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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인 폭력 속에서 살아가기

<홍승은의 질문교차로 인문학카페36.5º> 고요한 밤



익숙한 폭력의 감각

 

초등학교 때 살았던 아파트에서는 매일 밤마다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6층이었던 우리 집 위층 아주머니가 남편에게 맞으며 내는 비명이었다. 어느 날에는 낮에도 같은 소리가 들렸는데, 나는 그 소리가 어떤 공포영화보다 무서웠다. 종종 6층, 우리 집에서도 비명 소리가 들렸다. 엄마가 내는 소리였다.

 

비명이 메아리치던 아파트에서 독립하고, 방음이 되지 않는 자취방에서 2년간 살았던 적이 있다. 2층이었던 그 방에서도 나는 같은 소리를 들었다. 아래층 여자가 남자에게 맞는 소리였다. 새벽마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여자의 절규가 온 몸을 찔렀다.

 

그때마다 나는 내가 신고하는 줄 모르게 하려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몰래 경찰에 신고했다. 네 달 사이 서른 번 넘게 경찰이 출동했다. 경찰은 현관문을 두드렸고, 남자는 별 일 아니라며 죄송하다고 말했고, 여자는 침묵했다. 같은 패턴이 반복됐지만 남자는 한 번도 조사를 받으러 경찰서에 끌려가지 않았다. 되풀이되는 비명과 형식적 절차를 가까이에서 접하며 밤마다 이불 속에 갇힌 것처럼 숨이 턱턱 막혔다.

 

며칠 전 친구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나 요즘 새벽마다 잠에서 깨는데, 그때마다 그 날 밤이 떠올라. 무서워. 다시 상담을 받아야 할까.”

 

친구는 6년 전 새벽, 자취방에서 성폭행을 당할 뻔했다. 현관 문을 따고 들어온 남자는 칼로 친구를 위협했다. 친구는 자포자기한 상태로 차라리 자신을 죽이라고 말했다. 그런 친구의 모습에 당황했는지, 남자는 황급히 현금과 핸드폰을 훔쳐서 달아났다고 한다. 그 뒤로 친구는 비슷한 인상 착의의 남성을 보면 큰 불안감을 느꼈고, 오랜 시간 불면증에 시달렸다. 한동안 괜찮아졌나 싶었는데 여전히 힘들다고 말하는 친구에게 나는 어떤 말도 건네기가 어려웠다.

 

복도에서 사람의 발소리가 들리면 깊이 잠들었다가도 깜짝 놀라서 깬다는 친구처럼, 나 역시 밖에서 나는 미세한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지금은 방음이 잘 되는 방에서 지내고 있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다. 내가 듣거나 보지 못해도, 이 순간에도 폭력이 존재하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언제든 소리로, 장면으로, 감촉으로 나에게 흐를 수 있는 걸 알기 때문이기도 하다. 익숙한 폭력의 감각은 내 일상을 채운다.

 

폭력의 성별 정치학

 

SNS를 떠돌던 한 영상을 봤다. 여자가 남자에게 엘리베이터에서 무차별적으로 맞는 영상이었다. 남자가 엘리베이터에서 담배를 피자 아이와 함께 있던 여성이 항의했고, 남자는 다짜고짜 여자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잠깐 영상을 보다가 몸이 떨려서 스크롤을 내려버렸다. 생생한 공포와 무력감을 느꼈다. 얼얼해진 몸을 추스르다가 불쑥 분노가 올라왔다. 만약 엘리베이터에서 담배 피는 걸 제지한 사람이 남성이었다면, 그 남자는 손쉽게 주먹을 휘두를 수 있었을까? 일면식 없는 사람을 때릴 수 있는 폭력은 언제나 공평하게 발휘되는 걸까? 남자가 담배를 핀다고, 혹은 자신이 담배 피우는 걸 제지했다고 주먹을 휘두르는 여성은 얼마나 될까.

 

생각해보니 이상하다. 나는 화도 많고 악착같은 기질이 있지만, 한 번도 누군가와 몸싸움 하며 때리는 걸 상상해 본 적이 없다. 반면 맞는 걸 상상하는 건 익숙하다. 어릴 때부터 들어왔던 비명소리, 누군가가 맞는 장면을 접할 때면 폭력을 가하는 사람이 아닌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 나를 세웠다.

 

폭력이 발생하기 전에 미리 조심하고 사근사근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내게 주어진 유일한 처방전이었다. “야 서봐!”라며 치근덕대던 술 취한 남성에게 맞서지 못하고, 모르는 남자에게 갑자기 욕을 들어도 못들은 척 피하고, ‘바바리맨’을 보면 도망치고, 함부로 내 몸을 침범하는 남성에게 더 화를 내지 못하고, 데이트 폭력을 가했던 남자친구에게 더 따지지 못했던 것도 같은 이유였다. 내가 더 큰 폭력에 노출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오랫동안 나를 지배했다.


▶조지 밀러 감독, 샤를리즈 테론 주연 영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오스트레일리아 2015) 중에서

 

폭력은 성별화된 자연스러운 차이일까? 남성 뿐 아니라 인간 모두에게 폭력성은 분명 존재한다. 그렇다면 남성에게 유독 폭력이 권장되는 시스템의 문제라고 봐야하는 걸까. 최근에는 여성이 평화의 상징이라는 기존의 틀을 깨고, 여성에게도 폭력성이 있으며 그것을 적절하게 끌어올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그렇지만 폭력을 논할 때 성별에 따라 그 기준은 큰 차이를 보인다. ‘사근사근’하게 말하지 않으면 폭력적이라는 말을 듣고, 칭찬을 ‘고분고분’ 듣지 않아도 극단적인 페미니스트라고 불리는 현실에서, 나와 그들이 인식하는 폭력의 차이를 한동안 고민했다. 나의 폭력성은 어디까지 확장되고 발현되어야 할까.

 

여성학자 임옥희 교수님은 영화 <매드맥스>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폭력성을 ‘대항폭력’이라고 말했다. “그녀들이 보여주는 폭력의 창조성은 폭력을 위한 폭력이 아니라 공존을 위한 것이다. 서로의 나약함과 그로 인한 고통과 슬픔을 나눌 수 있는 연민으로 인해, 그들은 폭력을 위한 폭력으로 끝 간 데까지 치닫지 않는다.”

 

어느 한 성별이 ‘피해자’가 되는 게 자연스럽지 않다는 걸 보이기 위해서라도 폭력을 위한 폭력이 아닌, 공존을 위한 폭력이 필요하다. 어떤 존재도 예비 피해자여서는 안 되므로, 살아있는 존재는 언제 어디서나 존중받아야 한다는 무거운 진리를 위해서라도.

 

그녀의 울음소리 없는 밤

 

▶ 모두가 고요한 밤  ⓒ그림: 칼리


요즘 나는 새벽마다 온 감각을 바깥의 소리에 집중하는 대신, 내 안에 집중하며 노래를 만든다.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말들이 있는데, 그 언어를 새롭게 발견하는 일이 흥미롭다. 두 번째로 만든 노래에는 이런 가사가 입혀졌다.

 

“고독이 찾아오는 새벽, 나는 창가에 앉아. 거리를 비추는 화려한 불빛 속의 사람들의 소리, 섣부른 희망 소리 나부끼는 이 거리에서 내 고독은 없네. 어디선가 들려오는 한 여자의 울음소리. 그녀의 울음이 사람들 함성에 가려졌네. 그녀의 울음소리를 들려주세요. 그녀의 울음소리를 돌려주세요. 그녀의 울음소리. 고독이 찾아오는 새벽, 나는 창가에 앉아. 눈물 맺힌 그녀를 바라보네. 창가에 비친 그녀를 바라보네. 그녀도 나를 바라봐.”

 

성탄절을 맞아 거리에서 울리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듣다가 떠오른 가사. 가사를 흥얼거리며 손으로 옮겨 적다가 문득 ‘어느 밤들’의 기억이 떠올랐다. 오늘도 그 방이, 몸이 무사한 고요한 밤이길 바란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Feminist Journal IL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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