자친구가 없거나 성격이 ‘여성적’이지 않으면 비정상으로 분류될까봐 전전긍긍해 해.

 

알렉산드라의 남자친구는 무조건 페니스를 상대의 질에 넣어야 한다는 강박을 고수하는데, 알렉산드라는 그 때문에 고통을 받는 데도 남자 노릇과 여자 노릇으로 나뉜 역할 분담을 준수하느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해. 그녀는 자신이 막 성년이 되었을 때도 “나 자신이 될 엄두를 내지 못할 때였”고 “내가 누군지 전혀 몰랐고, 그걸 알 생각도 하지 않았”다고 말해. 그리고 여전히 직장에서나 남녀 관계에서도 스스로를 기만하는 쪽으로 길들여졌다고 해. 내 태도, 내 몸, 내 성관계는 오로지 내 결정에 따른다는 사실이 마치 세상을 뒤집을 만한 무서운 비밀이기라도 한 것처럼, 이것을 알아차리기가, 당연스레 받아들이기가 그렇게 어려운 일인 걸까?

 

성별 이분법을 떠받드는, 여성적인 것과 남성적인 것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은 이 책을 관통하고 있어. 여성성, 남성성? 그게 대체 무엇일까? 알리스 슈바르처는 안네라는 레즈비언 여성의 이야기를 소개하며 이렇게 말해.

 

<레즈비언의 세계에서 확인되듯 ‘여성 노릇’의 거부가 곧 ‘남성다운’ 세계로의 변화를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여태까지는 남성에게만 허용되던 공격적이고 적극적인 활동양식을 취한다 해서, 그게 곧 남자들을 따라하는 것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여성다움’의 한계를 확장하여, 여태까지 묶여 있던 여성의 왜곡된 모습을 해방시키는 쪽일 것이다.>(114쪽)

 

나 역시 ‘여성성’에 갇히기 싫어서 포용적 태도를 억누르고 일부러 우악스럽고 배타적인 방식을 채택하려 든 적이 있어. 그러다 부드럽고 약한 면모가 튀어나올 것 같으면 왠지 진 것 같고 수치스러웠어. 언젠가 Y 네가 나더러 ‘왜 그렇게 남들에게 너그러운 척 하느냐’고 따끔하게 쏘아붙였을 때 내가 느닷없이 눈물을 터뜨렸던 거 기억 나니? 그때 왜 ‘정말로 너그러운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런다’고 순순히 대답하지 못했을까? 그냥 때로는 강경하고 냉철하지만 때로는 이해심 깊고 조화로움을 선호하고 싶다고, 그냥 나다운 인간성을 계발하고 싶다고 왜 대답하지 못했나 아쉬움이 남아.

 

내 생각에는 여성성의 반대가 남성성이 아니고, 그 역도 아닌 것 같아. 그보다는 지금까지 한쪽에만 치우쳐 있던 여/남성성이라는 테두리를 걷어내고 다른 상상을 무한히 허락하는 것이 맞는 일이라고 믿어.

 

▶ <아주 작은 차이 그 엄청난 결과>의 저자이자, 독일 페미니스트 잡지 [엠마]를 만든 알리스 슈바르처

 

우리는 결혼의 진짜 얼굴을 보았지

 

이제 이 책을 정말 너에게,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도 다시 한 번 권하는 이유를 말할 차례가 됐어. 너도 그렇겠지만 나 역시 한 사람을 사랑하고 그로 인해 새로운 우주를 대하는 기대로 결혼하고 아이도 낳았어.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거야. 시간이 갈수록 마음은 닫히고 내 몸에 그 사람의 몸이 닿는 것도 견디기 어려워졌어. 좀체 성관계에서 즐거움도 포근함도 느껴지지 않았지.

 

이 책에는 현역 혼인 관계에 있는 여성들과 이혼한 여성들의 입을 빌어 결혼 혹은 이성애 파트너십이 어떻게 지배종속 관계로 흘러가는지, 그리고 그로 인해 사랑이 얼마나 쉽게 ‘결단’나는지 보여주고 있어. 더구나 한 번도 내가 남자와 결혼할지, 여자와 결혼할지 혹은 결혼을 할지 말지조차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을 들은 적이 없는 사람들도 있어. 책에 나오는 레나테와 도로테아처럼 말이야.

 

<권력을 휘두르는 전형적인 남자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는 여자, 그런 역할을 맡은 경우는 오르가즘을 느낄 수 없었다는 얘기다. 남녀의 전통적 관계에는 남자의 우월성과 여자의 열등성이 전제되기 마련이다. 이 상황에서 여자들은 몸과 마음이 닫혀버린다. 이 책의 사례들에서 그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두 사람 사이에 대화가 차단되고 쇳덩어리처럼 불신이 굳어진다. 레나테는 나에게 서슴없이 하는 얘기를 자기 남편한테는 절대로 하지 않았다.>(133쪽)

 

<이렇듯 도로테아는 여러 규범에 맞춰 정상적으로 사는 척 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결코 순응한 적이 없다. 착하고 얌전한 여자 노릇을 할 수 없다는 거부반응은 감정적으로 이성에 대한 혐오로 나타났고, 그리고 남자에 대한 거부로 이어졌다.>(151쪽)

 

<인간은 여성이거나 남성이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미친 여자 취급을 받는 것이다. 제 3의 길은 있을 수 없다.>(153쪽)

 

벌써 수년 전부터 나는, 아무리 남편이 꾸준히 요청해도 도무지 성관계를 하고 싶지 않았어.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섹스라는 교감을 전혀 원하지 않았고, 그럼으로써 이 혼인관계 자체를 거부하고 있었어. 내가 알던 사랑, 내가 기대했던 평등하고 공정한 관계는 불가능했어. 나와 남편은 고유한 인격체이기도 하지만, 남과 여로 가차 없이 갈라지는 잔인한 흑백 세계를 대표하는 파이터들이었어. 고유한 개체로서 만나 사랑하는 것 같지만, 사회는 우리를 여자라는 등번호, 남자라는 등번호를 달고 링에 오른 선수로만 보기 때문이지. 아내다움, 며느리다움, 엄마다움, 딸다움의 기준은 남편다움, 사위다움, 아빠다움, 아들다움과 확연히 구별됐고, 나와 남편은 그 생경한 규범 안에서 서로에게서 소외감을 느꼈고 결코 행복하지 못했어.

 

결혼한 너와 나는 어느덧 미혼 여성들을 질투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게 됐지. 그들은 눈치 볼 시댁도, 마음 안 맞는 남편도, 어려운 육아도 견딜 필요가 없으니까. 자신의 관심사에만 몰두하면 되고 여성운동도 어느 때고 시간 내서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고 말야. 그러다가도 어떤 때는, 남편이 벌어다주는 돈이 넉넉한 주부들 이야기를 들으면 그것만으로도 부부 사이가 꽤 원만할 거라고 추측했지.

 

하지만 지금 보니 가부장제는 결혼을 했든 안 했든, 부자든 가난하든 여성들의 다양한 삶을 허락하지 않는 것 같아. 결국 기혼과 비혼이 겪는 차별은 상황만 다를 뿐이고, 넉넉하든 빠듯하든 여성의 일은 오로지 여성에게 돌아가기 때문이겠지. 이 책에서 ‘가정주부증후군’에 시달린다고 소개되는 이름가르트는 전형적인 부잣집 사모님이지만, 사남매 독박 육아와 덤터기 가사노동에 분통을 터뜨리기는 매한가지야.

 

<어쩌면 그렇게 염치들이 없어! 남편이 깜짝 놀라며 도대체 왜 그러냐고, 도와달라고 말을 하면 안 되냐고 하는 거예요. 아니 그럼, 내가 맨날 쫓아다니며 이것 좀 도와주세요, 저것 좀 도와주세요, 사정해야만 하냐, 너희들은 눈이 없냐, 온 집안을 쓰레기 굴로 만들면서 그걸 모르냐고 악을 썼어요.>(187쪽)

 

더욱이 자신이 겪는 공기 같은 성차별을 인지하는 것도 ‘젊고 예쁜 아가씨들’이 앞장선 낙태죄 폐지운동 덕분이라고 말해. 생각 나? 나 역시 비혼 페미니스트들을 만난 덕분에, 내가 겪어왔던 뭔지 모를 우울감과 설명할 수 없지만 피부로 느끼던 소외감과 차별의 징후를 명명할 수 있게 됐다고 말한 것을? 나는 결혼하지 않고 사는 삶을 택한 동료 여성들을 보면서 정상성의 규범에 가려 발견하지 못한 틈, 이 세계를 보는 다른 시선과 행동의 대안이 엄연히 있다는 걸 알게 됐어. 그리고 다들 육아는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고 말할 때, 남성집단 전체는 또 다시 그 책임에서 면제되고 있다는 사실을 제시한 것도 페미니스트 여성동지들이었어.

 

이혼은 ‘나’라는 존재에 성큼 다가선 경험이었어

 

그래, 이쯤에서 고백하고 싶어. 내가 이 책을 읽으며 흥분하면서 거의 모든 문장마다 밑줄을 그은 이야기는 바로 이혼녀 카타리나의 인터뷰였어. 카타리나는 “이제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 두렵지 않은지 물어봤”더니 이렇게 답해.

 

<“내가요? 천만에 말씀, 만만에 콩깍지에요. 내가 얼마나 할 일이 많은데요. 아이들 다 키운 후에도 나는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요. 함께 자는 남자가 없다고 불행할 이유는 전혀 없어요. 오히려 홀가분해서 날아갈 지경이지요. 옆에 남자 하나만 있어 봐요, 밥해 줘야지. 청소하고 빨래해야지, 내 맘대로 자고 일어날 수도 없잖아요. 난 정말 부족한 것 하나 없어요. 노예생활에서 해방된 게 기쁠 따름이죠. 분홍빛 안경은 예전에 벗어던졌어요.”>(227쪽)

 

애초에 누가 있어야, 누구의 보호를 받으며 사랑받아야만 행복하게 살 수 있었던 것이 아니야. 우리는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무엇을 홀가분하게 할 수만 있으면 되었어. 맞아. 그랬어. 나 역시 기대했던 결혼의 진짜 얼굴을 접하고, 그저 맥 빠진 여자/남자의 꼬리표만 달고 있으면 되는 줄 알았다가, 그냥 나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성별 따위 구애받지 않고 내 모습을 찾아가고 그 자유를 경험하고 나면 우리는 굉장히 달라져. 이 당연한 권리를 모두가 누려야 한다는 것을 당연스레 받아들이게 돼. 그래서 페미니스트는 혼자서만 행복하지 않아. 다른 사람도 페미니즘을 접하고 가장 자기답게 살 수 있도록 내가 사는 세상을 평등하게 만들어야 직성이 풀려. 카타리나도 직업교육 자격 심사를 받으러 가서 그런 일을 겪었대.

 

<“성전환 수술을 받은 남자래요. 나체쇼에서 무희로 일했다는데, 남자라고 탈락시킨 건 잘못된 것 같아요. 기회는 똑같이 주는 게 옳지 않나요?”>(228쪽)

 

자신도 남의 욕구에 맞춰 자의식을 내려놓고 살았지만, 다른 소수자의 입장을 헤아리고 이 사회가 공평해야 한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고 깊어진 거야. 이혼을 감행하고, 삶에서 비뚤어져 있던 것을 바로잡고, 모든 인간은 그냥 인간이라는 걸 알게 된 한 여성의 잔잔한 일대기를 보며 가슴이 두근거렸어. 왜냐하면, 나 역시 바로 이 년 전에 이혼이라는 선택으로 더 ‘나’라는 존재에 성큼 다가서는 경험을 했으니까. 그 변화가 얼마나 나 개인은 물론이고 관계까지 윤택하게 만드는지 잘 아니까.

 

섹스에 대한 낯설지만 해방적인 시선을 배우며

 

Y야. 그날, 내가 남자처럼 하고 다닌다며 혀를 차다가도, 내 눈빛이 한결 반짝인다며 살짝 한숨을 쉬던 네가 떠올라. 너는 여유 있는 나를 보고 헷갈렸을 거야. 성별 규범을 잘 따르지 않고 이성애 가부장 제도를 하나씩 보이콧하며 사는 내가 편해보여서 기분이 묘했을 지도 몰라. 그런데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기로 했어. 알리스가 열심히 발로 뛰며 담아온 여성들의 삶과 성 이야기, 그리고 책 뒤편에 그녀가 기술한 질 오르가즘을 둘러싼 허구의 역사를 읽으며 나는 또 다른 깊이를 탐험하고 있어.

 

이제 나는 “클리토리스가 여자의 성기”이고 “질은 생식기일 뿐”이라는 새로운 선언을 접했어. 앞으로 한동안은 이 새 인식을 가지고 주변을 탐구할 생각이야. 섹스에 대한 낯설지만 지극히 해방적인 시선을 받아들이고 나니, 성으로 비롯되는 수많은 관계 역시 전혀 다르게 해석하는 눈이 트이게 되었어. 그래서 Y, 너의 말에 차분히 대답할 수 있는 날이 조만간 올 것 같아.

 

알리스의 말대로, 이제 나는 남과 여라는 정말 허무하고 쓸데없는 이 작은 차이를 “결연히 삭제”하기로 했어. 여자와 남자가 상대의 성별에 집착하지 않고, 누가 무슨 성 역할을 수행할지 일일이 정해두지 않는 세상이 되도록. 나는 틈나는 대로 경계를 넘고 무엇이든 재미난 일탈로 너를 헷갈리게 할 생각이야. 그리고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발설해보자. 내가 너의 인터뷰이가 되고, 네가 나의 인터뷰이가 되어 ‘차이의 역사’를 새로 쓰자. 너를 곧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릴게.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필자 한알 - 비혼주의를 깨고 11년의 이성애 결혼 생활을 보낸 후, 2년 전부터는 ‘다시 비혼’으로 삽니다. 딸 둘과 같이 뭘 하면 제일 재미있을까를 연구하고 이를 실험하며 사는 게 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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