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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지원을 받는 사람만 꿈을 좇을 수 있나

[나의 알바노동기] ‘생계형 알바’ 인생의 기로에서


※ <일다>는 청년여성들의 가감없는 아르바이트 현장 경험을 기록합니다. “나의 알바노동기” 기획은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연재됩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싸가지 없는 년” 소리를 듣고 받아낸 시급

 

▶ 올해 여름맞이로 큰 맘 먹고 산 선풍기.  ⓒ박경란


식당일을 하는 엄마와 중학생인 언니 그리고 초등학생인 나, 우리 가족은 부유하지 않았다. 엄마는 12시간씩 식당에서 일해야 했기 때문에 집안일은 전부 언니와 내 몫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술에 취한 엄마에게 아빠의 외도와 부모님의 이혼 사유를 듣게 되었다. 엄마에게 매일 5백원씩 용돈을 받았던 게 미안해졌다. 그래서 용돈벌이를 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나의 첫 아르바이트는 13살, 동네 치킨집에서 전단지를 배포하는 일이였다.

 

얼마를 받았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내가 받을 돈을 다 받지 못했다는 것은 기억이 난다. 치킨집에서 정해주는 아파트 단지나 주택에 가서 전단지를 붙이는 일을 했다. 4시간 정도 붙이고 발이 퉁퉁 부은 채 치킨집에 가면, 주인아저씨는 “내가 돌아봤는데 너 제대로 안 붙였던데? 돈은 다 못 준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내가 따질 틈도 주지 않고 정산해버렸고, 나는 내쫓기듯 나왔다. 그렇게 며칠을 더하다 엄마에게 걸려 혼이 난 후 첫 알바는 끝이 났다.

 

엄마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그 다음 아르바이트는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시내의 한 분식집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한 시간에 1천5백원을 받고 일하기로 했다. 전단지 알바보다 훨씬 많이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그 분식집은 주변에 세 개의 가게가 동맹을 맺어 운영하였고, 나는 바쁜 가게로 지원을 나가 일을 하기도 했다.

 

“일 정말 잘한다”, “손이 야무지다”라는 칭찬은 나를 더 열심히 일하는 착한 ‘호구’로 만들어줬다. 근무 시간이 갈수록 늘어나서 결국 분식집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주인은 3개월을 채우지 않았다는 점과 부모동의서가 없었던 것을 빌미로 시급을 1천원밖에 줄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억울함에 주인과 싸우다 “싸가지 없는 년”이 되어 부모를 욕보이는 말을 듣고 시급 1천5백원을 받아냈다. 이때부터 ‘일한만큼 받아야 된다’는 인식이 생기게 되었던 것 같다.

 

“살 좀 빼”, “이쁘게 좀 하고 다녀”

 

고등학생이 되고, 엄마의 사정상 언니와 단 둘이 모텔이나 여인숙에 달방을 잡고 살게 되었다. 학교에 들어가는 돈은 동네 교회에서 지원을 받았으나, 매달 나가는 월세와 학비, 교과서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가자마자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 후로 안 해본 일이 없는 것 같다. 백화점 주차도우미, 캐셔, 피시방, 노래방, 성형외과, 치과, 공장 등등.

 

고등학교를 중퇴한 10대의 여자애였던 내가 사회에 나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밖에 없었다. 20대가 되어서도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지 못했다. 학력과 경력으로 인정될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면접을 보러 가면 항상 듣게 되는 질문은 “학교는 왜 그만뒀어요?”였다. 내가 구구절절 얘기한다고 해서 그들이 믿을까? 그런 질문을 받고 나면 드는 생각은 ‘아, 이번에도 나가리구나’였다.

 

간혹 면접에서 ‘남자친구는 있냐? 흡연은 하냐?’는 질문을 받았다. 왜 그런 사적인 것까지 면접에서 물어봐야하나 의문이 들어서, 왜 묻는지 물어봤다. 돌아오는 대답에 기가 찼다. “여자직원들은 남자친구가 있으면 근태가 안 좋더라구요.” 또 내가 흡연을 한다고 대답하였을 때, 면접관은 표정이 어두워지며 ‘근무 시간엔 담배 필 수 없다’고 말했다. 담배를 끊을 생각은 없냐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여성 흡연자는 보기 좋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러한 이유로 면접에서 많이 탈락하였고, 더 이상 나는 흡연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흡연 문제만이 아니라, 많은 일을 하면서 나는 여성스러움을 강요당해왔다. 캐셔 일을 할 때 여자상사는 나에게 “나는 원래 뚱뚱한 애들은 안 뽑아. 게으르잖아, 보기만 해도 답답하고… 내가 널 면접 봤으면 넌 못 붙었을 거야. 그니까 살 좀 빼”라고 말했다.

 

성형외과에서 일할 때, 렌즈를 많이 껴서 결막염에 걸려 안경을 끼고 나가는 날에는 실장이 꼭 한마디씩 했다. “여자가 이쁘게 좀 하고 다녀. 직원이 그러고 나오면 수술하고 싶겠니?” 정작 본인도 40대의 ‘이쁘지 않은’ 여자였으면서 말이다. 젊은 여성직원인 나는 눈이 아파도 렌즈를 끼고 화장을 하며 출근해야했다. 이런 일이 부당하다고 느꼈지만, 말할 수는 없었다. 이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고, 나 말고도 일할 사람은 많았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나는 언제든 갈아치울 수 있는 사람이었다.

 

▶ 반려견 '부부' -뇌출혈로 쓰러진 엄마를 간병하면서 우울증이 심해졌을 때 강아지를 선물받았다.  ⓒ박경란

 

엄마를 간병하며, 유흥업소 권유를 받다

 

스무 살에 엄마가 뇌출혈로 쓰러졌다. 엄청난 병원비와 보험사와의 줄다리기, 어린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간병인을 쓸 형편도 안됐다. 또래 친구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거나 취업을 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나만 뒤쳐질까 무서웠다. 엄마가 아픈 건 내 잘못이 아닌데, 이러다 나 혼자 사회의 낙오자가 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엄마 간병을 하며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물론 새벽에 편의점 아르바이트도 했다. 언니가 벌어오는 130만원으로는 엄마 병원비도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시기에 유흥업소에 다니는 친구가 나에게 같이 일해보자 권유를 했다. “그렇게 아등바등 해봤자 한 달에 70만원을 벌어? 이거 일 일주일만 나가도 너네 엄마 병원비 다 해결되잖아. 뭐하러 그렇게 힘들게 살아?” 맞는 말 같았다. 듣고 있자니 흔들렸다. 눈 딱 감고 한번 해볼까라는 고민을 밤새 했다.

 

엄마를 간병하면서 나에게는 습관이 하나 생겼다. 하루 종일 말할 사람이 없다보니 의식이 없이 누워있는 엄마에게 혼자 묻고 혼자 대답하는 외로운 습관이었다. 그 대화의 주된 내용은 내 고민이나 우울감에 대한 하소연이었다. 유흥업소에서 같이 일하자는 친구의 권유 또한 엄마에게 말을 걸며 혼자 고민했다.

 

그런데 의식 없이 누워있는 엄마를 보고 있자니, 그런 생각을 한 내 자신이 너무 초라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엄마를 치료한들 엄마한테 자랑스럽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가장 힘든 건 엄마일 텐데, 엄마는 혼자 식당일이며 노가다일이며 가리지 않고 해서 나랑 언니를 이만큼 키운 걸텐데… 라는 생각에 그 날 병실에서 엄마를 잡고 펑펑 울었다. 그래서 난 그 현실에서 내가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결국 우리 엄마는 병원비가 밀려 병원에서 쫓겨났다.

 

이때의 이야기를 주변 사람들에게 하면 다들 “잘 선택했다”, “그때 그 일을 하지 않은 것은 정말 잘한 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술을 따르고 웃음과 몸을 파는 일이 잘못된 일일까? 정직하지 못한 일인 걸까? 그때의 나는 돈이 정말 필요했고, 결국 돈이 없어 엄마는 병원에서 쫓겨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때의 내 선택은 정말 잘한 일인 걸까? 아직도 의구심이 든다. 차라리 그런 유흥이 합법화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간혹 한다. 불법이다 보니 모두 숨기기 바쁘고 음지에서 더 더럽게 변화되어가는 것 아닐까란 생각을 요즘 들어 하게 된다.

 

그 시기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나의 학력은 ‘고졸’이 되었다. 나는 검정고시만 따면 직장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학이 기본’이 된 시대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예전과 똑같았다. 어떠한 직장을 구하려고 딱히 정한 것은 없었다. 그냥 주 5일 평일에 일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다고 생각했다. 여러 곳에 이력서를 넣고 면접을 봤다. 하지만 경력이 없고, 컴퓨터에 관한 자격증도 없는 나는 합격할 수 없었다.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일들은 몸으로 움직이는 일, 딱히 기술이 없어도 친절히 웃기만 하면 되는 일들이었고, 나는 사무직에 필요한 기본적인 OA를 다룰 줄 몰랐다. 나는 직장인이 되지 못했다.

 

생애 처음으로 하고 싶은 일이 생기다

 

사회적 패배자가 된 것 같았다. 남들에게 뒤처지진 않을까 조마조마하며 검정고시를 보고 합격해서 나와 남들이 동급이 된 것 마냥 착각했던 나를 세상이 비웃는 것 같았다. 나를 발전시켜야 된다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꿈이 없었다. 그냥 막연히 자격증이 있어야 한다, 스펙을 올려야 한다, 그런 압박감에 시달렸다. 쉬지 않고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최저임금만 받아왔던 난 학원비를 낼 여력조차 없었다.

 

다행히 국비 지원을 받아 학원을 다니고, 운이 좋게 지인의 소개로 회사에 취업도 하게 되었다. 일하면서 인정도 받고 생활이 점점 안정이 되어 가고 있을 때, 드디어 나에게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 사회적협동조합 <일하는 학교>에서 청년 설문조사 사업에 참여하며, 처음 내 명함을 받아보았다.   ⓒ박경란

 

2년 전 사회적협동조합 <일하는 학교>에서 ‘생계형 알바 청년 설문조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생계형 알바 청년이라는 말은 직장인이 아닌 아르바이트생이지만 주 40시간 이상 일을 하며, 벌어들인 돈이 자신의 생계비로 쓰이는 청년을 말한다. 설문조사에서 아르바이트를 처음 시작한 나이가 내가 최연소라는 걸 알고 굉장히 놀랐다. 이 설문조사를 통해서 나와 비슷한 청년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고, 같은 경험과 느낌을 공유 할 수 있었다.

 

이 팀은 단순히 또래모임으로 끝나지 않았고, 노무사들을 초청하여 노동 문제에 관한 강의나 교육을 진행하였다. 노무사라는 직업을 처음 알게 된 계기가 되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쌓아온 노동경험과 직접 겪었던 노동 문제들을 바탕으로, 나와 같은 노동자들을 도와줄 수 있는 그런 노무사가 되고 싶어졌다.

 

그래서 작년에 회사를 그만두고 무모한 도전을 시작했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 입학하고, 컴퓨터 자격증을 따고… 새로운 출발에 떨림과 걱정이 많았다. 검정고시를 딴 이후론 공부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는데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란 의문과, 생각보다 해야 할 것이 많아서 당황스러웠다. 겁부터 덜컥 났지만 애초에 쉬울 거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을 다잡았다.

 

이렇게 스스로 꿈에 한 발짝 다가간다고 뿌듯함을 느낄 때쯤 또 다시 시련이 찾아왔다. 국비 지원으로 컴퓨터학원을 다니는 동안은 일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건 굉장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국비 지원으로 학원을 다니면, 출석을 잘했다는 가정 하에 한 달에 20~30만원 정도의 정부지원금을 준다. 하지만 그 정도의 돈을 주면서 아르바이트를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나같은 사람은 국비 지원을 받지 말라는 의미와 같다. 부모의 지원을 받는 안정적인 상태에서만 지원받을 수 있는 제도가 아닌가 싶다.

 

학원 수강이 다 종료된 후에 다른 공부를 더 할 것인지 취업을 할 것인지 정하는 기간 동안 나는 일당알바를 구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4대보험이 들어가니 학원을 더 다니려면 알바를 하지 말라는 담당자의 말을 듣고, 나는 학원보다는 취업에 더 비중을 두게 되었다. 이런 수입으로는 생활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 작년, 회사를 그만두고 방송통신대학교에 입학해 공부를 시작했다.   ⓒ박경란

 

가스 끊긴 집…현실의 망치를 세게 얻어맞고

 

현재는 물류센터에서 일당알바를 하며 노무사 시험 준비를 하고 있다. 보통 짐을 나르고 정리하여 박스를 포장하는 일을 한다. 일당을 나가는 날이면 나의 하루는 참 길다. 아침 5시반에 기상해서 출근해 일하고 집에 도착하면 저녁 8시반 정도, 하루 2만5천보 정도를 걷게 된다. 일이 고되다 보니 하루 나가면 이틀째는 몸이 아팠다. 그래서 일주일에 두세 번 일을 했는데, 고정적인 수입이 없어지자 집안 생활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가스가 끊겼다. 내가 외출해 있는 동안 아픈 엄마는 하루 종일 차가운 집에서 계란후라이도 해먹지 못한 것이다. 가스비를 낼 돈이 없었다. 주변 사람들한테 사정을 얘기하며 돈을 빌리고, 아르바이트를 다녀와 땀범벅인 몸을 찬물로 씻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후회가 되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건가, 나 같은 사람에겐 꿈도 사치였던 걸까, 꿈은 부모의 지원을 받는 안정적인 환경에 있는 사람만 꿀 수 있는 거였던 걸까, 그냥 돈을 계속 벌었어야 했던 걸까.’

 

내가 외면하고 있던 현실의 망치에게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자괴감이 들고 눈물이 났다. ‘포기하자, 포기해야 된다’는 생각이 내 마음과 머릿속을 차지했다.

 

스물일곱 살에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며 계획을 세워 회사를 그만둘 때, 주변에서 많은 조언과 반대를 했다. “지금 시작하기에 너는 너무 늦은 거 아니냐”, “네 상황에 일을 그만둬도 되겠냐”는 걱정 어린 말들이었다. 나는 직장을 그만 둬도 아르바이트는 당연히 할 것이었기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고 큰소리를 쳤다.

 

그런데 현실은 그것마저도 힘들었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가면서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기도 쉽지 않았다. 스물일곱 살 먹은 아르바이트생보단 더 젊은 아르바이트생을 뽑았다. 더 부려먹기 쉬워서겠지.

 

지금도 나는 고민하고 갈등하고 있다. 내가 과연 해낼 수 있을지, 내 꿈에 가까이는 다가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도전도 안하고 포기하는 것보다 도전해서 못하는 것이 낫다’고 들어왔고 나 또한 그 말에 동의했지만, 지금은 모르겠다. 현실을 외면하고 꿈을 좇을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내가 유독 나약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아직 성장하는 중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해야하는지 잘 모르겠다. 어른이 되면 나아질 줄 알았는데, 내 삶은 여전히 불안하고 위태롭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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